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차범석 '윤씨 일가'

clint 2023. 6. 4. 09:29

 

차범석 1950년대 희곡에는, 여성 인물과 그녀들의 욕망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윤씨 일가>부터 이러한 경향은 비교적 일찍부터 맹아를 드러냈다. <윤씨 일가>의 세 딸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는 고집스러운 성향을 표명한 여성들이다. 첫째 딸 혜숙은 아버지의 결혼강요를 용납하지 않고 가출하는 결단을 내렸고, 이후 자신이 직접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용단을 내린 여성이었다. 둘째 딸 정숙은 집안을 돕기 위하여 경제적 배경을 지닌 남자와 교제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선택한 자유분방한 연애는 세간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당시 현실에서 파격적이었다.지숙은 표면적으로는 얌전하고 안정적인 선택을 하는 여성으로 묘사되었지만, 결혼 문제가 대두되자 기존의 다소곳한 성격을 돌변한 채 자유연애와 배우자 선택 권한을 고수하고자 한다. 특히 지숙이 마음에 둔 상운은 고리대금업자 최봉조의 아들이었는데, 부친 최봉조는 한때 지숙 언니인 혜숙과 혼담이 오가던 남자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지숙의 집안과 상대편 결혼 대상자 최봉조 집안이 다시 만났고, 서로를 인지하고 혼담을 진행했다. 하지만 정숙의 행실과 평판을 눈치챈 최봉조가 파혼을 선언하면서, 끝내 지숙의 바람은 성사되지 못하고 만다. 지숙 역시 자신의 길을 가야할 운명을 이어받는다고 하겠다. 이렇듯 혜숙은 정략결혼의 강요로, 정숙은 재산문제로, 그리고 지숙은 집안 평판으로 인해 자신이 꿈꾸던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고 만다. 결혼을 향한 지숙의 꿈이 매몰되는 장면에서, 그 이전에 지숙이 피력했던 또 하나의 꿈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가 확실해 진다. 상운과 결혼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만 해도, 지숙은 결혼보다는 자기 일을 앞세우는 여인이었다. 지숙이 꿈꾸는 일은 여성 운동이었고, 서울로 진출해서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작품의 내용으로 볼 때, 첫째언니 혜숙의 가출이나 둘째언니 정숙의 희생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이며, 여성의 삶이 가부장권의 피해를 입고 있다는 소신에서 비롯된 꿈으로 보인다. 지숙은 두 언니와 같은 인생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는 여성들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결혼에 집착하게 되고, 그러면서 이 꿈을 잠시 접어 두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성운동에 대한 꿈을 미루어 둔 채, 상운과의 결혼에 전념해야 할 처지로 내몰렸다. 문제는 그 결혼이 무산되면서, 그녀가 세웠던 삶의 목표 역시 불투명해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다시 묻게 된다. 지숙이 결혼 이전에 꿈꾸었던 여성운동은, 지숙의 결혼이 파국을 맞이한 난국에서 종전보다 더 자립적인 여성의 삶을 일구는 데에 필요한 요인으로 부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혜숙과 정숙뿐 아니라 지숙 역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이었다고 해야 한다. 차범석은 이러한 여성의 모습을 전면에 등장시켜, <윤씨 일가>의 중요 서사에 그녀들의 불운한 처지를 보여주고 향후 선택에 대한 암시를 곁들였다. 첫째 혜숙은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는 삶을 선택하고, 둘째 정숙은 무너진 자신의 꿈(이민) 앞에서 큰 소리로 원망하며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아버지를 향해 복수하려 하고결국 파국을 맞는 것으로 끝난다. 마지막 장면은 다소 불분명하다. 정숙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과, 아버지가 정숙을 죽인 것이 그것이다. 어찌 됐던 이 살해는 도덕적으로는 용납되기 어려운 범죄이지만, 가부장권으로 희생된 여성들의 무의식적 각성을 유도한다는 점에서는 충격적 전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지숙은 이러한 두 언니의 선택 옆에서 무너진 자신의 인생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된다. 그녀는 울면서 자신의 앞길에 놓인 순탄하지 않은 운명을 체감하게 된다. 그녀 역시 두 언니처럼 불행한 인생의 경험을 피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무너진 꿈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당면 목표도 함께 물려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품에서 그녀의 이후 삶을 추정할 근거나 목표는 제시되지 않았다.

<윤씨 일가>에 묘사된 딸들의 욕망과 운명은, <불모지>에서 한층 정갈하게 정리된 상태로 다시 나타난다(<불모지> 1950년대 차범석 희곡의 대표작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여성에 대한 묘사와 비판 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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