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며 시커먼 굴속에서 끊임없이 금을 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어둠의 도시. 이 도시의 사람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없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겐 아름다웠던 삶을 추억하는 일도, 고향을 그리며 슬픔에 잠기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생의 기쁨으로 가득 찬 빛나는 삶을 꿈꾸는 것은 오히려 괴로움이기에 그들은 스스로 만든 그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자신을 감추어 버린다.
어느 날, 빛이 없는 이 어둠의 도시에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온다. 온몸에 붉은 협죽도 꽃을 두른 채 나타난 ‘난디니’ 그녀는 희망이 없는 이 도시에 잊혀진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그녀는 ‘론존’이 잠들어 있는 이 도시의 심장을 깨워 모두를 밝은 빛으로 이끌어줄 거라는 희망을 도시에 퍼트린다. ‘론존’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을 동요시키고 변화에 대한 기원은 단단히 묶여있던 도시의 지배구조에 균열을 일으킨다. 도시의 지배자들은 이 혼란을 틈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지배구조를 더운 견고히 할 기회로 삼는다. 난디니에 의해 희망을 꿈꿨던 사람들은 왕의 그물 안으로 던져져 희생된다. 자신이 가져온 희망이 절망으로 불타오르는 광경을 목격한 난디니는 자신의 무력함 앞에서 고개를 떨군다.
아시아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인도의 시성(詩聖), 인도의 위대한 시인‧작가‧교육가로 활동하며 1913년 영역시집 『기탄잘리』로 아시아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R. 타고르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집필한 희곡 〈붉은 협죽도 꽃 Red Oleanders)〉이다. 붉은 협죽도 꽃은 ‘조심, 주의, 경고’라는 꽃말과 같이 독성이 강한 꽃입니다. 타고르는 길을 걷다 버려진 철 더미 사이를 뚫고 피어올라온 붉은 꽃을 발견하고 영감을 얻어, ‘죽음’과 ‘아름다움’을 모두 연상시키는 강렬한 꽃의 이미지를 작품에 담았다. 근대 문명의 시스템 안에 갇혀서 인간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광부들과 사회 그물망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갈망하였기에 맞이한 역설적인 죽음을 그려낸다. 100년 전 근대 문명의 비판적 성찰 메시지,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 ‘김정’이 펼쳐내는 몸의 연극. 이러한 문제 제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100년 전의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 메시지는 시간 차를 뛰어넘어 고연옥의 각색으로 동시대 감각을 보여준다. 단편적인 대사 전달에서 벗어나 대사의 상징적이고 함축된 의미를 익살스러운 표정, 과장된 움직임, 유쾌하고 폭발적인 에너지로 전한다. 관객들은 인간 군상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자유를 향한 설렘과 기다림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각색의 글 - 고연옥
난디니를 제외한 모든 인물은 한데 결합하여 왕을 만든다. 즉, 그들은 왕을 이루는 세포들 이다. 결합하는 모양에서 계급이 나뉜다. 총독은 가장 위쪽에, 노동자들은 아래쪽이다. 더 아래로 갈수록 수명이 다한 세포들이 많다. 그들은 서서히 죽어서 떨어져 나간다. 늘 죽음을 동반하고 있기에 왕은 처음부터 늙은 존재이다. 인물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였다가 왕으로 합쳐지기를 반복하는데,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는 각자의 개성을 지니며 인간적인 혼란이나 갈등, 희망을 갖기도 하지만, 왕으로 결합돼 존재할 땐 일종의 ‘전체성’을 지닌다. 그들이 그런 괴물 같은 형태의 왕이라는 구조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보다 속박이, 개인보다는 전체 속의 하나로 포함되어 살아가는 게 보다 안전한 삶을 누리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난디니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그들의 세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이다. 난디니는 그들과 다른 자신의 존재로서뿐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이미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인 론존을 통해 그들의 세계를 위협한다. 그들 모두의 결합인 왕은 그녀의 솟구치는 에너지를 갈망하며, 난디니의 동경과 사랑을 받아서 자기 세계에 포함시키고자 애쓰지만, 론존에 대한 난디니의 절대적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 중 과거 난디니의 친구였던 비슈는 난디니를 통해 급격히 변화해 가고, 급기야 그들 세계에서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고 기뻐하는 비슈에게 그들은 난디니를 죽여 이 세계의 평화를 회복시키자고 부추기고 비슈는 갈등한다. 그러나 비슈의 칼은 난디니 대신 왕에게 향하고, 그 칼에 맞는 이는 난디니를 사랑했던 소년 키쇼이다. 난디니는 키쇼의 시체를 팔고서 이 세계를 떠난다.
이 작품은 왕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난디니로 상징되는 ‘자연’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은 모든 생명을 빨아들여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려고 애쓰지만 결국 살육에 의한 야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왕은 타고난 생명성을 가진 난디니를 갈망하는데 그것은 차디찬 문명조차도 자연에서 비롯되었다는 근원에 대한 동경일 것이다. 난디니의 생명성은 론존에 대한 절대적 사랑에 기반하고 있다. 론존은 신적인 존재로 상징되며, 신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믿음을 간직한 것이 자연 그 자체로서의 난디니라고 할 수 있다. 론존이 실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자연 속에는 이미 신적인 섭리가 포함되어 있기에 그 자체로 신성을 드러낸다. 난디니는 왕과 직접적으로 대결하기보다는 근원적인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애쓰지만, 이미 생명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왕은 더 완고한 벽을 만든다.
그럼에도 왕의 세계에 종속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변화하기 시작했고, 적어도 그 세계로부터의 탈출 혹은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로 인해 왕의 세계는 전보다 더 잔인해지지만 적어도 여기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 세계의 바깥에 더 크고 광활한 자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리하여 종종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게 한다. 당신은 자유로운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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