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신철욱 '백마와 기차'

clint 2022. 8. 10. 09:21

 

 

 

연극의 배경은 내일이면 문을 닫게 되는 동물원이 있는 도시다. 이 도시는 동물원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테마파크를 짓기로 한다. 동물원에 살던 동물들은 죽여서 박제로 만든 뒤 테마파크 안의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할 계획이다. 호랑이 조련사로 지내온 진이에게는 이 일이 청천벽력과도 같다. 어렸을 때 엄마가 꼭 찾아오겠다는 쪽지와 함께 동물원에 진이를 버린 이후로 동물원은 진이에게 집이자 일터였기 때문. 하지만 진이는 저항할 방법도 힘도 없다. 어차피 죽을 거니 먹이도 줄 필요 없다는 동물원 원장 때문에 일주일간 굶은 호랑이가 너무 불쌍했던 진이는 호랑이를 풀어주고, 자신은 엄마를 찾아 떠난다. 굶주린 호랑이가 풀려나자 도시는 혼란에 휩싸이고 진이는 엄마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진이는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술주정뱅이들을 만나 술에 취해도 보고, 무법자들이 폐차된 자동차 친구를 아주 못 쓰게 망가뜨리기도 한다. 이런 장면은 마치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연상시킨다. 어린 왕자가 여러 행성을 다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 결국에는 사랑과 희망을 발견하는 것처럼 결국 진이에게도 희망은 남았기 때문. 진이는 기차가 서지 않는 도시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지만,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백마를 타면 되지 않느냐는 소녀를 만나 희망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현대 문명의 비정함과 비인간적인 면을 꼬집는 메시지는 좋았다. 호랑이는 도시 외곽의 폐차장으로 숨어들고 버려진 차들이 오히려 호랑이를 보호한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무생물인 자동차가 생명체인 호랑이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는 역설이다. 그때 버려진 차들은 "사람을 믿어서는 안 돼. 인간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적이야"라며 인간들의 비정함을 꼬집는다. 백마와 기차라는 이 작품의 제목에는 주제가 용해되어 있다. ‘백마는 비루하고 비정적인 물신주의 사회를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원초적 고향회귀로서의 이상적 공동체를 암시하고, ‘기차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 주는 그것의 속성처럼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있는 물신주의로서의 지금 이곳의 황량한 삶의 조건들을 암시하고 있다.

동물원 사육사 진이가 폐쇄된 동물원을 떠나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하지만 기차는 그의 소망을 이루어지게 하지 않는다. 진이가 몸을 팔고 있는 유리를 만나 그녀의 사랑을 거부하고, 또 그 자신의 뜻에 어긋나게 술집에 팔려가 고초를 겪게 하는 것도 바로 기차가 그 원인 제공을 한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의 어머니가 있는 고향은 현실적 공간을 의미하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상적 낙원으로서의 공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물신주의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비정적인 풍경을 총체적으로 은유하는 알레고리이다. 상업적인 부의 창출을 위한 동물원의 폐쇄, 동물들의 박제 전시, 술에 절어 있는 인간들의 넋두리, 호랑이 포획을 위한 수색 작전, 순수한 영혼을 잃고 피폐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유리의 참담한 모습 등이 바로 그러한 현대 물신주의 사회의 비정적인 풍경이다. 폐차장에서 자동차들이 숨어들어 온 호랑이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려는 노력이나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는 그러한 도시의 비정성에 대한 은유적 풍자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왜곡된 현실의 모습을 희화적인 풍자적 기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 의도 때문인지 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표현이 과장의 기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를 포획하기 위한 경찰서장과 순경, 그리고 포수의 장면, 동물원 원장의 진이와 유리에 대한 냉대와 호랑이를 포획하기 위해 진이를 포섭하는 장면, 자동차 폐차장 내에서의 자동차들의 대화 장면, 역무원의 방송 장면, 폭주족들이 자동차를 부수는 장면 등은 인물의 성격 묘사와 표현, 그리고 움직임에 있어서 다소 과장적 기법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두드러진 점은 인물들에게 엑센트를 주기 위해 이동식 철망을 이용한 클로즈업의 기법이다. 여기에서의 철망은 탑 조명과 같은 기능으로 인물과 상황을 확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는 무대 기법에서는 강조의 기능을, 그리고 관극의 측면에서는 관객의 시선을 집중화시키고 고정화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무대 미술과 장치 역시 강조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무대 후면의 추상화된 폐차장 풍경은 비인간화되고 상업화된 현대사회의 물신주의적 기계화를 다소 과장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이동식 철망 역시 인물의 클로즈업을 통해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희화적인 과장의 기법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진이와 유리, 그리고 폐차된 자동차들의 내면적인 쓸쓸한 풍경을 오히려 더욱 더 약화시켜 그것들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기보다는 축소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있어 아쉬움을 주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우화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 총체적인 현실 은유로서의 알레고리가 강하다. 연출자는 뒤틀린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서 다소 과장적인 강조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장과 강조는 왜곡된 현실의 모습만 강조해서 보일 뿐이다. 그러한 현실에서 소외되고 버림 받은 인물(진이, 유리, 폐차, 호랑이)들의 내면적인 아픔과 쓸쓸함은 오히려 그러한 과장과 강조에 의해 약화되어 버린 것이다.

익히 알려지고 검증된 고전적 명작들과는 달리 국내 작가들의 창작극, 특히 지역 작가의 창작 초연 작품은 수차례의 공연을 통해 수정 보완이 될 때만이 희곡의 완성도가 이룩되는 것이다.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창작극이 연극적 완성도를 검증받지 못하고 있는 일회성의 공연으로만 끝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마와 기차는 현실 풍자의 과장적 기법보다는 총체적 현실 은유로서의 알레고리가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조와 과장보다는 시적인 조용한 무대가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아니면 뒤틀린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들은 과장으로,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서 소외된 인물들은 시적인 은유로서의 조용함을 대비시켜 표현한다면 주제가 보다 더 명확해지고 관객에게 감동의 여백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무대가 좀 더 시적인 상징으로서의 추상화가 가미되어 간결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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