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배삼식 '3월의 눈'

clint 2024. 5. 23. 13:01

 

 

<3월의 눈>은 누구나가 경험하는 죽음과 상실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재개발 열풍으로 곧 사라져버릴 한옥의 고즈넉한 풍채,

그 쓸쓸하지만 고고한 모습처럼 이 작품의 이야기도

느림과 여백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볕 좋은 한옥집 툇마루, 노부부 장오와 이순은 손자를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인

이 집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로운 집 주인은 그 자리에 삼층짜리 건물을 올릴 계획이다.

평생을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이 곧 없어질 위기지만,

장오와 이순의 일상은 담담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가진 것을 다 내주고 떠나는 장오의 뒷모습은 소멸해 가는 것이

실은 새로운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한옥 한 채가 무대전체에 자리를 잡았다. 지붕은 없으나 대들보와 기둥이 실물과 다름없이 만들어지고,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이 달린 방이 대청 양쪽에 하나씩 있다. 객석을 향해 대청에서 내려올 수도 있고, 대청 뒤쪽으로도 내려가게 되어있다. 배경 막 왼쪽에 집으로 들어오는 문이 있으나 객석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문과 대청사이에 높은 담장이 있고, 담장은 직각으로 꺾어져 무대왼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문을 들어서면 집으로 들어오면서 좁은 마당을 통과하게 되어있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고, 높은 지대에 있는 한옥인지, 다른 한옥 지붕들이 배경 쪽으로 내려다보인다. 마루로 올라서면 대청 양쪽에 있는 방의 여닫이 문짝의 창호지는 누렇게 변색이 되기는 했으나, 뚫어지거나 너덜대지를 않아, 아직 새 창호지로 갈아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남녀 주인공이 문짝을 떼어 내 툇마루에 걸쳐놓고, 물을 뿜어 창호지를 뜯어내고는 풀을 쑤어 새 창호지를 붙인 후, 다시 문짝을 달아놓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대청마루 밑에는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있고, 섬돌을 내려서면 무대 오른쪽으로 조그만 화분이 서너 개 놓여있다.

 

 

 

 

연극의 도입에 오른쪽 방에서 곱게 나이가 들고 자애로운 모습의 부인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를 흥얼거리며 나와 마루 왼쪽으로 걸어간다. 부인은 왼쪽 방 툇마루로 다가가 방문 앞에 놓인 둥근 체에 담긴 붉은 털실과 뜨개바늘을 꺼내 들고는 툇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한다. 잠시 후 대문에서 이집의 가장인 듯싶은 노인이 들어와 천정에서 늘어뜨린 줄을 잡고 신을 섬돌에 벗은 후 대청으로 올라선다.

노부인과 노인의 대화에서 이발을 못하게 된 사연과 뜨개질거리에 관한 얘기가 오가고, 노부인은 3월이 되었으니, 문창호지를 갈자고 제의한다. 나이든 사람들의 내외가 대개가 그렇듯이 가장은 늘 귀찮아하고, 부인은 그러한 남편을 일으켜 세우고 다구치고 하는 광경이 남의 집 일 같지 않다. 결국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남편은 창호지를 사러 밖으로 나가고, 부인은 오른쪽 방으로 들어간다.

이때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남정네와 아낙네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친다. 한옥이 있는 지역이 재개발지역인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이 집이 매각되었기에 건물을 뜯으러 온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이들은 마루 창부터 떼어내기 시작한다. 곧이어 마을의 통장이라는 중년여인도 등장하고, 통장은 온전하게 보존된 한옥을 뜯어내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에 동조하듯 젊은 남녀 한 쌍이 사극영화촬영장을 찾아 이 마을로 들어오고, 세트장을 찾는 남녀에게 통장여인은 바로 이집의 한옥구조를 보도록 권한다, 뒤이어 등장한 일본인 관광객 남녀 한 쌍도 신기한 듯 집 구경을 하고 촬영을 하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작금의 확대되어가는 아파트 건축과는 반대로, 점점 사라져가는 한옥과 전통가옥의 소멸이,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를 거라는 걱정과 함께, 한옥지정마을 이외에도 그 전통양식을 볼 수 있는 몇 채의 한옥이라도 군데군데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가장이 창호지를 사가지고 돌아오고, 노부부는 물을 뿜어 낡은 창호지를 떼어내고는 풀을 쑤어 새 창호지를 함께 붙인다. 함께 작업하며 주고받는 동작이 여간 정겨운 모습이 아니다.

 

 

 

내외가 작업을 마치자 이집과 친분이 있는 양돈 사업가가 노숙자의 모습으로 등장해, 창호지를 갈고 남은 풀을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에서, 구제역으로 파산을 해 걸인이 된 축산가들의 비참한 신세가 연극을 통해 관객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든다. 또한 손자며느리의 방문으로 비로소 노 가장은 독거노인이며, 손자의 부채를 갚아주기 위해 한옥을 매각한 사실이 알려지고, 노 가장은 홀로 양로원으로 가리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평생 해로한 부인과 함께 살던 한옥을 잊지 못하는 가장의 의식 속에, 항상 부인의 모습이 자애롭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관객은 감지하게 되고, 관객 저마다의 눈에서 흐른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감동을 공유한다.

대단원에서 한쪽 팔은 뜨개질이 덜된 붉은색 털실윗도리를 걸친 노가장이, 집터와 함께 영원히 자리한 노부인과 작별하며 한옥을 떠나는 모습과 술잔을 들고 권하며 배웅하는 노숙자, 그리고 집을 철거하는 사람들 모두의 머리위로 내리는 3월의 눈은 명장면이 되어 관객의 가슴과 뇌리에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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