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진아 '하얀 봄'

clint 2023. 6. 3. 17:38


90년대 초. 거리를 걸으면 ‘학원자주’를 외치는 목소리와 서태지의 ‘난 알아요’가 함께 뒤섞여 흐르던 시대. 가장 친밀하면서도 때로는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두 친구가 있다. 수연과 정운은 연애 이야기를 함께 고민하고 나누기도, 함께 고인돌을 보러가기도, 함께 가두시위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렇게 늘 함께였던 두 사람은 시간이 흘러 각자 다른 삶의 길을 가게 되고, 30년이 지난 후 우연히 거리에서 다시 마주친다. 그때 그들이 나누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보냈던 이들은 무엇을 같이 꿈꾸었고, 무엇이 서로 달랐을까.

 


연극 '하얀 봄'은 90년대 초, 시대에 휩쓸리던 청춘들의 우정과 사랑을 담아낸 작품이다. 90년대 초 대학 과방을 배경으로 시대 폭력 앞에 놓인 그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개인과 집단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통해 어느 시대에나 치열하고 아팠던 젊음이 있었고 그들의 고민과 열정이 지나 지금에 이르렀음을 이야기한다. 어느 청춘이나 절망하지 않는 청춘이 없다고 하지만 90년대 초 청춘의 절망은 그들만의 색깔을 가졌다.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맞으며 눈물 콧물을 흘렸던 시대의 부채감은 개인적인 소망을 억압했고, 시대의 변화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을 때 대중음악의 흐름이 함께 했다. 1991년, 정치적인 암울과 감각적인 격동이 함께했던 시기, 그 변혁을 이끌었던 청춘들은 2023년,  ‘꼰대’라고 불리는 세대 되어 있다. 도덕은 유행처럼 바뀌었고, 변혁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변혁의 대상이 되었다. '하얀 봄'은 이렇듯 격동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청춘의 시절을 다시금 감각하게 한다.

 



지금은 퀴어라는 말이 일반화되었지만 90년대에는 모두 수면 아래에 있었던 젠더였다. 30년 전에 인간 사이의 애정에 대한 사회적 명칭으로는 동성간에는 우정, 이성간에는 연애라는 말 뿐이었다. 이 명칭은 관계에서 영역을 한정시키고 감정적 친밀도와 접촉에 경계선을 만들었다. '하얀 봄'은 퀴어가 드러나지 않았던 때에 이성친구보다 동성친구에게 더 몰두했던 여자친구의 우정을 그린다. 드러나지 않은 거대한 사회적 억압 속에 서로에게 왜 끌리는지 설명할 수조차 없었던 두 여자 친구의 이야기, 그 감정을 섬세하게 좇아간다. 거리에서 투쟁하며 자유, 민주를 부르짖었던 그들이지만 단체, 소속된 집단 사회속에서는 여전히 집단성, 강제력이 따르고 거기에는 민감하게 대항하지 못한 아이러니한 폭력이 있다. 그 단체에는 필연적으로 적응하거나 일탈하는 개인들의 갈등이 일어나고 그 폭력을 함께 경험하고 목격했던 친구들을 갈림길에 서게 함으로써 단체 폭력의 순간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본다. 민주에의 열망이 커지고 젊은 감수성이 솟구치던 격동의 시기에 놓인 청춘들이 시대의 변혁과 억합, 폭력 속에서 아지랑이인가 하고 보니 최루가스 연기였던, 봄의 화사함을 만끽하지 못한 안타까운 청춘이나 여전히 눈부시게 빛났던 하얀 봄의 이야기이다.

 

 

작품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일정하게 배치하지 않는데, 정운과 수연의 현재 시간 사이에 과거 기억을 밀어 넣고 장면을 현재-과거-현재로 연결하며 시간의 기억을 되돌림 하는 방식이다. 장면의 연결은 현재 두 사람의 대화에 있다가도 특정한 대사나 기억으로 정지화면이 재생 버튼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배우들은 뛰고 달리며 시간의 장면으로 되돌리는 식이다. 90년대 들국화 '행진'이 반복적으로 흐르고 깡 소수로 버티면서도 전경이 좋아하는 메탈리카 음악은 사상교육을 받아야 하는 미제 파쇼 음악이 되면서 반미주의 이념을 드러낸 대학가 운동권들의 90년대는 미국문화를 조롱하고 전경은 도망치면서도 이들을 향해 '빨갱이 새끼들'로 부른다. 80년대를 지나 보통사람 시대에도 국가는 반공 프레임으로 대학가를 닭장차로 무장한 채 사복 체포조는 캠퍼스를 누비고 백골단의 폭력과 최루탄의 화염을 막아서면서도 청춘의 사랑은 뜨겁다.

 


작가의 글 - 최진아
소중한 것들이 퇴색하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친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 평생은 아니어도 한 시기를 함께하며 
긴밀하게 지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
그 우연을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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