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안장훈 '요한 지옥에 갔다?'

clint 2023. 12. 25. 19:23

 

 

희곡, 안장훈 작 요한 지옥에 갔다?” 는 세인들의 통념을 크게 뒤집어 놓고 있다. , 메시아가 오기 전 엘리아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람들을 회개시켜 세례를 주고 메시아를 증거한 요한이 하늘 나라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서 자학과 고통 속에 지내는 것으로 작품 속의 얘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 속에서야 나름대로 그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요한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성경의 관련 구절들을 근거로 요한의 영()이 스스로 말하는 것으로 꾸미고 있지만 여기에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요한의 태어남과 활동에 대해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자칫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복음을 포함하는 성경 자체가 원본을 무엇으로 누가 번역했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고, 또 같은 책 안에서 복음마다 같은 사안에 대해 기술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더욱이 비유적 표현이 많아 자칫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기 쉬운 면 때문에 정확한 논리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똑같은 한권의 성경을 놓고 해석하는 차이 때문에 오늘날 많은 종파가 생겨나 있는 것처럼 자칫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이런 점을 전제해 두면서 필자가 느낀 혹은 확인한 몇 가지 점들을 중심으로 이 작품과 관련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요한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 혹은 갈 수도 있다는 문제 제기에 대하여

지옥의 세계에서 요한의 삶이 '역사의 대반역자'란 말로 말해지듯이 요한은 자기 자신의 존재, '엘리아'임을 부정하였고, 나아가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의심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작품 속에서 이런 논리적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전제한 네 복음서에 나타난 몇몇 구절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첫째, 요한 자신이 엘리아임을 부정하고 있는 대목으로는 요한복음 1 19절부터 28절까지를 들 수 있다. ,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라고 묻게 될 때 요한의 대답히 모호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다만, 선지자 이사야의 말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다. 물론 잘못된 대답이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소리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치더라도 엘리아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와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한이 자신을 엘리아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을 부정한 것이 되고 그것은 결국 엘리아 뒤에 오게 된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세인들에 의해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아닌 사람이 메시아라고 사기를 치고 다니는 것으로 세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인식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그가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 들으면, 그럴 듯한 얘기다. 당대사람 들은 엘리아가 먼저 와 길을 닦아 놓으면 유대인들을 구원하러 메시아가 온다고 철저하게 믿었다고 하는 당대 현실성을 전제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이 또한 마가복음 9 11절부터 13절까지에 나타난 바 그대로다. 그렇다면, 요한은 정말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였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한 것만으로도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외치는 일은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엘리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말로 엘리아냐?'라는 비아냥거리며, 혹은 의구심이 섞인 질문에, 그래 '내가 바로 엘리아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오만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직접적인 긍정의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은 요한의 성품과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그리고 성경의 해석에 있어 자구 하나하나에 집착하다 보면 전체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처럼 요한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그의 삶을 전 체적으로 조망하지 않고 부분적인 것을 전체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일종의 견강부회이다. 이런 점은 다음에 논하게 될 메시아에 대한 요한의 의심도 마찬가지다.

둘째, 요한이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의심했다는 근거는 이렇다. 누가복음 7 18절부터 23절까지에 나타난 바 대로 그리스도가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요한이 옥중에서 두 명의 제자를 그리스도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라고 묻게 했다는 대 목이다. 바로, 이 대목 때문에 요한은 세례를 주고 많은 사람을 회개시켜 주 앞에 나아가도록 열심히 길을 닦았지만 메시아를 의심한 이중적 삶을 살았다고 작가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문제를 던져 놓고 있다. 물론 여기에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요한의 순간적인 의심은 옥중에서 고생할 때에 일어난 일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면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고 세례까지 주었던 메시아를 의심한다는 것은. 그런데 작가는 요한의 영의 입을 통해서 메시아'라고 증언하는 것은 때가 있었겠지만, 난 그 분이 메시 아란 걸 의심했었소.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예수께서 나의 제자를 통해 내게 해 주신 마지막 말씀이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작가의 논리가 진실이라면,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단 한번 의심한 죄로 요한을 지옥에 보냈다는 것 밖에 안된다. 물론 모든 문예 작품이란 게 허구, 곧 상상 속에서 짜 여지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의 논리적 당위, 곧 리얼리티가 떨어지면 긴장감 속에서 맛보는 탄력적인 재미 또한 떨어 지게 마련이다.

2. 이 작품의 문학적 의의

아마,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만 그 인물을 '요한'이라는 사람을 선택했을 뿐이다. 물론 요한과 관련 성경 구절에서 약간의 근거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가 세인들의 통념을 뒤바꿔 놓음으로써 관심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의도도 계산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무대와 음악과 조명, 배우들의 연기가 어우러져 얼마나 역동적이고 실감나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엮어 놓느냐가 문학적 작품으로서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 이시환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의 글 - 안장훈

지금 연극에 미쳐 있듯이 난 한때 종교에 푹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으로써 성서를 배워보자는 단순한 학문적인 노력이 나를 이른바 광신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느낌대로의 행동이 진실이라고도 말들은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 사고가 얼마나 편협되고 일방적이었나 내 스스로 비평해 보게 된다. 우리는 허상속에 갇혀진 상태에서 그 허상이 진실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학문적인 욕구가 누군가를 추종하는 광신도가 되어버린 변질된 나를 만들어 버린 것처럼 우리는 변질되고 왜곡된 세상속에 묻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이 작품의 소재인 세례 요한은 기독교 내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순교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지만, 순교자이며 큰 성자라고 믿고 있는 그에 대한 시각이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인 견해이며 정통인 것이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정명석 목사는 전자의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 두 견해 모두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는 예수의 마지막 말은 그대로 믿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내가 다니면 목사의 견해 중심으로 쓰여진 것과 엘리아 엘리아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는 작가의 견해가 어울려져 정통이 아닌 주장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보여질지는 모르지만 나는 단지 무엇이 진실인가 의문을 던지고 싶을 뿐이다. 이러한 의문은 종교논쟁 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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