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서는 정권교체와 IMF 위기를, 북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던 1998년.
남과 북, 각각의 이념을 수호하는 이들에게 찾아온 혼돈의 시기!
북한 엘리트 출신 한정민은 김정일이 보고 싶어 하는 한국영화 필름을
입수해 북으로 보내는 임무를 맡고 남파된다.
그 중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영화 ‘무제’!
임무 실패의 위기 앞에 결국 정민은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먼저 접골원 아르바이트겸 작가 지망생인 복인에게 시나리오를 부탁한다.
복인은 이 영화가 깐느의 비경쟁부문 '주목할만한 시선'에 출품될 예정이라는
정민의 거짓말에 속아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친다. 그런데… 장르는 SF,
배우들은 왕년의 에로배우, 노숙자, 음모론자, 사채업자?!
과연 정민은 무사히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사실과 픽션이 교묘하게 얽혀있다. 먼저 시간 배경은 1998년이다. 1997년 12월 3일, 한국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IMF에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곧이어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었고, 98년 2월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한국 경제가 대단히 어려운 위기상황에 처한 그 시절이 <깐느로 가는 길>의 배경이다. 북한 역시 1994년에 김일성이 죽고, 아들인 김정일이 세습을 한 후,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식량 위기를 겪었다.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안정적인 생활이 절실했다. <깐느로 가는 길>의 시대다.
한정민, 그의 상사인 강신종은 영화사 대표와 직원으로 위장하고 있다. 말짱 거짓도 아닌 것이 그들의 임무는 김정일이 원하는 한국영화 필름을 입수하여 북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이다. 김정일은 유명한 영화광이었다. 대사에도 나오듯, 김정일의 영화 수장고에는 <아리랑>을 비롯한 한국영화들과 할리우드, 유럽 영화들의 필름이 많이 있다고 한다. 한국과 할리우드 등의 영화 필름을 구해서 북으로 수송하는 해외팀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강신종과 한정민의 임무는 사실에 기초한 설정이다. 그들은 국가원수의 취미생활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웅이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는 아이러니다. 먹을 것이 없어 수천, 수만이 굶어 죽어가는데 영화 필름을 구하기 위해 정신없는 간첩들이라니.
한정민은 북에서 요구한 영화 필름을 다 구했지만 <무제>라는 영화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청량리의 한 극장에서 일주일 상영하고 겨우 7명이 봤다는 영화. 영화사는 망했고, 감독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당에서 내린 임무를 실패했다고 보고할 수 없었던 한정민은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본 사람도 없고, 어디에도 영화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수수께끼 같은 영화를, 직접 만들어 필름을 북으로 보내려는 것이다. 문제는 단 2주일 만에 완성해야 한다는 것. 사채업자에게 제작비를 빌리고, 배우는 사채업자와 전직 에로배우와 음모론에 빠진 무직의 청년 등등 출연료를 주지 않고 부를 수 있는 지인을 동원한다. 시나리오는 접골원에서 일하며 데뷔를 꿈꾸는 작가 복인에게 부탁한다. 영화사 대표가 깐느영화제 사람들과 막역한 사이이고, 비경쟁부문 ‘주목할만한 시선’에 작품 하나가 비었는데 급히 만들어서 출품하려 한다는, 하나도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여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 장르는 SF. 과연 이 영화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깐느로 가는 길>은 꿈에 대한 이야기다. 주어진 명령이나 규칙만을 따르며 나아가는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지켜야 하는 무엇은 과연 존재할까. 한정민은 모스크바의 국립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으나 간첩이 되었고, 영화를 잘 안다는 이유로 필름 수급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 기회가 찾아왔다. 이 영화가 깐느로 간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지만 아마도 믿고 싶었을 것이다. 정말 간느로 갈지도 모르는 영화를 내가 만들고 있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가짜에 싸구려임을 알고는 있지만, 어쩌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소련의 <전함 포템킨>과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할리우드의 <스타워즈>까지 그가 본 모든 영화들을 꿈꾸며, 자신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막바지에 숨은 정체가 드러나는 복인은 '이념의 배신'을 확인하려 한다. 그 역시 이념에 희생되고 버려진 자다.
정민과 복인은 양극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 닮아있다. 정민은 판타지를 원하지만 북한의 가족을 걱정하는 현실주의자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정인은 사실 자신이 만든 판타지에 갇힌 자다. 어설프고 한심하지만, 점점 호흡이 맞으며 기이한 희망이 생기는 중반이 지나면서 <깐느로 가는 길>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초반부터 의심스러웠던 복인의 정체가 드러난다. 갈등이 심화되고, 새로운 상황들이 이어진다. 정민과 복인 모두에게 영화의 완성은 중요하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모든 열정을 부어 영화가 완성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어긋난다. 이상도 다르다. 정민은 판타지를 원한다. 복인은 리얼리티를 원한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아니 현실에서 한 발이라도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이 정민에게는 존재한다. 복인은 결국 현실에 발을 잡힌 채 눈을 감아버린다. 정민과 복인은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맺을 것인가로 대립한다. 이곳을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어쩌면 우리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지지부진한 현실에 그저 널브러져 있는 것은 아닐까. 단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도 이미 새로운 세상은 존재할 텐데. 정민도, 복인도, 배우들도 모두 이 세상의 루저, 패배자들이다. 그런데 조잡한 영화를 찍으면서도 점점 빨려들어 희망을 갖는다. 뭔가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언제나 희망차고, 건강하다. 그들은 깐느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무엇인가를 위해 가고 있다. 그리고 촬영 마지막에 들어간 날, 촬영현장에서 격돌한다., 작가는 마지막을 장면을 바꾸자고 한다. 그러면서 감독도 출연진의 한명으로 만들고, 감독이 소품으로 준 총으로 마지막 장면에 그를 사살한다. 그리고 자신도 자살한다. 출연진이야 영화장면인줄 알지만 그것이 이념문제로 인한 감독과 작가의 죽음일 줄이야......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상의 다양한 활용이다. 무대 위에서 촬영되는 영화 장면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장치로도 사용되지만, 인물의 내면을 영상화시키는 방법으로도 활용되어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든다. 상징적인 무대와 조명, 아날로그 SF 의상과 소품이 어우러져 연극적 표현을 뛰어넘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극 중 이야기를 더욱 다이나믹하고 활력적으로 이끌어 간다.
이건 픽션이지만 작은 영화관에 개봉해서 겨우 7명이 본 영화 '무제'.
기네스북에 올라서 우연히 감독을 찾아내지만 그는 자신의 필름을 불태웠단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지일 '마당놀이 심청전' (2) | 2024.06.12 |
---|---|
이로마 '홍두깨' (1) | 2024.06.12 |
김기정 '빈센트 반' (2) | 2024.06.10 |
함수남 '별빛 속에 서다' (2) | 2024.06.10 |
김혁수 '서울에 온 팥쥐' (2) | 2024.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