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플로리앙 젤레르 '어머니'

clint 2021. 8. 5. 16:03

 

 

여기, 한 어머니가 있다. 붉은색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자신을 한껏 뽐내는 여인. 노년의 안나는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붉은색 원피스를 몸에 둘러보지만, 가족에게서 오는 응답은 영 시원치 않다. 그녀는 날마다 꿈을 꾼다. 그것이 정말 꿈이든 혹은 망상이든, 그녀는 꿈을 꾼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몸을 섞는 꿈, 아들이 애인과 몸을 섞는 꿈이다. 아들과 남편의 삶 속에 자신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을 안나는 매일의 망상 속에서 느끼고 있다. 자식들을 모두 떠나보낸 어머니, 결국 나중에는 홀로 되는 어머니. 급기야 빈 둥지 증후군을 경험하며 하루하루 초조하게 살아가는 한 어머니의 모습이 희곡 어머니를 통해 조명되고 있다.

 

 

극 중 어머니 안느는 날마다 남편의 사생활을 의심한다. 출장을 가는 남편에 대해서도 다른 여자랑 호텔에 간다고 생각하고, 아들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유쾌하지 않다. 자신만 남겨두고 모든 가족이 멀리멀리 떠나버린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강박과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머니는 빈 둥지 증후군을 앓고 있는 안느의 1인칭 시점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가 같은 상황을 반복함으로서 치매 환자의 인식 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증상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거듭 반복돼 사용되는 오늘 어땠어?’ 라는 한 마디 대사 속에는 수십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동어를 반복하고 있지만, 의미까지 반복되는 경우는 없는 셈이다.

간결한 대사와 명징한 상황으로 시작한 작품은 어느 새 혼돈과 불안의 세계로 빠져든다. 특히 어느 시점부터 극은 현실이라기보다 안느의 머릿속, 즉 환상과 망상으로 점철되는데 여기서부터는 관객도 함께 혼돈에 빠진다. 극 전개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망상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또한 논리도 맥락도 주어지지 않고 순간순간 머릿속을 치고 들어올 뿐이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를 본 관객은 불현듯 뇌 속에 들어오는 여러 상황 속에 낯섦을 경험하게 된다. 그 낯섦은 작가가 제기하고자 했던 핵심이기도 하다.

아버지어머니는 연극에도 시점을 정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현대 시대의 표현주의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구사돼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치밀한 계산과 감각이 만들어낸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작품이다.

 

 

플로리앙 젤레르는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는 극작가다. 어머니를 시작으로 아버지, 아들이른바 가족 삼부작을 완성하며 현대사회 가족 문제를 다각도에서 조명했다. 어머니2010년 초연되어 몰리에르 상을 수상한 이후 유럽 전역에서 잇달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새로운 스타작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작가가 부모가 되어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자식이 생기고, 자식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면서, 자신 또한 어머니로부터 그런 헌신적인 사랑을 받았던 때가 떠올랐는데 그때 스스로가 배은망덕한 아들처럼 느껴졌다고 한다어머니는 자녀들을 모두 독립시키고 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 어머니 안느의 심리를 해부한 이른바 심리 탐사극이다. 전업주부로 자녀들과 남편을 뒷바라지해온 안느는 모두에게 버림받고 빈집에 홀로 남겨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술과 약으로 떨치려 한다. 아들 니콜라에 대한 집착은 병적으로 커져가고, 남편이 외도 중일 거란 의심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녀가 우울과 광기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남편과 아들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가족에 헌신해온 어머니가 중년에 이르러 자녀들이 더이상 자신의 헌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낄 상실감이 어떠할지 짐작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희곡에서처럼 오늘날 많은 중년의 어머니들이 가족의 무관심 속에서 깊은 우울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젤레르는 그런 어머니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간다. 그리고 분열된 그녀의 자아를 뚝뚝 끊어지는 장면들로 제시한다. 마치 언제 꺼져버릴지 모를 깜박이는 전구처럼 어머니의 심리는 불안하기만 하다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에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젤레르는 이 희곡을 눈물과 후회의 연극으로 완성하지 않는다. 대신 어머니 안느의 불안 심리와 그 때문에 가족들이 시달리는 상황을 교차로 보여주어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면서 오히려 유희를 시도한다.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를 장면들의 반복 속에서 독자는 안느의 집착적인 사랑에 진저리를 치다가도 안느와 함께 남편과 아들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유희의 결말은 전적으로 독자의 선택에 달린다. 안느를 이해하게 되거나 안느를 저버리게 되거나이런 연극적 유희는 이후 플로리앙 젤레르만의 개성적인 극작 스타일로 굳어진다. 이어 발표된 아버지, 아들역시 똑같이 실제와 환상을 마구 뒤섞는 방식으로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며, 독자의 선택으로 작품의 메시지가 완성되도록 하고 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을 독자가 맞추게 함으로써 작품을 완성하는 이런 구성은 작품에 대한 공감의 폭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젤레르의 희곡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이유 중 하나다.

 

 

플로리앙 젤레르(Florian Zeller, 1979)는 오늘날 프랑스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신예 소설가다. 2002년에 첫 소설 인공 눈(Neiges artificielles)을 발표해 아셰트 문학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문단에 데뷔했다. 2004년 파리에서 첫 희곡 타인(L'Autre)을 공연하여 관객들의 환호와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이후 불과 10여 년 동안 6편의 소설과 10편의 희곡들 발표했으며, 그중 절반은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연극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것은 일곱 번째 희곡 아버지(2012). 아버지2014년 브리가디에 (Brigadier)상과 몰리에르상 3개 부문을 석권했고, 영국에서 UK 연극상(2015), 이브닝 스탠다드 최고연극상(2015), 로런스 올리비에상(2016), 미국에서 토니 최우수작품상(2015)을 수상했다. 2016아버지는 이스라엘 연극아카데미 최우수상을 추가로 수상했고, 오늘날 해외에서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연극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렉스프레스30대인 플로리앙 젤레르를 동시대 프랑스 최고 극작가로 평가한다. 야스미나 레자, 장뤼크 라가르스, 조엘 폼므라, 플로리앙 젤레르가 주도하는 동시대 프랑스 연극은 과학 기술과 시장 경제의 횡포, 이념의 공백, 일상에 편재한 폭력, 인간관계의 단절과 자기 소외 등 당대의 사회 문제들을 천착하면서 연극 양식의 실험에도 주력해 왔다. 특히 플로리앙 젤레르는 아방가르드극과 풍자희극을 혼합한 포스트모던극 형태로 단조로운 일상생활의 지하 동굴을 탐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