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프랑스에서 최고의 극작가 중 한 사람으로 주목받고 있는 플로리 앙 젤레르(Florian Zeiler, 1979∼)의 희곡 <아버지>, <어머니>가 프랑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성공리에 공연되고 있는 이유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크게 대두되고 있는 문제인 인구 고령화, 고령화 사회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고 치매환자의 급증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가 더욱 시의적으로 와닿는다
<아버지>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주제가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큰 스케일의 대서사시 같은 작품은 아니다. 큰 메시지의 웅변조도 아니고 사변적이거나 서정적이지도 않고, 아주 단순해보일 정도의 일상언어로 쓴 동시대 작품(2012년)이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해럴드 핀터, 데이비드 린치, 욘 포세의 영향으로, 이 작품은 단순한 언어 뒤에 숨은 말해지지 않은 말, 침묵이 중요한 작품이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들어있는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인공 아버지 앙드레는 겉으로는 단순한 늙은이처럼 보여도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내면에 수많은 인격을 품고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시계(시간)에 대한 강박증을 보이는 아버지 캐릭터는 고집스럽고, 변덕스럽고, 사납고, 격분하고, 낙담하고, 농담도 잘하고 유머가 있으며, 장난기도 있고, 그야말로 대조적인 여러 면을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런 그가 자기 딸 안느, 간병인, 간호사도 혼돈하고,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도 혼돈하고, 날짜도 잊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헤맨다. 자기 자신도 잊어버리고, 울면서 엄마를 찾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불쌍한 아이 같은 존재로 변해간다.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이 노인의 점진적인 퇴화과정과, 그와 그의 가족이 겪는 혼란, 기억상실로 이어가는 소통 부재를 멜로드라마식 비장미 없이 그냥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고 사라져 간다. 집안의 가구며 그가 자신의 개인 공간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기준점이 소실되어 간다. 그의 개인적인 공간이 자꾸 줄어들면서 병원같이 넓은 공적인 공간, 공동으로 쓰는 익명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혼자서 헤쳐나갈 수 있는 독립성의 상실, 특히 시공간 인지 기능의 문제는 결국 딸 안느로 하여금 아버지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공공 요양병원 시설로 옮기게 만든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 존재가 쇄락해 가면서 보여주는 명민한 빛을 안타깝게 지켜보게 된다. 그 풍경은 우리 각자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잔잔한 파동을 만들어준다.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모르는 다른 존재들과 마주치게 되어 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공간에 놓인 존재,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인가? 이 작품에는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고 있는데, 작가는 확실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반복적인 변주를 통해서 이를 보여 주면서 여러 가지로 질문하게 한다. 딸 안느가 허약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버지를 파리에 두고 애인이 사는 런던으로 이사를 갔는지, 아버지가 그냥 그렇게 꿈을 꾼건지도 확실하지 않다. 또한 이야기가 시간순서로 진행되지 않는 데다 별다른 설명 없이 생략과 말 없음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난해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갑자기 튀어나온 듯한 장면 속 이야기가 진짜인지 알 수 없고, 앞에서 한 말을 반대로 말하기도 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실인지도 알 수 없다. 여자, 남자로만 표기되어 있는 미지의 인물들은 다른 인물이 한 말을 반복하기도 한다. 누가 진짜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누가 진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 이 익명의 인물들은 누구의 이중 인물인지, 간병인 중 한사람은 앙드레가 찾는 딸, 엘리스를 진짜로 닮았는지, 안느가 런던에 사는지 파리에 사는지, 안느의 남편 피에르는 앙드레를 진짜로 위협했는지 등등 ... 작가 자신도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작가는 조각 하나가 모자란 퍼즐같이, 꼭 맞춰 보이려고 하기보다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기를 선호한다. 그렇다고 난해함 속에 두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겠지만 관객도 질문할 수 있도록 하면서 모자란 부분을 관객이 채우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딱 맞는 인위적인 구조보다는 다 채우지 않음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질문은 인간에 대한 관심, 인간의 표리와 깊이를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아버지는 사라져 가는 기억의 우물 속에서 죽은 둘째 딸과 오래전에 죽은 자기 어머니 생각을 퍼올리지만 플로리앙 젤레르는 극을 감상적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면서 깊은 감동을 만들어낸다.
누구든 언젠가 부모의 부모가 되는 날이 올 수 있다. 치매처럼 늙은 부모가 아이로 돌아가는 것을 겪는 일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의 아이가 되는 일을 쉽게 수용할 것인가 ... 늙음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 두려움으로 가득 찬 동굴에서, 이 초행길에 헤매게 되는 미로에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사라질 것인가를 이 작품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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