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눈빛의 강아지들〉(1995)은 1999년 마드리드의 ‘라 살라 콰르타 파렛’에서 1999년 초연되었으며 작가가 작품을 쓴 것은 1995년이었다. 작품은 네오나치 청년 대장 역할을 하는 수르코스와 그의 부하 노릇을 하는 카초로가 8월의 무더운 여름 저녁에 카초로의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카초로는 중산층의 부유한 집안 아들이다. 겉보기에 카초로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른 채 너무나 권태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카초로에게 수르코스는 제안을 한다. 전화로 창녀를 불러 섹스를 한 뒤 두들겨 패자는 것이다. 수르코스가 고른 창녀는 ‘바르바라’ 라는 트랜스젠더다. 그들은 바르바라가 트렌스젠더라고 오해한 채, 수르코스는 ‘아돌포’라는 가상인물이 되어, 카초로는 하반신이 마비된 ‘알베르트’라는 가상인물이 되어 연기를 한다, 이 극중극 인물들은 바르바라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동원된 메타 인물들이다. 카초로는 수르코스가 제안한 폭력을 실행하고 싶지 않아 바르바라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바르바라와 카초로는 수르코스를 속이기 위해 방에서 가짜오르가슴을 연기하고 밖에 있는 수르코스는 그들이 나오자 바르바리를 폭행하기 위해 칼을 꺼낸다. 카초로는 수르코스의 폭력을 저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다가 실수로 수르코스를 목조르고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일요일 저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한바탕 연극은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작가는 스페인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폭력을 두 네오나치 청년을 통해 보여준다. 이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조국’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며 이들에게 ‘추하고 연약하고 검은 것’은 사회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는 비단 스페인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외국인- 특히 비영어권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혐오, 사회적 약자- 여성, 아이, 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빈번히 목도하게 된다. 이런 혐오가 낳는 폭력을 작가는 네오나치라는 극단적인 그룹에 속한 두 청년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작가의 말처럼 이런 젊은이들은 ‘시도성찰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는 농담과 조롱은 실제 우리 일상, 아주 가까운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폭주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유다.
작가의 글
선진화되었거나 복지를 이룬 사회일수록, 갈수록 더 심하고 빈번하게, 더 부조리한 이유로 정당한 이유도 없이 피와 죽음이 발생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남자들은 동반자를 더이상 견디지 않기로 마음먹을 때 부인들을 죽이지요. 거의 매일 두들겨 패고 욕설을 퍼부으며 몇 년을 보냅니다. “난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법정에서 살인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서로 다른 축구팀의 광적인 축구팬들은 서로를 구타하고, 때때로 축구공을 차는 남자들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칼부림까지 가기도 합니다. “다루기 쉽지 않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조용히 하라고 명령했다고 선생님의 차를 부숩니다.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은 원인도 근거도 없는 “이유”로 기물을 파손하고 사람을 공격합니다. “조국" “인종” 또는
“외국인”같은 단어들은 사람들이 폭탄을 움켜쥐거나 칼로 타인을 찌르는 이유가 됩니다. 의미 없고, 진정한 가치도 없고, 반성도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예술도 시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죠. 타인들에 의해 강요된 물질적 갈급,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듯 소비로 치닫는 삶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무책임한 행위를 잔인하다고 할 정도까지 부추깁니다.
그 폭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어떻게 준비된 거죠? 언제 폭발하나요? 이런 질문들이 〈성난 눈빛의 강아지들〉을 쓰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저는 가장 비겁한 폭력의 전형으로 “스킨헤드족” 젊은 이들을 선택했습니다. 절대 홀로 공격하지 않으며, 늘 연약하거나 혼자 있는 사람들을 찾으며, 자신들의 “행위”를 계획하고 훈련하며 악(惡)을 위해 살지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작품의 주인공 카초로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정상적인 소년이지요. 그에게 유일한 문제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뿐입니다. 악역을 맡은 스킨헤드족 수르코스는 카초로에게 살맛 나는 “아주 강력한” 뭔가를 제공할 겁니다.
이 작품을 쓴 의도는 문제를 심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예술적 관점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도 저는 위험한 길로 들어섰을지 모릅니다. 근거 없는 폭력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위태로운 것을 계획 했습니다. 주인공들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 제 자신의 폭력과 연결하고 그 폭력을 결론까지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명확하게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폭력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제 안에. 그리고 우리 각자의 내부에요. 폭력을 절제할 수 있는 잠재적 능력만이 우리를 더 야만적인 짐숭들과 구분해주는 것이지요.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고문관, 결박 당한 살인자, 인간다워지기 위해 무찔러야 하는 악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인 우리는 내부의 적을 이겨내기 위한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善)과 선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영혼을 얻는 일입니다. 오직 영혼만이 몸과 정신이 모르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이지요. 영적인 길로 향하는 일은 인내심, 감수성, 관용, 자비 등에 영감을 줍니다. “타인” 안에 우리를 놓는 것을, “타인”이 되는 것을, 다름을 인정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감정들이죠. 하지만 이렇게 느끼기까지 개인에게, 집단에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좀 더 정의롭고 평온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부터 정의롭고 평온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권력의 자리에 있든 우리가 타인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권태에 빠진 두 소년 입니다. 그들은 두 개의 돌맹이처럼 서로를 문지르고 문지르다 비극의 불씨를 낳게 되지요. 〈성난 눈빛의 강아지들〉은 부조리한 폭력이 어떻게 준비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쇠몽둥이와 “위대한” 단어들을 지니고 우리가 걷는 길을 위협하는, 어떤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소년들이 주인공인 폭력이지요. 1995년에 썼고 오늘날 너무나 슬프게도 현실이 되어버린 이 작품이 곧 역사적인 무언가로, 관심 밖의 영역으로 변하기만을 바랍니다. 더 나쁨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하나의 자료로 바뀌길 바랍니다. 밝은 눈빛은 우리로 하여금 차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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