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적>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 1882년 발표되었지만 현재도 <인형의 집>, <유령>과 함께 무대에 자주 오르는 작품이다. 입센은 대개 2년 간격으로 새 작품을 창작하곤 했는데 <민중의 적>은 <유령>이 발표된지 바로 1년 뒤에 발표되었다. 그래서 <민중의 적>이 그간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철저한 조사 없이 쓰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실은 <유령> 발표 후 고국에서의 격렬한 반대에 대한 분노의 표출로 창작된 작품이다. 입센 자신의 말에 따르면, <민중의 적>은 "우리 현대 사회의 다른 측면을 다룬다. 말하자면 <사회의 기둥들>, <인형의 집>, <유령>에 이은 사회문제극임은 틀림없지만,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체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크고 작은 정치적 세력들에 대해 입센이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이 강화되어 창작된 작품인 것이다.
입센은 <민중의 적>의 창작을 위해 두 가지 실제 사건에서 소재를 취했다. 첫째는 1830년대 한 온천장의 의사가 겪은 이야기였다. 이 온천장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그 의사는 그 사실을 공표했고 그 결과 온천장은 그 시즌을 망치고 말았다. 시민들은 분노하여 그의 집에 돌을 던졌고 그 의사 가족은 도시를 떠나야 했다. 이 실제 사건은 스토크만 박사의 가족이 궁극적으로 고향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민중의 적>의 내용을 요약한 것처럼 똑같다. 또 한 사건은 노르웨이의 한 화학자가 겪었던 일이다. 이 화학자는 자신이 속한 회사가 도시 빈민들을 착취하는 것을 격렬히 공격하는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을 입센은 1874년 고국 방문 때 듣게 되었다. 이 화학자는 1881년 죽기 얼마 전 회사의 총회에서 또 한번 격렬한 공격을 하려 했으나 사람들의 반대로 결국 실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입센이 이 총회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을 때가 마침 <유령>의 수용에 대한 그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그러므로 <민중의 적>은 작품을 위해 세심히 준비한 후 평정한 마음에서 창작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이 입센의 사회문제극 중 가장 졸작이라고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입센은 어떤 형태이든 조직된 단체, 즉 정당이나 연합체 등에 대한 혐오감을 늘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런 단체들이 민주주의란 허울을 쓰고 다수에 의해 법칙이 만들어지고 사안들이 결정되며 실행에 옮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센은 다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어떠한 단체에도 평생 가입하지 않았다. 그는 늘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편이었다. 그 소수는 자유주의자들의 중도 정당에서 보이는 정체된 소수가 아니라 아방가르드의 소수를 의미하며 이들이야말로 미래와 가장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입센은 생각했다. 4막에서 열변을 토하는 주인공 스토크만 박사의 말은 그래서 바로 작가의 말로 들린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전 좁은 가슴을 가진 근시안적인 옛시대의 유물과 같은 이 무리에 대해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지닌 오늘의 삶은 이들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요. 저는 우리들 가운데 미래의 새로운 진실에 동참할 몇몇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절대다수는 따라올 수 없는 진보의 전위부대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리를 위해 싸울 니다."
입센은 한 편지에서 "스토크만 박사와 나는 놀라울 정도로 잘 지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생각이 같기 때문"이라고 토로했으니 작가와 그가 창조한 인물의 등치가 어느 정도 가능하겠다. 입센은 또한 언론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입센에게 있어 언론은 그로테스크하게 왜곡된 정치기구에 기생하는 기생충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유 운운하지만 자유의 실체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여론과 압력단체 및 발행 부수의 노예이면서도 끊임없이 자주를 주장하는 것이 언론의 실체임을 입센은 확신했다. 입센의 이런 태도와 생각까지도 고스란히 녹아있는 일종의 정치 코미디가 <민중의 적>이다.
이러한 입센의 생각은 4막에 나오는 군중 집회에서 스토크만 박사가 하는 연설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다수가 옳은 적은 없어요! 절대로요 (…) 다수가 항상 권력을 쥐죠- 유감스럽게도 그러나 그들이 옳은 건 아닙니다. 저, 그리고 저와 같은 몇몇 사람들이 옳습니다. 소수가 항상 옳습니다." 주인공의 다음 연설 내용은 더욱 입센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으며 저항의 작가, 혁명의 작가, 당시로서 아방가르드 작가인 입센을 너무도 잘 드러낸다. “난 혁명가요. 난 다수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거짓에 맞서 혁명을 하겠소. 그럼, 다수가 고수하고 있는 진실이란 무엇일까요? 너무 늙어서 빈사 상태에 빠진 것이오. 진실도 너무 오래되면, 여러분, 거짓과 구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 건강한 진실의 수명은 기껏 17년이나 18년, 잘해봐야 20년입니다. 더 이상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진실은 항상 바짝 말라 있죠. 그런데도 다수는 우선 이런 진실을 떠받들면서 건강한 정신적 영양소라며 사회에 추천합니다. 그러나 이런 영양소에는 진정한 영양가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 다수가 신봉하는 이 진실은 너무 오래 보관해 상했거나 곰팡이가 낀, 소금질한 소시지 같은 겁니다. 그 때문에 사회가 영락하는 도덕적 괴혈병이 오는 것입니다."
스토크만 박사는 그의 이름에 들어있는 'stock'가 '바보 멍청이'라는 내연의 의미를 가지고 있듯 너무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라서 때론 바보나 멍청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형인 시장 페테르는 정치적 현실을 동생보다 더 정확하게 읽어내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러니 그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잘 조종할 수 있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그가 조종하는 현실 세계가 '타락한', 혹은 '부패한' 세계라는 것이다. 입센은 이 점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극의 마지막에 스토크만 박사로 하여금 커다란 깨우침을 전하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홀로 서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이 깨우침은 사회가 점점 복잡해져가는 현실에선 이루어지기 힘든 명제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작가로서는 이상주의자인 입센은 로버트 브러스타인(Robert Brustein)의 지적처럼 이 작품에서 작가로서의 "진솔한 반항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입센은 이 작품에서 "도시 생활의 불결과 질병, 옹골찬 다수의 독재, 질 낮은 대의 민주주의 보수주의자들의 탐욕, 자유 언론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적>은 세계 희곡 문학사적으로 볼 때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1835) 이후 정치적 논란을 소재로 한 최초의 드라마이고 가장 쇼(G. B. Shaw)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인간과 사회의 진화에 대한 믿음으로 입센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사회의 어리석은 면들과 구습을 까발린 인물이 쇼이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은 것이다. 또 한 가지, <민중의 적>의 미덕은 그때까지의 입센 작품들이 대개 무겁고 어두웠던 반면 위트와 가벼움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란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바보 멍청이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끝내 유머를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입센은 <민중의 적>도 <유령>처럼 많은 공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이 작품은 1883년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도시에서 잇달아 공연되었다. 세계 초연은 같은 해 크리스티아니아 극장에서 있었고, 이후 베르겐, 고텐부르그, 스톡홀름, 그리고 코펜하겐의 왕립극장에서 공연 되었으며 대개 우호적으로 수용되었다. 독일 초연의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으나 1893년 파리 공연은 뤼네포에 의해 공연되었다. 영어 번역자 고쓰는 스토크만 박사를 입센이 창조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걸출하다고 평가했다. 영국 초연은 1893년 헤이마켓 시어터에서 이루어졌다.
작품 속에서 비판되는 사안들이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민중의 적>은 시공을 초월하는 시의성을 지닌다. 어느 시대에서든, 어느 사회에서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과 갈등이 상존하는 가운데 이와 비슷한 일이 현재에도 다반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이 매우 피부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미 언급한 대로 1893년 파리의 테아트르 드 뢰브르에서 프랑스 초연이 이루어졌을 때 파리 시내에서 무정부주의 시위가 있었는데 군중 집회에서 스토크만 박사가 한 연설 내용이 젊은 학생들과 시인들에게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또 뒤레퓌스 사건 때에는 에밀 졸라를 스토크만 박사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민중의 적>은 에스파냐에서 공연된 입센의 첫 작품으로 1893년 바르셀로나 소재 테아트로 데 노베타츠(Theatre de Novetats)에서의 공연은 정부와 산업의 기존체제에 반대하는 조직체를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레퍼토리에 오른 것이었다. 러시아 초연이었던 1905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민중의 적>에 서 스토크만 박사 역을 맡았던 스타니슬랍스키는 공연 후 혁명적 젊은이들 이 무대 위로 올라와 자신을 포옹했던 순간을 그의 『나의 삶과 예술』에서 상기하고 있다. <민중의 적>은 이때 러시아의 혁명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민중의 적>의 한국 초연은 1956년 신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 언급할 만한 공연은 1998년 서울시립극단의 공연이었다. 연출자 김석만은 <민중의 적>이 "소위 좋은 드라마 구성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입센의 원작이 아니라 아서 밀러의 각색본을 사용했다. 아서 밀러는 오늘 날 입센이 존경스러운 작가인데도 잊혀져 가고 있는 현상이 연극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민중의 적>을 각색했다고 밝혔다. 그의 각색본은 원칙적으로 원작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었으나 5막 구성에서 3막 구성으로 바뀌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홀로 서 있는 사람"이라는 입센의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강한 사람들은 고독을 배워야 한다.”는 것으로 바꿨다. 입센의 깊이 있는 메시지가 약간은 상투적인 의미로 바뀐 것이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로스메르스홀름' (1) | 2022.11.26 |
---|---|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들오리' (2) | 2022.11.26 |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유령' (1) | 2022.11.26 |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인형의 집' (0) | 2022.11.26 |
다카도 가나메 '하얀 무덤' (1) | 2022.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