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옛것들이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거나 먼지로 변해 버린 미래,
물건의 가치를 판단하여 보존과 복원에 대해 결정하는 ‘보존과학자’가 있다.
오랜 시간 쌓여있던 물건들 중 예술작품이라고 여겨지는 텔레비전을 발견하곤
물건에 담긴 진실에 다가고자 한다.
복원의 과정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한 가족의 이야기와
과거로부터 시작되는 어떤 문 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뒤섞이며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가 되어간다.
폐허가 된 세상에 홀로 남은 보존과학자가 지키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가치를 매기고 순위를 정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지만
우리는 가치가 순위 매겨지는 세상, 평가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던지며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
가치 판단의 기준 등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보존과학자>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극중 등장하는 ‘철 전문가’, ‘유리 전문가’ 등의 역할을 그 자체의 사물로 묘사하고, 텔레비전과 아버지가 계속해서 소통하는 등의 장면을 통해 사물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살아있는 존재로 간주한다. 사물과 인간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각자 하나의 존재로서 감각하는 방식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에 대해 질문한다.
의미 이전에 실재하는 존재의 물성을 감각하는 '보존과학자’ 이야기 예술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을 얻는 방법이라더니, 수명이 다한 줄 알았던 '다다익선'이 부활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듯, 2022년 9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디어아트의 거장 백남준(1932~2006)의 대표작 '다다익선'(1988)의 재가동 기념식이 열렸다. 브라운관의 노후화로 인한 화재 위험으로 2018년 가동이 중단된 이래 4년 반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다다익선'의 보존·복원 작업에 참여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권인철은 여전히 '인공호흡기를 단 상태나 마찬가지" 라고 말한다. 예술작품도 늙고 병들어 끝내는 죽음을 맞이하는 모양이다. 운명의 순간 이 '보존가' 또는 '복원전문가'라고 불리기도 하는 보존과학자(conservator)'의 부단한 노력으로 근근이 늦춰지고 있는 것일 뿐. '영원불멸의 예술'이라는 신화를 위해 작품 뒤에서 묵묵히 작품의 '생로병생(生老病生)'을 살피는 '미술관의 의사', 그가 바로 이 작품의 보존과학자다 여러 전작에서 '소멸'을 이야기해 온 작가 윤미희는 보존과학 자에게서 생경한 생명력을 느끼고 <보존과학자>를 구상했다고 한다. 안주하기를 거절하는 작가의 선택이다.
<보존과학자>의 보존과학실에도 작동을 멈춘 텔레비전 한 대가 놓여있다. 보존과학자은 이를 '다다익선'의 일부라고 믿으며 고군분투 중이다. '다다익선' 재가동 이전인가 싶지만 백남준 탄생 1000주년을 얼마 앞둔." 그러니까 대략 2931년경의 어느 날, 오랜 시간 수장고에 머물던 텔레비전 한대가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아마도 과거의 어느 시점, 어떤 윤리적인 보존과학자가 자신의 실패를 담담하게 인정하며 이 고물을 보존 복원해낼 수 있는 미래가 언젠가는 도래하리라는 기대 로 수장고 구석에 밀어넣어둔 것일 터다. 과거가 미래에게 남긴 숙제인 셈. 그러나 <보존과학자>가 그리는 가상의 미래는 썩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생존자 보존과학자와 그의 동료 유리알루미늄에 따르면 온갖 재앙이 불어닥친 이후로 거의 모든 것이 사라졌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만들 생산능력도 재생능력도 상실했다고 한다. 남은 것은 오직 데이터뿐이다. 사물 없이 데이터만이 남겨진 세계는 황폐하다. 물성을 잃고 의미만이 남겨진 셈. 의미에 대한 강박이 가득하다. 보존과학자1은 자신이 찾아낸 텔레비전이 그저 여느 텔레비전이 아니기를, 예술작품이기를, 어마어마한 예술작품 '다다익선'이기를, 또는 백남준이 쓰던 텔레비전이기를, 아니 불멸의 예술가 백남준이 그 안에 살아있기를 소원한다. '엉뚱한 상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의미'를 붙잡아 보려 한다. 보존과학자의 열정일 터다. 허나 의미에 대한 그의 집착은 애써 살려낸 텔레비전을 부정하는데 이른다. 기실 익숙한 일이 아닌가 가치를 서열화하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 존재의 있음마저 부정하는 일. 돈이 없다고 재능이 없다고 학위가 없다고, 꿈이 없다고 집이 없다고, 이툰 게 없다고 쪼다 같은 인생 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지는 그 세계를 우리는 이미 안다. 텔레비전을 안식처 삼다 마침내는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가 버린 '평범한 아버지'와 그의 세 자식들의 생생한 '현재' 이야기가 극장 밖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해온 터, 미래의 보존과학실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오늘'과 중첩된다. 인간 너머 비인간 사물을 아우르는 확장된 시선으로 '오늘'을 다시금 마주한다.
"오늘날 우리는 실재를 지각할 때 무엇보다도 정보를 얻기 위해 지각한다. 그리하여 실재와의 사물적 접촉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실재는 고유한 여기 있음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실재의 물질적 울림들을 더는 지각하지 못한다. 철학자 한병철의 말이다. 그는 디지털 질서의 찬란함에 가려진 이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며 '실재의 물질적 울림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바로 <보존과학자>의 텔레비전이 보존과학자에게 느껴 보길 권하는 사물의 온기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손상은 자연스러운 시간의 반영이다. 부식이나 마모는 사물도 죽어 가는 존재, 즉 생명이라는 것의 반증이다. 인간과 사물은 소멸이라는 순리를 공유한 사이인 셈. 하여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남겨진 질문은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가로질러 만날 것인가, 그리고 그 유한한 만남의 시간 동안 어떻게 서로를 감각할 것인가일 게다. <보존과학자>는 의미로 치환되지 않는 존재의 물성을 서로 감각하는 일을 상상하며, '의미'를 경유하지도 '영원'을 담보하지도 않는 희망을 발견한다. 가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고, 세우고, 지키고, 부수고, 다시 세우는 일종의 '무대 크루' 림, 송, 아누, 제제를 통해 연극의 가상은 언제나 실재의 물성을 경유하여 탄생하고, 탄생했다 이내 소멸하며, 소멸했다 다른 모습으로 부활함을 환기하며 전하는 '보존'의 세계다.
작가의 말 – 윤미희
엉뚱한 상상을 고민의 흔적을 애쓰던 시간을 지면 위에, 무대 위에 올려 둡니다.
곧 당신의 보존과학실에서 마주하기를.
윤미희 작가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있게 되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다. 아주 유명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보잘것없는 (흔히 그렇다고 판단되는) 무언가를 남겨두고 싶었다. 의미라는 게 부여하기 나름이라면, 어디에 의미 부여하며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공연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작의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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