한국희곡

고연옥 '주인이 오셨다'

clint 2024. 6. 15. 20:44

 

 

주된 공간은 식당이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고, 간판도 없는 볼품없는

작은 식당이었지만, 나중엔 크고 유명한 식당이 된다.

어느 날, 억척스러운 식당주인, 금옥은 포주를 피해서 자기 집으로 피신해 들어온

흑인 여자를 구해주고, 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아들 종구와

결혼시키는 방법으로 영원히 소유하려 하는데.....

그리고 종구에게 절대로 말을 가르쳐선 안 된다고 충고한다.
말을 알게 되면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 될 것이라고 예감하기 때문이다.
순이와 종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자루이다.
자루는 이 집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순이를 보고 자라면서
순이와 다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과도한 노력이 결국 동년배들의 세계에서 추출당하는 이유가 된다.
몇 년 후 자루는 자기를 버린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그 모든 것이 순이로부터 비롯된 굴레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순이를 죽이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연쇄살인범이 된 자루 역시 교도소 독방에서 

언어의 소통에 대해 생각한다.

 

 

 

 

 

현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연극을 통한 관객과의 소통,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아야 한다는 작품<주인이 오셨다>는 연쇄살인의 문제를 개인적 문제가 아닌 현시대의 사회 문제로 부각시킨다.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연쇄살인마 `자루`는 가족이자 친구이며 우리의 이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낙인과 배신, 착취의 연속이었다. 처음 태어남 자체가 타인의 욕망의 희생양이었던 자루의 인생은 폭력과 주종관계로 전철된 사회를 자기의 집, 작은 가게에서부터 배웠다. 약하고 힘없는 `순이`에게 주인 행세를 하며 소유하고 지배하는 `금옥`과 `종구`의 일상이 그대로 `자루`에게 전해지면서 결국 그의 폭력성으로 길러진 것이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소통의 방법은 폭력을 통한 주목, 그를 통한 자기 존재감의 극대화이다.

 

 

 

 

이렇듯 묵직하고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특유의 상황적 유머를 감각적 전개로 풀어내었고 그것이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해지면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자기성철의 시간을 만들어준다. 타자에 대한 사회적 폭력성을 일상적 장치들과 연합하여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자신의 이야기, 덧붙여 우리도 무의식중에 가해자일 수 있음을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사이코패스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을 죽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 ‘자루’는 친구와 친구 어머니를 죽였다. 그리고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그는 과연 사이코패스일까? 자루는 흑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가 집안에서 노예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는 첫 살인 후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어머니 ‘순이’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어머니를 죽이기까지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겠다고 결심한다. 이 작품은 선과 악의 잣대를 가지고 살인자를 판단하지 않고 왜 그러한 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파헤친다.
‘주인이 오셨다’는 타자성에 대한 이런 통찰을 역방향에서 보여준다. 바로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타자 화된 아이의 관점에서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아이를 구원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공 자루는 철저히 이기적 욕망의 부산물이다. 그의 엄마 순이는 한국 사창가에 팔려온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다. 사창가를 탈출한 순이는 우연히 금옥에게 발견돼 금옥의 식당에서 일하며 지내다 그 아들 종구의 아기를 갖게 되는데 그게 자루다. 금옥과 종구는 이를 계기로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순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타적 동기와는 상관없다. 각각 식당에서 일할 노예, 자신의 성욕을 채워줄 노예로서 순이를 묶어둘 사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금옥과 종구는 자루의 엄마로서 순이를 계속 노예로 묶어두기 위해 멍에도 씌운다. 바로 말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순이를 노예로 부리기 위해선 그를 이해 불가능한 타자로 남겨둬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쉽게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면서 이해 불가능한 순이야말로 ‘여성적인 것’의 상징이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좌절과 분노에 싸여 자란 자루는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자 비굴할 정도로 우정을 구걸한다. 하지만 독특한 외모로 인해 짐승, 괴물, 악마로 호명되면서 역시 철저히 타자로 소외된다. 결국 타인들이 자신을 호명하는 대로 악마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의 불행의 원천으로서 어미마저 죽일 수 있는 괴물이 되기 위해 연쇄살인마가 된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알리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이 타자의 삶을 지배하고 생사여탈권을 쥔 주인임을 선포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 살인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다시 엄마를 찾아간 그는 자신과 동일시했던 엄마에게서 전혀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무너진다. 그토록 만만하게 여겼던 엄마에게서 ‘내가 아닌 불가해한 타자’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언어를 익힌 자루와 한국어를 배운 순이가 대화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에서 느끼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이렇게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이해영역의 바깥에서 서성이는 타자에 대한 사랑만이 진실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고연옥 작가는 한국사회의 폭력의 기원에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자를 더욱 더 타자 화하려는 욕망이 숨어있음을 섬뜩하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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