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의 어느 벌판, 커다란 쿠르간(고분)이 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쿠르간을 파헤치는 1937년의 고려인들과 어떤 미래의 고고학자들. 강제이주를 당해 어딘지 모를 황야에 버려진 소녀 율리야의 가족(A)과, 중앙아시아에서 신라 왕족의 흔적을 찾기 위해 죽은 한박사 대신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남소영(B)이 교차되고, 연결되며, 위로하는 이야기다.
(A) - 땅굴을 파 몸 뉘일 집을 짓던 율리야는, 다리를 다친 조선인 일본군 강산을 만나 치료해준다. 한번도 조선에 가본 적 없지만 스스로를 조선인이라 칭하는 율리야에게 강산은 조선의 놀이와 노래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강산은 조선 의병대 출신 응수(율리야의 할아버지)에게 정체를 들키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율리야는 강산이 조선 사람이라며 감싸지만 응수는 저자는 조선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강산은 자신은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누구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떠난다. 암에 걸려 시력을 점점 잃어가던 응수는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떠나려 한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가족을 보살핀 적 없던 응수의 초라한 뒷모습에 대고, 엄마와 아들을 잃고 말문을 닫았던 로자(율리야의 엄마)가 묻는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당신에게 당신을 부를 말조차 빼앗겨버렸다고. 연해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약속을 해주던 응수가 떠나자 율리야는 돌아갈 수 없을까봐 불안해한다. 로자는 자식들을 남편이 있는 사할린에 보내려하지만, 사할린에 있던 조선인들마저 모두 실려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로자는 웃는다. 비로소 자유로워졌다고. 이제 우린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율리야는 이해할 수 없는 엄마를 보며, 언덕(쿠르간) 위로 뛰어올라간다.
(B) - 뒤늦게 카자흐스탄 쿠르간에서 신라 왕족의 흔적을 찾는 연구팀에 합류하게 된 남소영. 오로지 유물을 찾는 데만 집중하는 냉정한 성격의 소영은 캐나다 엄마에게서 소영의 친엄마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지만 일 핑계를 대며 연락을 끊는다. 소영은 프로젝트를 주도했지만 돌연 세상을 떠나버린 한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평소 고려인에 관심이 있었고, 매사 열정적이었다던 한박사를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지만, 소영은 관심이 없다. 소영은 친엄마를 만나고 오길 바란다는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진 엄마의 소식에도, 그 순간 발견한 쿠르간 안의 유골에만 집중한다. 소영은 꿈에서 신라 왕족처럼 보이는 여자를 만나고, 그게 그 유골의 주인일 거라 확신한다. 유골을 검사하던 도중, 임산부 류정주가 쓰러진다. 그러나 결과에만 관심 있는 소영을 사람들은 외면한다. 결과지에는 그 유골이 1930년대 그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것이라는 사실이 써있다. 소영은 꿈에서 다시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가 한박사일 거라는 얘길 들은 남소영은, 한박사에게 따지다가, 계속 핑계를 찾아 헤매며 캐나다로 돌아가지 않는 자신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한박사에게 묻는다. “누구예요?” …류정주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소영은 그 빈자리에 스카웃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남소영은 가지 않겠다고 한다. 한참을 헤맨 남소영은 다시 쿠르간에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 무덤 안으로 몸을 뉘인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만난다. 율리야와 남소영. 만날 수 없는 시간, 만날 수 없는 장소에서 두 사람은 분명히 만난다.
이소연
1992년 12월 파주에서 태어나 2022년 8월 현재 서울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경계와 사랑, 모험 그리고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마트료시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 〈듣는 희곡 : 괄호에 귀대면〉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 〈희곡상을 위한 희곡쓰기〉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 〈어제의 당신이 나를 가로지를 때〉 〈43kg만큼의 상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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