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정률 '국밥'

clint 2023. 6. 5. 05:58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은 욕쟁이 할머니 떡수니의 희로애락을 커다란 솥에 한데 섞어 펄펄 끓인 뒤 관객에게 내놓는다. 판소리와 힙합, 전라도 사투리로 표현한 구수한 욕지거리가 양념처럼 더해진 국밥을 후후 불며 먹노라면 모진 현대사의 흐름에 떼밀려 거칠게 살아온 우리 주변의 낯익은 '떡수니들'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먹먹해 진다.
막이 오르면 커다란 솥이 자리 잡은 무대 위로 남장을 한 국악인 신영희가 걸쭉한 욕설과 창으로 분위기를 띄우면서 극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면 객석 뒤편에서 국밥집 주인공 떡수니가 '아리아리랑~쓰리 쓰리랑~' 구성진 가락을 부르며 모습을 드러낸다. 질펀한 음담패설과 걸쭉한 육두문자를 창에 실어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극 도입부를 장식하는 두 사람을 보며 객석에서는 한바탕 웃음이 번진다. 이 때 힙합 보이 '긴가민가'가 등장해 두 사람 사이를 휘저으며 숨가쁜 랩을 선사한다. "뭐라고 씨부렁 거리는 지 하나도 모르겄네"라고 불평하면서도 나름대로 힙합을 따라하는 떡수니와 신영희 모습에 웃음 소리는 더 커진다.

 


곧이어 무대가 어두워지며 6.25 전쟁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당한 10.26 사건까지 한국 현대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흑백 영상이 '어제는 그랬었지'라는 힙합 노래와 어우러지며 상영된다.
다시 무대가 환해지면 떡수니가 자신의 인생 유전을 담은 독백을 조근조근 털어놓으며 극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월남 전쟁에 참전한 첫 사랑 삼봉 오빠가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재봉틀, 카시미롱 이불을 장만해 돌아오면 가정을 이뤄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열일곱 처녀 김덕순. 하지만 당시 시골 처녀 대부분이 그러했듯 돈벌이를 위해 서울로 상경한 덕순의 꿈은 몸을 빼앗긴 뒤 식모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며 하루 아침에 산산조각 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순이, 미군 현지처, 다방마담을 전전한 뒤 마음을 다잡고 국밥집을 차린 그는 피땀 흘려 국밥집을 번듯하게 일궈낸다. 순진했던 처녀는 이제 험한 욕을 쓰는 욕쟁이 할머니 떡수니로 변했지만 첫 사랑의 추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마음 속의 응어리를 먹음직스러운 국밥과 해학적인 욕설로 승화시켜 손님들을 즐겁게 한다.

 

<국밥>은, 극작가 김정률이 썼고, 한국에서 탐미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 작가가 스무 살이던 무렵, 연출가 김정옥 선생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을 주선함으로 작단의 활동을 시작한 귀한 인연이 있다.

 

 

국밥집의 떡순이 아주매의 입담을 통하여 국밥만큼 지글거리고 맛난 고금소총과 음담패설과 외설의 손뚜껑을 열어 판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이 아주머니 역시 격변하는 한국사의 뒤 안에서 이를 없이 시대의 한 모습을 살아온 할머니라서, 그녀의 세월 속에는 풍진에 시달린 한국사의 나이테가 새겨 있다. 그지 광대처럼 희희라락 웃어 넘길 수만 없는, 할머니의 고되고 힘들었던 인생 여정은, 어쩌면 고달팠던 한민족의 근대사의 공통적 공감의 체험적 고백이기도 하다.

우리는 펄펄 끓는 국밥 통에서 그 할머니의 요설과 방백을 통하여, 국밥 만큼 오래된 수천 년 우리 소리 장내의 소리의 힘을 빌어 마음으로 느끼는 국밥을 끓어온다노래는 정신이다. 응원이며 한곳이다. 목장을 휘감아 힘차게 찌르고, 감고 풀고 굴리고 찍어내는 판소리는 한국인의 삶의 결정체를 노래에 담아 표상한 마음의 소리였다. 한국의 창(), 일본의 노와 함께 중국 전통의 경국 동양이 소리문화를 대표하는 소리이다. 구수한 국밥 집에서 더욱 구수하고 애처러운 창을 통해서, 판소리의 틈을 없애고 좌충우돌 자유 가변 연극으로 오늘의 현대 연극의 재미를 찾기 위해, 주고 먹고 받고 지는 흥과 한의 쌍곡선의 시이소를 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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