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 『오후 4시』는 평생 동안 학생들에게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다가 퇴임한 노인이
아내와 함께 조용히 여생을 보낼 집을 찾던 중 첫눈에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평생 동안 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다가 정년이 되어 퇴임한 평교사,
공자- 맹자의 교훈과 이백- 두보의 정서를 체화한 할아버지가 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소란스러운 도시를 벗어나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전원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주인공 에밀과 그의 동갑내기 아내 쥘리에트는 바로 그런 그림과 일치한다.
호젓한 숲속의 빈터에 자리 잡은 그 작은 집에서는 두 사람의 동화가 시작될 참이다.
묘사보다는 대화가 많고, 표현은 평이하고, 구성은 단순하다.
실제로 브뤼셀의 한 비평가는 처음에 작가가 독자들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려는 줄 알았다고 쓰고 있다.
그 평온한 그림 속에 침입자가 등장한다.
거구의 이웃집 남자 베르나르댕은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묻는 말에만 간단히 대답할 뿐 말없이 그 집 거실에 앉아 있다가 6시가 되자 돌아간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에밀의 현학도, 쥘리에트의 무구함도 이웃집 남자의 무례와 침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즈음에서 독자는 약간 진부한 동화를 집어든 것 같다는
애초의 예상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바야흐로 동화는 블랙 코미디가 된다.
인용되는 건 스퀴트네르와 베르길리우스와 팔라메드지만, <타인이 바로 지옥>이라고 했던
사르트르가 슬그머니 떠오른다. 자기(에밀과 쥘리에트)와 타인(베르나르댕)이 맞섬으로써
낙원은 깨어지고 지옥이 멀지 않다.
평이한 문장과 단순한 구성은, 이웃집 사내의 몸무게 아래 눌린 거실 소파나
그의 앞에 놓인 뜨거운 커피처럼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이제 분명해진다.
이어 이웃집 여자 곧 베르나르댕 부인이 등장하면 이 소설은 컬트로 발전한다.
역시 말 없는 이 인물의 등장으로 사태는 좀 더 복잡해진다.
일체로 여겨졌던 에밀과 쥘리에트가 자기와 타자로 분리되면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필연적인 존재의 벽이 부각되고,
다시 주인공 에밀의 길들여진 자아와 본능적인 자아가 자기와 타자로 분리되면서,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과는 별개라는
화자의 첫 고백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든다.
한편 당연히 타자여야 하는 베르나르댕 부인은 쥘리에트와 같은 편에 편입된다.
이런 심리적 탈바꿈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예의 그 동화적 문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숲속의 빈터에는 등꽃이 피어나 5월의 바람에 꽃향기가 실려 온다.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에밀은
한밤중 옆집에서 들려오는 수상쩍은 소리를 듣고 작은 다리를 건너 베르나르탱의 세계로 들어간다.
정확하게 맞추어진 시계들과 쓰레기와 권태와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세계에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블랙코미디로, 괴기담으로 발전한 이 동화는 범죄 소설로 끝을 맺는가.
귀찮은 이웃 베르나르댕을 영원히 타자로 역할 고정시킴으로써
에밀은 스스로와 영원히 대결해야 하는 지옥과의 동침을 받아들이는가.
에밀의 본능적 자아가 노출되는 이 단계에서 화자(에밀)의 어조는 그 톤이 달라진다.
교양 있고 예의 바른 신사가 안으로 숨고, 충동적이고 다혈질적인 인물이 드러나는 가운데
소설은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한쪽이 지킬 박사, 다른 한쪽이 하이드라는 선명한 도식 같은 건
다행히 이 동화 아닌 동화에 적용되지 않는다.
묘사 대신 철학적 물음이 전체를 관통하는,
소설과 희곡의 경계에 놓여 있는 이 작품은
어떤 평자의 지적대로 세귀르 백작 부인의 동화를 이오네스코가 개작한 것처럼
동화적인 동시에 사변적이고 평이한 동시에 심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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