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쓰여진<색시공>은 '色卽是空'의 줄임 말로 인간의 욕망과 허위성을 신랄한 풍자와 해학으로 우리 사회를 꼬집은 블랙코메디 작품이다. 당시 동아일보 해직기자(현 대한매일 논설위원)인 작가는 사이비종교를 등장시켜 '10월 유신'을 우화적으로 풍자했던 작품이다. 2001년에 다시 만들어진 "색시공2001"에서는 황포와 갈포라는 기존의 인물외에 사람1, 2라는 허상의 인물과, 원작에서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처리된 스승의 존재가 구체화되어 관객에게 드러난다.
사이비종교 창시자 '백포도인'이 제자들의 눈앞에서 법복만 남긴채 사라진 후
'백포도인'의 제자 '황포'와 '갈포'는 사부가 승천했다고 믿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인 무량도설을 전파하기 위한 포교전략을 세우지만
사실 두 사람은 사부의 '무량도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시작한다.
사부의 '무량도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속세로 뛰쳐나가는 두 사람 뒤에
'백포도인'의 한탄만이 극장안을 가득 채우는데....
허황된 진실을 둘러싼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의 모습들을 다양한 표현과
몸짓연기를 통하여 흥미있게 보여주는 퍼포밍 드라마
작품 줄거리
기독교와 불교를 합친 무량도설을 따르는 갈포도사와 황포도사는 스승 백포도사를 도라무통으로 만든, 로케트와 비슷한 법륜에 태워 발사시켰다. 법륜이 추락한 곳에 스승의 의발만 남은 것을 본 황포도사는 스승을 찾아나서고, 갈포도사는 스승이 승천한 걸로 간주하고 스스로 법통을 이어받으려 한다. 갈포도사는 스승의 승천으로 인해 증명된 무량도설의 영험함을 황포도사에게 떠벌리며 법식에 쓸 음식을 준비시킨다. 하인취급에 투덜대며 황포도사가 준비한 법식을 시작하는 갈포도사. 무량도설의 교리를 외며 법식을 마친 둘은 각자 스승을 처음 만나 때를 떠올린다. 경전 만들 궁리를 하던 갈포도사와 황포도사는 서로 종정이 되려고 상대방의 치부를 들쳐낸다. 갈포도사는 자신의 유식함을 내세우며 무량도설을 관청에 등록하러 혼자 떠난다. 뒤처질세라 재빨리 쫓아가는 황포도사. 이때, 솔숲에서 스승이 독사에게 물린 채로 기어나온다. 제자들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사라지려 했던 스승은, 갈포도사와 황포도사를 원망하며 간신히 법륜 속으로 기어들어가 죽는다.
이 연극에 나타나는 극적 사건은 간단하다. 무량도설교라는 사교(邪敎)의 수제자를 자처하는 두 제자(황포와 갈포)가 헤어진 지 3년만에 만나서 갈등을 빚다가 마침내 서로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줄거리다. 무량도설교는 불교와 기독교 등의 교리가 뒤섞인 사이비 신흥종교를 말한다. 황포(전무송 역)와 갈포(최종원 역)는 어린 시절에 무량도설교의 사부를 만나 수십년 동안 함께 수도 생활을 해온 사이이다. 수도 생활을 하기 전에 황포는 이발사였고 갈포는 어부였다. 이발사 출신답게 황포는 섬세하고 꼼꼼한 성격을, 어부 출신답게 갈포는 호탕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사부가 죽은 후에 아무 말없이 황포가 갈포의 곁을 떠나고, 그렇게 3년이 흐른 뒤 사부의 제삿날에 두 사람은 우연하게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이 만나는 지점은 사부의 제를 올리러 가는 길 위의 어느 곳이다. 그 길목에서 황포는 바랑을 지고 가다가 자신의 자동차를 수리하고 있는 갈포를 만나게 된다. 두 인물이 만나는 이 길목은 연극의 무대 배경이 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묘한 비유적 맥락이 된다. 즉, 이 연극의 무대인 '길'은 고행과 같은 구도의 한 길목이며, 삶의 여정을 잠시 쉬어 가면서 그 의미를 새겨보는 생의 한 단층이기도 한 셈이다. 따라서<색시공>은 '길 위의 연극'이며 '도상(途上)의 연극'이다. 그 길은 이 연극의 극중 인물인 황포와 갈포만의 길이 아니며,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 두 배우의 삶의 이면이자 동시에 관객 모두가 경험하는 삶의 한 이면이 되는 것이다. 황포와 갈포는 처음에는 서로 으르렁거리지만 조금씩 시간이 감에 따라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용서하고 이해하게 된다. 두 인물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똑같이 수도의 길을 가지만 삶의 고뇌가 각기 다르게 마련이고 또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 같은 삶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정체성의 확인은 이 연극이 의도하는 주제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극의 흥미로운 부분은 두 배우의 실제적인 삶의 이야기가 위와 같은 극적 사건과 서로 넘나드는 지점이다. 연극의 대사 흐름에 주의하면, 황포와 갈포의 담화이던 것이 어느 순간에 배우 전무송과 최종원의 담화로 슬쩍 넘어 간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황포와 갈포로 환원된다. 논리적인 취향을 가진 관객(다시 말하면, 닫힌 연극에 길들여진 관객)이라면 이의를 제기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열린 연극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열린 연극은 극적 환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위반하고 파괴하는 연극이니까. 이를 통해서 열린 연극은 극적 환각에 현실을 불어 넣고 현실 세계에는 놀이의 위반 정신을 부여한다. 이같은 위반의 놀이는 이 연극에 즐거움을 준다. 사부의 제를 지내는 우스꽝스런 종교의식과 은행털이를 상상하는 놀이를 보라. 기성 종교의 엄숙성과 기존의 도덕적 질서라는 금기는 여지없이 조롱받고 위반된다. 그러나 이러한 놀이는 단지 위반을 위한 위반이 아니다. 구도의 길과도 같은 생의 이면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모양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서로 용서하고 만날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니까. 다만 연극은 배우의 육체를 빌어 표현하는 형식이므로 배우의 삶을 통해서 말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무량도설교라는 사이비 종교놀음은 이 시대 연극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사이비 종교의 수도자는 곧 이 시대에 위반의 길을 가고 있는 연극배우의 고된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노루 친 막대기 3년 우려먹는다』는 말이 있다.
75년 초 극단 自由에서 金正鉦선생님의 연출로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약간 손질해서 다시 내놓자니 낯이 간지럽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용에 가까운 노릇이지만 당시 필자는 주위 분들의 권고도 있고 해서 全羅道出身이라는 資質(?)과 탈춤대본, 唱대본, 판소리대본을 약간 훑어본것을 밑천삼아 처음으로 희곡 비슷한 것을 써 보았다. 필자는 이미 쓰여져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선택. 조립해서 작품을 구성해보려고 했었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그 비슷하게나마 말한적이 없는 진짜 독창적인 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의 말을 선택, 조립하는 편이 진짜 創作보다 수월하고 재미도 있을것 같아서 였다.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진 이 작품은 聖經 佛經의 모자이크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데는 평소 종교 특히 邪教에 대한 필자의 관심이 작용한 탓도 숨길수 없겠다. 한 작품이 담고 있는 뜻은 그 작품 스스로가 말해주는 법이지만, 이 작품은 아직 그런 수준에 까지는 올라있지 못해서 필자는 굳이 作意를 부연하는 곤욕을 감수한다.
인간은 스스로 確信하지도 않는 어떤 思想이나 信仰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우려내려 드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보잘것 없는 작품을 무대에 올려 주신 극단 「고향」의 연출자 박용기선생과 주호성형께 감사를 드리며 푹푹찌는 무더위 속에서 연습을 해주신 출연자 趙明男, 全國煥 최연식, 신세웅, 김현우형들께 감사한 마음 이루다 말할 수 없다.
장 윤 환
동아일보 문화부기자 역임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장, 논설주간 역임
현 대한매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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