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상실한 여자와 그 남편의 이야기로 이뤄진 ‘먼 데서 오는 여자’는 ‘여자가 왜 기억을 잃게 됐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향해 움직여 나간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기억을 넘어 집합기억인 역사를 소환하며, 한국현대사의 근대화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직후 극심한 궁핍의 기억, 학대를 받아 심성이 비뚤어진 아이, 식모살이와 청계천 미싱 시다로 생계를 유지했던 소녀들, 월남전 파병 등 흘러간 역사가 이들의 삶과 중첩된다.
때문에 노부부가 살아온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은 우리네들이 함께 겪어온 이야기와 우리의 기억도 함께 같이 스며들어 있다. 기억과 이야기의 형식을 통해 한참을 풀어나가던 극은 결국 삶의 붕괴를 가져오는 내외부적 사건을 비추며, 우리 사회가 지나온 압축 성장의 어두운 이면을 들춘다.
짧은 제목에 인물과 행위 그리고 거리가 있다. 그 자간에는 쉽게 애도할 수 없는 긴 이야기와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있다. 한 시대의 결을 따라 떠밀려온 부부가 있고, 굴곡진 나라의 역사가 있고, 그 안에서 상실을 맛보아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있다. 아내와 남편만이 등장하는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에 이 모든 것이 있다. 종종 누군가는 내 지난날을 모으면 소설 여러 권이 완성될 거라고 호언한다. 그러나 나열된 과거가 소설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이야기가 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건져내 재구성하고 과잉되지 않은 감정을 세련되게 덧입혀 누군가의 허를 찌르는 것은 유능한 창작자의 일이다. 이 슬픔은 제 연민에 허우적대다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손을 내미는 단단한 슬픔이다. 늙은 부부가 벤치에 앉아 나누는 지난 이야기가 파국의 서사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무뎌진 마음을 조용히 파고든다.
아내는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시작했고 동생을 버렸다. 의도치 않게 주인의 돈을 훔쳤고 다시 되돌아갈 수 없었던 그날 만개한 벚꽃을 보았다. 눈부시던 흰색 꽃잎이 자신이 지은 죄인 것만 같았던 스무 살 여자의 찬란하도록 아픈 슬픔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낯선 땅 사우디, 모래바람으로 동료를 잃고 엉터리로 만든 술에 의지해 하루를 견디었던 남자가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이 하늘의 별인 것을 알게 되기까지의 헛헛함 역시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 아내는 현실과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망각에 기댄다. 지금까지 대화를 나눈 남편에게 이토록 친절한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곳을 헤매다 현실로 돌아오는 아내를 보는 남편의 표정은 한 단어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살기위해 성실을 투자했지만 죄책감을 대가로 받아야 했던 삶, 어디든 먼 곳으로 떠나고 싶게끔 만들었던 현실의 뻔뻔함,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남은 것이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에 있다. 그들에게도 반짝이는 순간이 있었으나, 잔인하도록 짧았다. 늦게 얻은 딸은 대학에 입학해 자취방을 얻던 2003년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 어이없는 떼죽음을 당했다.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싸우다 오랜 시간을 버려야 했던 남은 자들의 현재진행형 슬픔을 우리는 벌써 잊었다. 차마 짐작할 수 없기에 우리는 쉽게 잊고, 그들은 기억하고서는 견딜 수 없기에 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결국에는 잊히고 말 억울함이 가득하지 않은가.
말로 진행되는 연극은 그러나 절대로 말을 낭비하지 않는다. 이 구체적인 언어, 구체적인 슬픔 앞에서 우리는 뻔한 위로의 말조차 건네기 힘들다. 민감한 마음을 조심스럽게 헤아리는 연극의 자세가 우리 시대의 희망으로 읽힌다. 남편은 종종 그리고 특히 후반 연극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정말 말하지만 하소연으로 다가오기 직전에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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