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신봉승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clint 2015. 11. 9. 20:01

 

 

 

개항초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 함으로 우월한 지휘를 확보하고, 러일 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것에 기초해 우리 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해 많은 토지와 인력을 징발하고, 같은 해 8월에는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강제로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05년11월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매국관리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을 늑결(勒結)하였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형식적인 국명만 가진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07년 이상설 등이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주권수호를 호소하려 하였지만, 일제는 그것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7월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내 정권까지 장악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광무보안법까지 공포하였다.
그 뒤 일제는 1910년5월 식민지화 절차를 단행하였고,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를 정비하였는데, 일제는 이미 1907년 10월부터 한일 경찰을 일원화하여 전국의 경찰 직무를 장악한 상태였다. 여기에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하여 종래의 사법· 경찰권 이외에 일반 경찰권까지 탈취, 8월 16일 비밀리에 이완용에게 합병 조약안을 제시하였으며,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일제는 한국 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발표를 유보하였다.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면암 최익현 선생 삶을 다룬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는 작가 신봉승이 경술국치 100년이 되었던 지난해 쓴 희곡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73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선다. 선생은 곧바로 의병장이 되었으나 조선관군과는 싸울 수 없다 하여 스스로 무장해제했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힌다. 일본군은 선생을 대마도로 강제 압송했고, 선생은 대마도에서 '일본의 것이라면 물 한 방울도 입에 댈 수 없다'는 삶을 실천하다가 결국 순국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말할 때 그와 함께 살았기에 천하동생(天下同生), 그와 함께 죽었다는 뜻으로 천하동사(天下同死)라 이야기했다.

신봉승은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에 대해 "새로운 세기로 일컬어지는 21세기로 들어섰으면서도 아직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역사인식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나라사랑이 무엇인지, 참지식인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성찰해 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쓰게 되었다"고 귀띔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체험한 20세기 1백년은 참으로 뼈아픈 통한의 세월이었다. 20세기로 들어선 지 5년째 되던 을사(1905)년에 나라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겼고, 경술(1910년)년에 일제에 강제 병합되었다"라며 "경술국치 100년, 그 뼈아픈 세월을 뒤돌아보는 시점에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생애를 살피는 것은 역사인식과 삶의 지혜를 동시에 얻는 일과도 같다"고 못 박았다.

 

 

 

 

 

면암 최익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린다. ‘아, 어느 시대인들 난적의 변고가 없겠는가만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을 것인가…의병을 일으키라,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고희도 넘긴 일흔넷의 면암이 쓴 소(疏)는 절절이 추상같다. 면암은 직접 의병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대마도에 감금됐다. 면암은 일체의 음식을 거부했다. “어떻게 적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는가.” 면암은 끝내 적의 땅에서 굶어 죽었다. 익히 알려졌지만, 늘 옷깃을 여미게 하는 면암의 최후이다. 면암이 취했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노선을 두고 당대적 타당성 등의 논의는 있을 수 있겠으나, 변할 수 없는 것은 선생의 전 생애에서 우러나는 순연한 지사적 삶의 형형함이다.
오만으로 변절되던 대원군의 개혁 실정을 질타하고, 소위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항의해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서 상소하고(丙子持斧疏), 을사늑약 오적(五賊)을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는 등 면암의 항거는 실로 처절했으나 망국(亡國)을 막기에는 너무도 가녀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 청년들에게는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우리 선생”(안중근)이었고, 적에게는 “조선군 10만 명은 두렵지 않으나, 오직 최익현 한 사람이 두렵다”(이토 히로부미)는 존재였다. 올해로 선생이 서거한 지 100년이다. 각종 추모 행사들이 열리고,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각별해지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과 원로의 소임이다. 선생만큼 그 본연을 오늘에 되살리는 이도 없다. 몇 해 전 한 방송사의 면암을 다룬 특집극 제목이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였다. 천박한 애국주의가 판치고, 그 ‘주의’를 팔아먹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날뛰는 시대이기에 면암의 삶이 던지는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는 질문이 더욱 뼈아프게 들린다. 특히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선생은 유림의 거벽이기도 하였지만, 민족자존을 품에 안았던 명망 높은 인품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의 위대함을 말할 때, 그의 삶은 최익현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천하동생(天下同生)이며, 그의 죽음은 최익현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천하동사(天下同死)라고 집약한다.

 

 

면암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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