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루테(veloute)는 본래 잘게 갈거나 으깬 야채에 우유나 생크림을 넣고 끓여 만든 순하고 부드러운 맛과 질감을 가진 수프의 일종으로, 실제 이 작품 속에서 이야기 전개상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기도 한다. 과연 빅토르 아임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블루테는 어떤 맛일까?
빅토르 아임의 <블루테>는 힘 있는 자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힘없는 자에게 가하는 정신적 학대를 주제로 담은 아임 특유의 신랄한 세태 풍자 코미디 극이다. 이 작품은 필사적으로 직장을 찾아 헤매는 구직자 조나탕과 인정이 많은 척하면서 번지르르 말은 잘하지만 사악하고 가학적인 면접관, 그리고 광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소유한 그의 부인 클로에, 이 세 사람사이에서 벌어지는 기괴하면서도 변태적인 채용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취업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 구직자가 악마 같은 면접관을 만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트럼펫을 불 때마다 찢어지는 입술 때문에 트럼펫 연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전직 트럼페티스트 조나탕은 전에 연주하던 클럽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하다가 클럽 폐쇄로 직장을 잃는다. 그는 오랜 기간 일을 찾아 헤매던 중 어느 회사 사장의 운전기사 채용 모집에 지원한다. 조나탕은 면접 자리에서 그의 지원 서류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면접관을 만난다. '조'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내는 면접관은 조나탕에게 그가 가장 유력한 지원자임을 알리며, 그가 통과해야 할 마지막 테스트를 제안한다. 면접관이 조나탕에게 제안한 테스트는 지원자의 관찰력을 알아보기 위한 것으로, 자기 부인을 유혹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그 내용을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채용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조나탕은 면접관이 제안한 이 불편한 테스트에 응한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면접관의 집에서 그의 부인 클로에를 만난다. 그는 알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클로에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지고 만다. 조나탕은 남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모처럼 갖게 된 행운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도청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면접관은 잔혹한 본색을 드러내며 그를 조롱하고 위협하면서 궁지로 몰아넣는다.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조나탕은 면접관이 원하는 대로 자존심을 버리고 이 수상하고 위험한 면접관 부부의 종이 되고 만다. 세 사람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균형 관계를 유지하며 위험한 동거를 하기 시작한다. 조나탕은 상대를 괴롭히면서 기쁨을 느끼는 변태적인 면접관을 섬기며 굴욕적인 삶을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낼지 선택의 딜레마에 빠진다. 과연 그가 이 딜레마에서 어떻게 빠져나올지 이야기는 극의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전개된다. 점점 극심해지는 면접관의 모욕을 참아오던 조나탕은 아주 이상야릇한 조리법으로 자신의 피눈물을 섞어 만든 엄청난 블루테를 준비해 복수를 시도한다. 극 막판에는 황당하고 변태적인 면접의 마지막 테스트의 주역이자 자상한 남편의 탈을 쓰고 독재자처럼 행동하는 면접관의 또 다른 희생자 클로에가 깜짝 놀랄 만한 극적인 반전을 선사하며 이 작품은 막을 내린다.

빅토르 아임은 <블루테> 의 첫 버전을 이미 1995년에 완성했으나, 2000년에야 아방센 출판사에서 처음으로 <블루테 >를 출간하고, 이후 2007년 포켓북 형태로 재출간한다. 그는 2007년판 서문에서 <블루테>의 첫 버전을 쓰기 시작했던 1994년 당시 성적 학대에 대한 논의는 많았지만, 정신적 학대는 그 표현조차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썼다. 성적인 학대만큼이나 정신적 학대가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던 20여 년 전에 빅토르 아임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이 문제의 어두운 면을 그로테스크하게 보여 주는 블랙유머가 잘 섞인 코미디를 썼다. 그는 <블루테>를 통해 직장이나 가정,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지만 실상 우리가 너무 자주 등한시하는 정신적 학대에 대해 진정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정신적 학대가, 신체적, 성적 학대만큼은 아닐지라도, 한 인간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그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파괴적이고 위험한 현상이고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20여 년 전에 쓰인 이 작품은 불행하게도 오늘날에 그 울림이 더욱
커 보인다. 당시에는 재미있게 꾸며지고 과장된 것처럼 보였던 이야기가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타인을 모욕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오늘날 더욱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직장 내 부하직원에 대한 상사의 괴롭힘이나 왕따 문제, 열정 페이 문제나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부인에 대한 남편의 신체적, 정신적 학대나 자녀에 대한 부모의 학대 문제 등이 요즘 거의 매일같이 뉴스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만 봐도 우리는 정신적 학대가 얼마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우리는 < 블루테> 안에서 악마 같은 면접관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정신적 학대를 통해 그의 두 희생자, 조나탕(직장에서)과 클로에(가정에서)를 괴롭혔는지 알 수 있다. 조나탕의 경우. 면접관은 인간미 넘치는 친절한 상사인 척하다가, 그가 함정에 빠졌을 때는 가차 없이 그를 무시하고 모욕하고 위협하면서 그를 조종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결국 무너뜨린다. 면접관이 조나탕에게 "그건 자네가 자존심을 버림으로써 나에게 기쁨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네.“라고 말한 대목은 그의 변태적인 가해자로서 본색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다. 부인 클로에의 경우에 면접관은 부인의 하루 일과를 물어보는 지상한 남편 얼굴을 하다가도, 부하 <조나탕}에게 그녀를 감시하게 하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부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장에게 기꺼이 부인을 희생시키는 파렴치하고 잔혹한 가해자 역할을 한다. 빅토르 아임은 연극이 현실 문제를 충실하게 비쳐 주는 거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연극이 현실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 현실적인 문제를 소재로 삼더라도 그는 이것을 현실과 거리를 두고 뜻밖의 반전이 있는 연극적인 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면접 장소에서 만난 면접관과 구직자, 싸움은 공평하지 않다. 한 사람은 모든 권력을 쥐고 있고, 상대는 그렇지 않다.한쪽은 약간 변태적이고 교활한 인간이고, 또 다른 쪽은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면접관과 구직자 조나탕을 통해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 주인과 종, 이처럼 자칫 이분법적인 구조의 게임이 됐을 법한 이야기에 아임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 클로에를 등장시켜 극에 불확실성을 끌어들인다. 그녀가 등장하면서 모든 게 서서히 바뀐다. "내가 자세를 바꾸면 그에 따라 시차가 다르게 느껴져요. (...) 이렇게, 팔을 뻗으면, 내 손은 내 머리하고 같은 시간대에 있지
않아요.” 이처럼 클로에가 조나탕에게 말할 때는 마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클로에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미친 여자다. 하지만 그녀는 조나탕이 첫눈에 반해 자신의 꿈을 포기할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이자, 연민을 느끼게 하는 가련한 여자이기도 하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독자는 이 신비로운 여인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의 계략의 희생자일까? 아니면 그의 공모자일까? 그녀는 남편의 변태적인 게임에 어쩔 수없이 참여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는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남편의 변태적인 게임을 이용하는 걸까? 그녀가 극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 준 뜻밖의 반전은 독자에게 마치 스릴러를 본 듯한 전율을 선사하고 '결국 이 이야기에서 누가 누구를 이용하고 조종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빅토르 아임은 어떤 인터뷰에서 <블루테>가 자신이 쓴 50여 편의 희곡 가운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희곡 세 편 중 하나라고 밝혔다. 2000년에 <블루테> 가 출간되고, 같은 해 제라르 로베르(Gdrard Rauber)에 의해 초연되었다. 빅토르 아임은 당시 공연에 면접관 역할로 직접 출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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