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인형의 집'

clint 2022. 11. 26. 01:00

 

 

입센이란 이름과 늘 함께하는 작품 <인형의 집>1879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해안도시 아말피에서 완성되었다. 입센 가족은 1878년 다시 로마로 거주지를 옮겼으나 아말피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입센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중병에 걸린 남편 토르발을 살리고자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여 비용을 마련해 이탈리아 남부로 가는 내용은 실은 그녀가 자신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는 단초이다. 입센이 자신의 경험을 노라의 그것으로 만든 소재인 것이다.

입센은 제2차 로마 체류를 시작하며 곧 '현대의 비극'을 쓰고자 메모를 시작했다. 그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들어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자신일 수가 없다.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법과 여성적인 행위를 남성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검찰관과 재판관이 있는, 완벽한 남성사회이기 때문이다.“

입센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지만. 이 문장들을 보아도 <인형의 집>은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토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입센의 당대에 노르웨이에서는 이미 페미니즘을 운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고,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 이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이미 등장한다. 자신을 인형처럼 취급하며 현실 생활에서 격리시키면서 가정사의 중요한 일에 함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반발하는 <청년동맹>의 셀마 아메리카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사회의 기둥들>의 미혼녀 로나 헤셀, 역시 같은 작품에서 어렵게 양녀로 자라왔지만,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의 결혼 의사를 확고하게 밝히면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디나 도르프 등의 기초 위에 <인형의 집>의 노라가 탄생된 것이다.

그러나 <인형의 집>은 외동아들밖에 없었던 입센 부부에게 딸과 같은 존재였던 여류작가 라우라 킬러(Launm Petersen Kieder)가 겪었던 일에서 그 내용이 취해진 것이다. 라우라에게 일어났던 일은 현대의 비극을 쓰려 하던 입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라우라가 겪었던 일은 노라에게 일어나는 일과 똑같고, 심지어는 남편들의 가치관과 아내에 대한 태도까지도 똑같다. 다른 점이라면 라우라는 여류작가이고 노라는 가정주부라는 점이다. 마지막도 다른데, 라우라는 다시 남편과 아이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노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간 것이다. 이렇게 다른 마지막을 위해 입센은 작가였던 라우라가 자신을 받아달라고 남편에게 애절한 반면, 가정주부였던 노라를 당시로서는 아마 오늘날에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당찬' 여성으로 바꾸었고, 여기에 새로운 인물군을 창조해 넣으면서 서구의 분석적 희곡의 원조라 평가되는 <오이디푸스왕>의 극작술을 차용했다. 단 이틀 동안에 과거의 일들이 하나씩하나씩 그 정체를 드러내는 이 기법을 입센은 특히 <인형의 집>을 시작으로 대가적 경지까지 발전시킨다. 그래서 이런 극작술은 '입센적 극작술'이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입센의 펜으로서 2017<인형의 집 Part 2>를 쓴 루카스 네이스(Lucas Hnath)도 입센을 "플롯 구축의 장인"이라고 평가하며 작품을 쓰는 동안 입센과 교감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이는 <인형의 집>이 쓰인지 15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 드라마가 여전히 시의성이 있으며 입센이란 작가를 언제라도 현재로 소환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인형의 집>은 초판으로 8,000부가 출판되었다. 그때까지 발표된 입센의 작품 중 최다 출판 부수고 한 달 만에 매진되었다. 한 달 후 2판은 3,000부가. 두 달 후 3판은 2,500부가 발행되었다. 번역본 역시 1880년대에만 독일, 핀란드, 영국, 폴란드, 러시아, 이탈리아 등에서 출판되었다. 극작가로서 문명을 얻으면서 입센의 수입은 공연권보다는 주로 책 판매에서 들어오는 것이었는데 <인형의 집>이 발표된 후 1880년대 말에는 공연권의 5/6<인형의 집>에서 들어오는 수입이었다. 당시 이 작품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했고 세계의 여러 무대에서 상연됐는지 알 수 있다.

초판 출판 후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인형의 집>은 스칸디나비아의 모든 수도에서 공연되었다. 세계 초연은 187912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있었다. 비평계에선 논란이 일었고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은 첫 시즌에만 레퍼토리에 21회 들어있었다. 매 공연마다 관객의 관심은 컸고 무엇보다 노라의 딜레마에 대한 토론이 뜨거웠다. 1880년 스톡홀름의 왕립극장에서 공연이 되었을 때는 모든 공적 모임에서 <인형의 집>이 화제가 되지 않기를 희망할 정도였다. 노라가 집을 나가며 문을 쾅 닫는 소리는 공연되는 곳에서마다 관객에게 폭발적으로 들렸고 관객은 충격 정도가 아니라 심적으로 '동요' 되었다. 논란과 토론의 핵심은 노라가 '한 개인'이 되기 위해, 자식들보다는 자기 '자신을 교육하기 위해'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한 찬반에 있었다. 특히 자식을 버린, 모성의 부정은 노라 역을 맡은 여배우가 극의 마지막을 연기할 수 없다고 버티는 사례를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형의 집>1880년대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공연되었고, 1890년대에는 전 유럽 극장들의 레퍼토리에 들어있어 입센은 세계적 작가로 부상했다. 이후 여러 언어권에서 속편들까지 잇따랐다.

영어권 초연은 1882년 미국 밀워키에서 있었다. 입센 희곡이 북미에서 처음 공연된 것이었지만 당대의 취향에 영합하기 위해 번안된 멜로물로 제목은 <The Child Wife>였다. 1886년엔 런던에서도 원작을 많이 삭제한 번안물로 <Breaking the Butterfly>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는데 두 경우 모두 노라는 집을 나가지 않는 것으로 극의 마지막이 처리되었다.

영국에서 <인형의 집>이란 원제로 원전에 충실한 첫 공연은 1889년 노블티(Novelty) 시어터에서 있었다. 신문에 실린 리뷰들은 거의가 비 우호적이었다. 병적이고 도덕적으로 해로워서 영국 대중의 사랑을 받기 힘들다는 것이 리뷰의 전반적 논조였다. 이런 리뷰들에 대해 입센 드라마 번역자인 윌리엄 아처는 입센의 다른 작품들은 대개가 대중이 철저하게 이해하기도 전에 시대에 뒤떨어지겠지만 <인형의 집>"생각하는 관객에게 호소하는 여성해방을 위한 분명한 항변"이라고 반박했다. 결론적으로 아처는 어떤 작품도 <인형의 집>의 성공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긴 생명력을 가지게 될 <인형의 집>의 미래를 예언한 평가였다.

 

 

<인형의 집>의 무대화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어떤 실험이나 새로 읽기가 시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향은 특히 스칸디나비아에서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세계 초연 무대였던 코펜하겐 왕립극장의 <인형의 집>28년간 레퍼토리에 들어있었고, 1955년 리바이벌되었을 때에도 초연 때의 미장센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선 다양한 연출 콘셉트가 시도되었다. 그런 첫 시도는 1906년 메이에르홀드에 의해, 러시아 10월 혁명 이전 중요한 연극개혁가였던 코미싸르예브스카야(Vera Kommisaurjevskaya)가 오픈한 그녀의 극장에서 행해졌다. 메이에르홀드는 1905'새로운 연극'을 하겠다며 스승인 스타니슬랍스키의 곁을 떠났고, 당시 그가 이해한 새로운 연극은 상징주의 연극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연출한 <인형의 집>이 근본적으로 상징주의적이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가 연출한 <인형의 집>에서 무대는 기본적인 것으로 축소되어 양식화되었다. 한쪽 코너에 낡아빠진 피아노가 놓인 비좁고 옹색한 복도, 역시 낡아빠진 다리 셋의 테이블과 별 특징 없는 의자 두 개, 아무렇게나 매달린 창문에 무대 높이 가득 늘어뜨려진 크렌베리 색깔의 커튼이 달려있는 것이 '인형의 집'의 모습이었다. 메이에르홀드는 그간의 연출가들이 이 작품을 너무 현실과 똑같이 만들기 위해 부차적이고 삽입적인 장면들에 강조점을 줌으로써 관객이 작품의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주된 모티프가 흐려졌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메이에르홀드의 관심이 가장 많이 간 지점은 드라마의 내적 리듬과 정신이었다. 물론 노라가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는 법과 제도, 여성의 권리 등의 사회적 문제나 노라의 심리적 측면을 그가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암시적인 이미지들로 작품의 리듬과 정신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이 메이에르홀드의 상징주의적 연출의 콘셉트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메이예 르홀드는 관객을 작가, 연출자, 배우들 다음으로 제4의 창조자로 간주했다. 그는 <인형의 집> 역시 서브텍스트를 암시만 함으로써 관객이 상상력을 더해 관극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메이에르홀드의 이 연출은 <인형의 집>19세기로부터 20세기의 작품으로, 즉 스타 배우들의 시대로부터 연극사에 본격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연출가라는 인물에 의해 주도되는 예술품으로 바꾸어놓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후 1920, 30년대부터 <인형의 집>은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을 벗고 본격적으로 현대 의상을 입게 되며, 극의 마지막에 노라가 과연 집을 나가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겨진다.

독일의 연출가 페터 차덱(Peter Zadek)1967년 브레멘의 캄머슈필레(Bremer Kammerspiele)에서 브레히트적 양식의 실험적 <인형의 집>을 연출했다. 차덱 역시 간결하고, 선택적이고, 암시적인 미장센을 채택했다. 무대 세트는 양옆에 도어 두 개, 뒤 배경에 베란다 쪽으로 난 창문, 무대 중앙에 대각선으로 놓인 낡은 소파가 전부였다. 이는 이미 중산층 가정의 아늑한 거실이 아니었다. 차덱의 연출에서는 여성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를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사건들은 상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상호 만남에 의해 진전되었다. 차덱 연출의 핵심은 노라의 변형이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사회는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 맞춰진 그야말로 브레히트 적인 것이었다. 이런 콘센트를 위해 차덱은 무대의 사건은 그대로 두었지만 일원의 텍스트를 서사적으로 재배열했다. 이 과정에서 나이브한 심리적 측면이나 진부한 언어의 교환, 장식적이고 부수적인 부분은 과감하게 삭제되었다. 그렇게 마련된 장면들을 차덱은 서로 구별되며 분명히 윤곽이 그려지도록 발전으로 강조하여 장면들이 불연속을 드러내고 몽타주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배우들까지도 심리적 측면이 제거된 외관을 제시하는 연기를 한 연출에서 차텍은 브레히트가 원했던 때로 관객이 거리를 두고 노라의 '인식'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길 원했다.

 

 

연극무대를 위한 드라마의 경우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인형의 집은 1975년 파스빈더에 의해 비디오 버전으로 만들어져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이 라디오 버전은 입센의 시대가 완전히 가고 몰() 시대 즉 현대의 물질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파스빈더는 노라를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투사로 보지 않았고 그들 부르주아지에 속한 부인으로 보았다. 노라는 극의 마지막까지도 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파스빈더가 그녀를 포함해 모든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사회까지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점을 입센의 드라마에서 읽어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파스빈더는 노라와 헬메르를 비롯한 모든 인물이 억압적인 부르주아 사회가 그 유지를 위해 조각하고 있는 잠재적 탄핵과 처벌을 의식하고 있지 못한 인형들로 해석한 것이다.

1981년 스웨덴 출신의 연출가 잉그마르 베리만은 뮌헨의 레지던츠테아터의 앙상블과 함께 매우 혁신적인 <인형의 집>을 만들어냈다. 인형의 집은 남녀의 관계를 그린 삼부작, 즉 노라-헬베르, -줄리(줄리에 아가씨), 요한-마리안네(결혼의 풍경)의 소위 '베리만 프로젝트 중 한 작품이었다. 베리만 연출의 기본은 몰 시간과 몰 장소에 있었고 입센 리얼리즘의 상위 구조 속에 잠재되어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층위를 끌어내는 데에 있었다. 무대 공간은 억압과 밀폐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도록 실제의 세계와 어떤 접촉이나 연계점도 없는 감옥처럼 설정되었다.

 

 

<인형의 집>1879년 작품이므로 2022년 현재 쓰인지 143년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도 세계 어디에선가 인형의 집은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남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넣음으로써 인류가 존속되고는 있으나 그 이면에 많은 문제가 내재해 있기에 인형의 집은 시공을 초월해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여주인공 노라는 창작 당시 입센처럼 마치 실존인물인 것처럼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녀의 이야기가 어떤 형식실험과 새로운 모티프의 단초가 될 것인지가 이제 우리의 관심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2년 리 부르어가 연출해 같은 해 오비상 연출상을 수상했고 2008LG 아트센터에서 공연한 프로덕션은 언급의 가치가 있겠다. 리 브루어 스스로 평가했듯 그의 <인형의 집>"포스트모던한 공연"이었다. 소품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가 공연이 시작되면서 무대가 제 모습을 갖추어가는 극중극처럼 보이는 형식, 과장된 멜로드라마 적 요소들, 오페라와 인형극 기법들의 활용 등 브루어의 <인형의 집>은 일견 키치하며 가벼운 듯 보였지만 사회적 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숨겨져 있었고, 인간의 존재 조건의 실상들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졌다. 그의 연출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캐스팅이었다. 여성 인물들은 평균보다 큰 키의 훤칠한 배우들인 반면, 남성 인물들은 모두 왜소한 체구의 배우들이었다. 그러나 남성 인물들은 몸의 크기와는 달리 의연하고 당당했으며 정상 키의 여성들은 이 남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때로는 무릎을 꿇고, 때로는 엎드리고, 심지어는 기어야 했다. 왜소증의 남성들보다 더 작아져야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 여성들의 모습은 처절하고도 비참하다. 노라는 마지막에 오페라 극장의 발코니에서 장엄하고도 처절하게 자유를 선언하는 오페라 아리아를 부른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코르셋으로 조이고 강철프레임으로 부풀린 19세기 의상과 가발을 벗어 던지고 민머리에 발가벗은 모습을 한 채 극장 밖으로 사라진다. 그녀가 사라진 후 내복 차림의 왜소한 토르발은 애처롭게 훌쩍대며 노라를 부르면서 객석 사이에서 아내를 찾아 헤맨다. 노라-토르발, 토르발-노라, 이 두 인물은 모두 부권사회가 창조한 비극적 인물들이다. 실은 왜소하지만 당당함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하는 남성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인형의 집'에서 살아야 하는 여성들 이들 모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불행한 인간들임을, 아니 인형들임을 리 브루어는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채굴해냈으며 작가의 생각대로 '현대의 비극'을 무대화한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느라, 즉 결혼생활이란 무대에서 연극을 하느라 서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노라들과 토르발들은 그 긴 역사의 두께를 깨부수기 힘든 부권사회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가 여전히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인형의 집>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시의성을 지닌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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