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키는 성실히 근검절약해서 외투 한 벌을 마련하지만 기쁨도 잠시
불량배들에게 외투를 빼앗긴다. 아카키는 빼앗긴 외투를 되찾기 위해 경찰과 고관까지 찾아가지만
폭언을 듣고 문전박대를 당한다. 충격과 추위에 떨다 결국 아카키는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의 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령, 욕망은 죽지 않고 남아 폭언을 쏟아 부었던 고관을 찾아가 외투를 빼앗고 복수한다.
고작 외투 하나를 욕망했을 뿐이고 그로 인해 죽는다는 것은 가혹해 보인다.
복수도 통쾌한 복수가 아니라 죽어서 유령의 모습으로 찾아가 복수한다는 점은 어딘가 찝집하다.
‘작은 인간’에게 보내는 연민이기도 하면서 조롱 같기도 하다.
이것이 고골의 주특기인 ‘웃픈’상황일까. ‘웃음속의 슬픔’ 혹은 ‘웃음 속의 공포.’라는.
'욕망'과 '내면’ 모두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자신의 운명(계급),
혹은 팔자라고 여겨 순응했던 삶이 전근대적이라면 더 많은 것, 높은 것, 좋은 것을 원하는
욕망이 허용되고 긍정되는 세계는 근대적이다.
하지만 모든 욕망은 허용되지 않기에 불행이 싹튼다.
‘욕망과 동시에 자신 안에서 금지 명령이 작용’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자아가 있고 그것을 억누르는 초자아가 있다'.
그 둘이 충돌하면서 괴로움이 발생한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아주 중요하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태도가 있지 않나요?
돈을 긍정하면서도 긍정하지 않는. 그런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태도가 근대적 개인의 모습이예요".
욕망으로 발생하는 괴로움과 불가해한 성격때문에 고골은 모든 것이 고정된
관등제 사회와 중세 질서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서 해결책을 찾았다는 점이 근대로 가는 길을 막았다.
고골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레르몬토프가 페초린의 마음(개인의 내면)을 발명한 것과 달리 고골의 작품에는 내면이 있는 개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마음의 부재로 고골의 작품은 근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작품을 쓰지 못했다. 그것이 고골의 한계라고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고골이 창조한 하급관리 작은인간은 『가난한 사람들』에 투영되고 고골의 사회풍자의식과 인간에 대한 뛰어난 묘사가 유산으로 남았다. 그것이 고골 작품의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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