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들오리'

clint 2022. 11. 26. 06:19

 

 

자의적 망명의 첫 정착지였던 로마에 세 번째로 약 6년간 머물면서 입센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이 <들오리>이다. 이 작품의 집필 중 입센은 자신의 작품들을 계속 출판하고 있는 컬덴달 보고한델 출판사의 사장인 헤겔에게 "이 작품은 어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공적인 사건들을 다루지 않소. 완벽하게 가족생활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작품" 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 입센은 그동안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옛 시대부터의 문제들을 비판하던 것에서 벗어나 <들오리>와 함께 소재와 주제 면에서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선다. 입센 자신도 <들오리>가 자신의 창작과정에서 하나의 의미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이라 믿었으며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했다. 여기서의 새로운 길이란 자연주의의 관철을 의미한다. 마침 당시 노르웨이의 문학계와 연극계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입센의 전작을 보면 극작에서 여러 '이름'을 선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들오리>는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개인들의 내적 움직임에 초점을 둔 후기작들을 선취하며, 상징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다.

입센은 '사회문제극'으로 묶일 수 있는 일련의 작품들을 썼다. 이런 작품 들에서 입센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구습의 영향으로 개인들이 '삶의 위선'에 싸여 살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비극을 맞이하는 상황을 그렸다. 이제 작가의 시선은 사회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범위에서 개인들이 어떻게 '삶의 위선'에 싸여 사는지, 그 개인들에게서 그 위선을 벗겨내어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들오리>에서 질문하고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들오리>는 독일어로 존재(Sein)와 외양(Schein)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들오리>에서 가장 허위에 찬 삶을 살고 있는 얄마르 에크달의 직업을 작가는 사진사로 설정했다. 매우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사진이란 어느 한순간만을 포착한다. 헌데 사진술이 많이 발달하지 못했던 입센의 당대에는 사진에 수정작업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작업을 거쳐 보다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얄마르의 직업은 그가 삶의 위선에 싸여 현실 직시를 도외시하게 하는 매우 적절한 상징인 것이다. 젊어서는 많은 친구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파산한 아버지를 돌보아야 하는데다 가족이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에는 벌이가 시원치 않은 사진사 얄마르는 아버지인 늙은 에크달이 과거에 싸여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이다. 단지 가장으로 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비즈니스-파트너였던 베를레의 가장된 선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단선적이기 때문이다. 아빠를 너무나도 사랑하며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아이 어른' 헤드빅과의 약속을 수시로 잊어버리는 그의 면모는 관객/독자로 하여금 분노까지 느끼게 한다. 더군다나 아빠에 대한 사랑을 확인시키기 위해 자기 것이라고 너무나 아끼던 들오리를 쏘아 죽이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자살하게 되는 헤드빅에 대한 그의 감상성을 의사인 렐링그는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 렐링그는 극의 마지막쯤에 헤드빅의 무덤에 첫 잔디가 시들 때 얄마르가 "그 아이는 너무 일찍 제 애비의 가슴을 찢어놓았다"고 하며 자기 연민에 점점 더 빠져드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베를레의 아들이자 어린 시절 얄마르를 자신의 영웅으로 삼았던 그레게르스는 오래도록 아버지의 제철 공장에 근무하다 고향에 돌아와 그런 얄마르를 보고 그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을 필생의 미션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레게르스는 얄마르의 아내 기나가 자신의 집에 집사로 있었을 때 자신의 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헤드빅을 낳았으며 이 사실을 모르는 얄마르와 그녀가 결혼하도록 책략을 썼다고 자신의 아버지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레게르스는 모든 부부는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제철공장에 있을 때도 노동자들의 집을 돌며 '이상적인 것의 요구'라는 미명하에 비슷한 행위를 해온 인물이다. '이상적인 요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면서 얄마르의 결혼생활에 메스를 들이대며 진실을 밝히겠다는 그레게르스에게 의사 렐링그는 "평범한 사람에게서 삶의 위선을 뺏어버리면 그건 그에게서 행복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사로서 렐링그는 얄마르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그의 삶의 위선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임도 분명히 한다. '삶이란

이상적 요구를 들먹이며 돌아다니는 그런 빌어먹을 인간들이 불쌍한 영혼들 을 가만히 놔둔다면 살 만할"(571) 것이라는 렐링그의 말은 입센이 이 작품 을 통해 말하고자 한 메시지로 보인다. 앞의 사회문제극들에서는 삶의 위선 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인물들에게 비극이 일어난 것을 보여줬다면 입센은 들오리>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삶의 위선을 끝까지 밝혀내는 것이 얼 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천척하고 있다. 즉 평범한 인간들에게 있어서 '삶의 위선'은 어쩌면 '삶의 이상'과 동의어일 수도 있음을 말한 것이다.

 

 

<들오리>1884118,000부가 출판되었다. 출판과 동시 스칸디나비아에서 많은 독자를 얻자 사흘 후 2,000부를 더 찍었다. 세계 초연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입센이 연극 실제를 익혔던 베르겐의 노르웨이 극장에서 있었고 이어 크리스티아니아 극장 무대에 올라 22회 공연되었다. 스웨덴 어 번역본으로 헬싱키의 스웨덴 극장에서, 이내 스톡홀름의 왕립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이어 덴마크 왕립극장 무대에도 올랐다. 이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무대화는 18851월에 린베리(August Lindberg)가 얄마르 역을 맡고 연출도 한 스웨덴 극장에서의 공연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마치 생활의 공간인 듯 '생활한' 연기양식과 현실의 방과 똑같은 무대 위의 '' 때문이었다. 전자의 연기양식은 자연주의의 전범적 연기양식으로서 나중에 앙드레 앙트완이 테아트르 리브르에서 삶의 한 조각을 보일 때의 연기양식을 선취한 것이다. 현실과 똑같은 무대는 195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키친 싱크 드라마의 효시가 된다.

영국 초연은 1894년 로열티 시어터에서 있었는데 관객은 가벼운 농짓거리로 받아들였는데도 성공이었다. 배우들은 입센 드라마의 캐릭터들에 매료되었고 극작가들은 자극을 받은 것이 분명했지만 관객들은 무대를 진지한 혁명적 사상 등을 설파하는 연단으로 보는 데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들오리>의 성공으로 그동안 괴짜들로 평가되던 입센과 입센주의자들은 더 이상 괴짜들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영국의 입센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에드먼드 고쓰(Edmund Gosse)<들오리>에 대해 "기이하고 멜랑콜리하며 염세적인 드라마"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기 빛도 들어있지 않은 작품, 신뢰나 호감을 주는 인물이 한 사람도 없는 작품이라고 평가하며 입센의 작품 중 독자가 이해하기에 가장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영국과는 달리 대개의 경우 입센 작품에 우호적이거나 열광했던 독일어권에서 <들오리>는 스칸디나비아에서의 무대화 이후 3-4년이 지나 베를린, 비스바덴, 드레스덴과 비인 등지의 극장에서 공연되었으나 평은 좋지 않았다. 입센적인 분석극적 테크닉이 프랑스의 '잘 짜인 극'(piecebien-fit)의 아류로 간주되었고, 등장인물 중 누구도 관객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다. 또한 '사회의 기둥들'이 과연 누구인지 폭로한 작가가 이번에는 삶의 위선을 옹호하는 모순을 보였다고 관객들이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92년 로마에서의 공연은 관객들의 야유로 제대로 공연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스칸디나비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공연된 곳이 어디였든, 당시의 관객과 평자들은 주제의식, 음영 짙은 인물들, 극작 테크닉에서 시대를 앞서갔던 입센의 진면목을 보기에 아직 성숙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