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속의 새〉(1997)는 작가가 스페인 내전 이후 활동한 사실주의 희곡 작가 ‘호세 마리아 로드리게스 멘데스’에게 헌정하는 작품이다. 죽음을 앞둔 희곡 작가 ‘엔리케 우르디알레스’가 어릴 적 헤어진 누나 ‘암브로시아’를 만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담고 있다. 괴팍하며 자의식 강한 희곡 작가 엔리케 우르디알레스에게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 ‘아르투로 노보아’가 찾아와 방송에 출연할 것을 제안한다. 아르투로 노보아는 어릴 적 입양되어 평생 홀로 살아온 엔리케에게 누나 암브로시아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 방송에 나와 이야기해줄 것을 부탁한다. 엔리케는 경박한 텔레비전 문화를 혐오하며 자신에게는 누이가 없다고 그녀와 만날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 암에 걸린 엔리케는 자신의 마지막 희곡을 완성하는데 암브로시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그녀를 만나게 된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보모 일을 하다 늙어버린 암브로시라는 자애롭고 사랑이 넘치는 인물이다. 아픈 동생을 만날 때마다 그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를 격려하고 그의 작품들을 칭찬한다. 하지만 엔리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누나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간호사 ‘마르가리타’를 시켜 암브로시아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신의 마지막 작품의 결말을 완성하면서 그는 눈을 감는다. 엔리케를 보살피던 간호사 마르가리타는 작가의 마지막 작품의 결말을 대신 쓰겠다고 약속한다.
팔로마 페드레로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엔리케는 고용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때 자신을 안락사시켜 달라고 마르가리타에게 부탁한다. 늙어가는 것의 어려움과 존엄을 지키며 죽는 것의 가치에 대해 일깨우는 작품이다. 상호텍스트로 쓰인 호세마리아 로드리게스 멘데스의 작품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공명하면서 그에 대한 팔로마 페드레로의 오마주처럼 멘데스의 목소리를 독자들은 들을 수 있다. 작품은 “인간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작가의 글
대단한 배역이 없다면 대단한 작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극작가에게 유일한 이점은 타인의 피부 깊숙이 파고 들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유리에 걸어 놓은 종이를 보고 그림을 베꼈다고 느낀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어떤 모방도 없습니다, 극작가가 하는 일은 본인이 직접 보이지 않는 것을 취해서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망나니든 성인이든 간에 그 사람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 인물에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몸과 지성과 영혼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티오 창문에 걸린 종이에 너무 많이 의지하면 그림을 베끼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드리게스 멘데스를 아는 동료에게 어떻게 내 작품을 준비했는지 말하자 그는 저를 수상쩍게 바라봤습니다, 엔리케 우르디알레스에 참고할 이 작가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믿기 어려웠을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치는 그(로드리게스 맨데스)가 혹은 부에로 바예호가 아니면 다른 천재(그리고 나쁜 천재가)가 거기에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그건 완전히 무의식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반복해 말하건대, 저는 엔리케 우르디알레스였습니다. 저는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죽음에 탐닉해야 함을 발견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여성작가인 제가 남성작가였습니다, 될대로 되라지, 라는 기분이었지요. 삶은 너무나 놀라워 살아가는 것이 기쁩니다. 이제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호세 마리아 로드리게스 멘데스와 제가 극작품 속에서도 하나로 맺어졌습니다. 어쩌면 그 가치를 도와주러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도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물론 테레사 성녀처럼 날아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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