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부터 85년까지 세 번째로 체류하게 된 로마에서 입센은 모두 세 작품을 창작했는데 그 첫 작품이 1881년에 발표된 <유령>이다. <유령>은 입센의 외아들 시구르가 외국에 머물렀기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법학을 공부하려면 예비고사를 치러야 한다는 노르웨이 교육부의 대응에 대해 "속 시커먼 신학자 떼거리에게 딱 알맞은 문학적 기념비"를 세우겠다는 생각에서 쓰인 것이다. 본 옮긴이도 입센 평전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 에서 <유령>을 '노르웨이 비판극' 중 한 편으로 분류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노르웨이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편협한 지방성, 종교의 인습에 얽매어 개인의 자유로움을 억압하는 고국 노르웨이의 상황을 입센이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입센의 주제를 일반화시킨다면 꼭 노르웨이 비판극으로만 읽히지는 않는 것도 분명하다.
<유령>의 주제는 한 마디로 '옛것의 타파'이다. 노르웨이 원제를 보면 유령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 즉 '유령들'이다. 많은 경우 <유령>의 무대화에서 유전으로 매독을 물려받아 고통당하고 있는 오스발이 실제로는 이복누이인 레기네를 원하자 알빙 대위의 '유령'이 나타났다고 해석함으로써 '가정극'으로만 보는 단순한 <유령>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옛것들의 은유인 '유령들'이다. 그래서 영어 번역 제목도 <Ghosts>이다. 알빙 부인이 이 점을 확인해준다: "우리 모두가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데르스 목사님, 우리를 괴롭히는 건 비단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것 만이 아닙니다. 그건 온갖 낡은 이론과 낡은 신념 같은 그런 것들이죠. 그것들은 실제 살아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우리 내부에 살고 있어서 없애버릴 수가 없어요."
'가정극'이라고 했지만 입센은 이 작품에서도 국가나 민족과 같은 대우주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유형, 무형의 억압을 받는 개인들이라는 소우주를 향해 있었다. 그 개인들이 해방되어 자유롭게 사는 것이 작가인 입센의 최대 관심사였고 자신의 작품들로 그런 인식을 돕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입센의 대표작이자 사회문제극으로 평가되는 <인형의 집>은 오늘날까지도 자주 무대화되고 있지만 발표 당시에는 유럽 여러 나라와 여러 도시에 충격을 주었고 비난이 쏟아졌다. 그 비난에 반격하기 위해 쓰인 작품이 <유령>이라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노라가 자식들과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가지 않고 머물렀을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를 제시한 작품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인습적인 결혼제도의 폐해에 대한 논증이자 예시가 <유령>이다. 입센의 생각으로는 <인형의 집> 다음에 <유령>이, 노라 다음에 헬레네(알빙 부인)가 무조건 나와야 했다. 그만큼 나이 오십이 넘고 문명을 얻은 작가로서 입센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사회의 모든 측면에 변화가 와야 할 때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에 소명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입센은 <유령>이 미래에 속한다고 말했다.
인간을 유전과 환경의 산물로 보았던 자연주의 연극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유령>은 알빙 부인의 집 거실에서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을 다룬 분석이다. 플롯 면에서만 본다면, 운명 지어진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극적 행동을 지닌 고대 그리스 비극과 유사하다. 알빙 부인은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진실 된 조건이 무엇인지,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인간인지 탐색하고 이 탐색의 과정에서 20여 년간의 과거가 하나씩 하나씩 그 실체를 드러낸다. 매우 고대적인 플롯을 근간으로 <유령>은 당시로선 공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웠던 근친상간, 유전, 자유연애, 성병, 여성의 문제 등 매우 현대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다. 또한 전(前)의 작품들에서 보기 힘들었던 효과적이고 아이러니컬한 은유와 상징, 대사의 응축성 등이 돋보이며 이러한 점들은 입센의 후기작에서 더욱 발전된다. 특히 대사의 응축성은 배우들의 연기술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대사의 기표와 기의의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배우들은 연기할 때 기표인 대사를 하면서 기의인 행동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유령>의 초기 수용은 그야말로 "<유령>에 반대하는 전쟁"이었다. 1881년 12월 1만부가 초판으로 출판되었지만, 스칸디나비아 언론의 격렬한 공격으로 팔리지 않는 책 대부분은 회수되었다. 2판은 1894년에, 3판은 1903년에야 출판되었고 세계 초연은 1882년 3월 미국 시카고의 오로라 터너 홀(Aurora Tumer Hall)에서 한 아마추어 극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덴마크 출신의 배우들이 노르웨이어로 공연했으며 스칸디나비아 이민자들이 많았던 미니애폴리스를 비롯한 중서부 도시들을 순회했다. 이 공연이 미국에서 공연된 최초의 입센 드라마였다. 스칸디나비아 수도들의 극장들에서는 처음엔 <유령>을 레퍼토리로 삼는 걸 두려워했다. 그러나 1883년 스웨덴의 헬싱보르에서의 공연, 스톡홀름에서의 공연이나 코펜하겐의 폴케테아터에서의 공연에 특별한 스캔들은 없있다. 특히 폴케테아터에서의 공연에 관객들은 매우 감동받았고 입장료가 두 배 비쌌는데도 극장은 항상 만석이었다. 그러자 스웨덴 왕립극장에서도 같은 해에 공연되었고 덴마크 왕립극장의 레퍼토리로는 1903년에 들어갔다. 영국에서는 <유령>의 공공극장에서의 공연은 1914년까지 금지되었고, 그간 입센 작품들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던 독일에서도 검열 때문에 1886년부터 1889년까지 그저 비공개 공연이 몇 번 이루어졌을 뿐이다. 예를 들어 1887년 비인 부르크데이터의 배우였던 미터부르거(Piedrich Mitermurer)가 연출과 주역을 함께 맡아 <유림, 혹은 아버지의 죄>(Phantoms, of The Sins of the Father)라는 제목으로 만든 영어판 <유령>이 미국 중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순회 공연될 때 포스터에 '독일에서는 금지'라고 소개되었다.
이렇게 <유령>은 발표 직후인 1880년대에는 많은 적대감과 논란에 부딪쳤고 무대화도 드물게 이루어졌지만 10년이 지난 1890년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세 수도, 즉 파리, 런던, 뉴욕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또한 1889년에는 위에 언급한 연출가 린베리에 의해 크리스티아니아의 노동자연맹을 위해 공연되었을 때 노동자들은 종교적 편협함에 의해 고착된 구습을 깨뜨리리는 이 작품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그로 인해 <유령>은 젊은 진보주의자들의 슬로건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유령>은 1934년 서항석 번역에 홍해성 연출로 경성여자기독청년회가 공연한 것을 필두로 <인형의 집>보다 더 많이 무대화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대학의 연극부에서 자주 무대화했는데 '사회악의 타파'가 당시 대학생들이 내건 모토였다.
위에 언급된 스웨덴의 헬싱보르 프로덕션의 연출자는 린베리(Aipet Lindhery) 있다. 입센은 그에게 작품의 효과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실생활에서처럼 앉아서 사건들을 듣고 본다고 느끼게끔 하는 데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즉 입센은 작가로서 <유령>이 자연(사실주의 연극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유령>은 서양연극사의 자유(혹은 독립) 극장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제일 먼저 오픈된 앙드레 앙트완의 테아트르 리보르는 1890년 5월 30일 <유령>을 공연하였다. 이는 프랑스에서 공연된 입센의 첫 작품이었고 파리의 관객들도 혼란스러워 했다. 파리의 관객은 감시적이고 회상적인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극작 기법에 익숙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살아야 하는 배우‘들이 마지 현실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관객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했기 때문에 관객이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다.
앙트완이 테아트르 리브르를 창단한 것은 18557년으로 당시 공연장을 갖지 못하고 있던 젊고 새로운 극작가들의 작품을 무대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헌데 1839년 베를린에서 오토 보람이 이끄는 프라이에 뷔네의 오프닝 작품이 <유령>이었고, 앙트완 자신도 1993년 알코올 중독, 무지, 미신의 죄 생활이 되어 사는 러시아 농민들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히 그린 톨스토이의 <어둠의 힘>으로 명성을 얻자 <유령>에 도전한 것이다.
무대 위에 현실과 똑같은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앙트완이 초기 수용에서 많은 논란을 낳은 작품임에도 <유령>에 이끌린 이유는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 조명을 통해 빛의 은유적 효과를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스발이 죽어가면서 갈구한 '햇빛'은 <유령>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유령>의 하루는 해가 나지 않아 햇빛이 없고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친 뒤에도 안개가 깔려 있어 여전히 햇빛은 볼 수 없다. <유령>에서 빛나는 빛은 기껏 램프의 빛이다. 그 빛은 인공적인 것이고 주위를 밝히긴 해도 완전히 환하게 밝힐 수 없는 가짜 빛인 것이다. 또한 그 빛은 자연의 햇빛을 따라갈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어슴푸레함 속에 가둔다. 아들에게 진실을 은폐하는, 또한 그것 때문에 파멸하는 알빙 부인은 바로 그 빛 속에 갇혀 있는 인물인 것이다. <유령>에서의 햇빛은 이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을 은유한다. 앙트완은 <유령>에서 바로 이런 빛의 은유적 효과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령>은 20세기 초까지 앙트완과 같은 자연주의 연출가들에 의해 무대화되었다. 오토 브람(1887), 스타니슬랍스키(1905), 덴마크의 연출가 닐센(kkanres Niedene) 등이 그들이었다. 심지어 1903년 코펜하겐 왕립극장의 닐센 연출 버전은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고 1942년까지 레퍼토리에 들어있었다. 자연주의적 기법과는 다른 연출은 당시 독일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막스 라인하르트로부터 시작되었다. 라인하르트는 베를린의 실러 테아터 무대에 오른 브람의 <유령>이 분노와 야유도 있었지만 대성공이었고, 이로 인해 프라이에 뷔네의 회원 수가 350명에서 900명으로 급상승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령>을 브람과는 다르게 보았다. 라인하르트는 <유령>에서 극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유령들의 존재 속에 보이는 삶의 비밀과 절망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1906년 도이체스 테아터 캄머슈필레의 오프닝 작품으로 <유령>을 선택했다. 이는 위험과 도전을 의미했지만 라인하르트는 "관객과의 친밀성이 생명인 캄머슈필레에서 다섯 명의 등장인물들이 움직이는 이 작품이 마치 '오중주의 실내악'과 같은 분위기를 낼 것임"을 확신했다.
라인하르트는 이 작품의 침울하고 음영 짙은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낼 사람은 노르웨이의 '절규'화가 뭉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에 초청된 뭉크는 라인하르트의 주문에 따라 <유령>의 무겁고 병적인 분위기를 '색의 심리학'으로 드러내는 무대를 디자인했다. 뭉크의 매우 단순한 방은 감옥을 상징하는 듯했고, 그 안에서 인물들이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방엔 현실적인 오브제들인 테이블과 의자들, 양탄자 위의 소파와 그 옆에 놓인 커피 테이블, 난로, 괘종시계, 벽에 걸린 그림들, 화분 등이 놓여있었음에도 그 이면에 의미를 숨긴 듯한, 증류(蒸溜)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갈색, 검은 색, 회색, 보라색 등 어두운 색감 속에 육중하게 놓여있는 검고 큰 소파는 ’유령‘을 지배하는 억압과 기쁨 없는 삶의 분위기를 잘 드러냈다. 그런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 라인 하르트의 연출 콘셉트는 운명 비극, 즉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덫에 걸려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보여주자는 데에 있었다. 인물들 간의 미세한 상호관계와 드라마 내적인 비극적 리듬에 중점을 둔 이미지를 창조해낸 라인하르트의 상징주의적 미장센은 관객에게 풍부하고 심오한 경험을 제공 했다. 브람이 사실주의적 디테일에 치중하여 '삶의 진실'과 그에 수반되는 환경을 창조하고자 했다면 라인하르트는 '극적 비전' 을 창조하고자 했다. 이로서 라인하르트는 <유령>을 자연주의 연출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전통을 시작했고 입센의 후기작들에서 강하게 보이는 상징주의적 요소들을 일찌감 치간파한 연출가가 되었다.
라인하르트가 <유령>을 무대화했을 때쯤 독일에서 생존하는 독일작가 중에서 입센보다 더 많이 읽히고, 진정으로 논란이 된 작가가 없을 정도였다. 입센은 독일어권 극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영향권에 들어있던 극작가들로는 리하르트 포스(Richard Vofl), 헤르만 바아(Hermann Bahrt), 카알 추크마이어(Carl Zuckermayer),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등이 있다. 특히 독일에서 자연주의 드라마를 관철하고 191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우프트만은 <유령>을 관극한 후 본격적으로 극작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게 입센은 하나의 가치였으며 입센이 가졌던 의미는 약 50년 후 브레히트가 독일 연극에서 갖는 의미와 비견된다고 크리스토퍼 인네스(Innes)는 『현대 독일 드라마』Modern German Drama(1979)에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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