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침실장면에서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을 찾아 확대 재해석하여 <햄릿-침실에서>가 탄생되었다.
"살인의 원조 아담의 장남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그 후예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다'로 시작된다. 우리는 이미 정치적 암투와 복수, 강간, 살인, 지정, 불륜, 동성애, 혼전 성관계, 미혼모 등의 폭력적 소식에 커다란 자극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연극은 더욱 할 말이 많아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반복되어, 원래 우리의 것처럼 길들여져 있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서구 전통연극의 형식이다. <햄릿-침실에서>는 기존의 텍스트와 이야기 중심의 사건과 기승전결이 있는 아리스텔레스적 연극 보기로는 이해가 안 된다. 대사가 연극을 완전하게 만들고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다양한 시청각적 이미지로 표현되는 온갖 예술직 매체를 활용해 사회의 병적 존재와 폭력성을 치유하고 현대가 추구하는 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꿈을 꾸어 본다. <햄릿-침실에서>는 서구에서 1960년대 초반 〈Performing Arts Journal〉이라는 공연예술지의 편집자이며 연극이론가인 보니 마랜카(Bonnie Marranca)가 이름 붙인 이미지 연극(Theatre of images)의 형식을 활용한다.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그의 4대비극중의 하나이며 , 고전이며 , 우리들가까이서 아직도 호령하고 눈부리는 정전이다. 그러한 질긴 생명력은 어디서유래하는지 그 원인을 찾는 것도 하나의 '관객으로써의 공부'라는 측면에서 ,그러한 기회를 제공한 김 현묵과 연출가 조 병진은 아무리 말해도 단단한 사람들이다. ' 400년 전의 한 극작가가 남긴 텍스트가 현재의 순간에까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시간적 간극을 뛰어 넘어 공통분모로 존재하는 보편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 보편성은 과거의 텍스트가 현재의 향유대상이 될 수 있게 하는 요인으로서 고전의 필수 조건이 된다. 세익스피어극은 당대 뿐 아니라 지금도 어느 극작가의 극보다 세계에서 가장 무대에 자주 오르는 레파토리이다. 망각과 파괴의독재자 시간과 대항하여 400 년을 이겨내고도 오히려 그 존재의 빛을 더하는 텍스트라면 분명 탁월한 보편성을 소유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러한 서구문학의 정전으로서 중심적 역활을 하는 세익스피어의 정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줄이어 나오고 있고 , 심지어는 정전 자체를 부정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특히 페미니스트나 다문화주의자들에게는 기존의 세익스피어 정전을, 죽은백인 남성의 전유물로 설명되고 격하되어지고 있다.' - 헤롤드 볼륨-그러나 그러한 일부의 설명과 격하에도 불구하고 그 극이 정전으로써 , 세계에서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올라가는 작가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손상 받기는 커녕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그러한 위치에 서 있다.헤롤드 볼륨은 세익스피어의 그러한 정전으로서의 가치적 위치의 힘을 그는'개념과 이미지'의 모두 선두에 선 작가라는 점에서 찾고 있다.그는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에 그 앞에서는 누구라도 시대에 뒤진 상태가 되며,또한 누구도 그를 앞설 수 없다. 누구도 그를 막시즘이나 프로이트 학설,드만의 언어적 회의주의등의 새로운 학설로 그를 설명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예시의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사후 형상화의 방법으로 그런 학설을조명한다. 프로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이미 세익스피어 안에 존재한다.
김 현묵은 작가의 글에서 , '굿에대한 그리움'과 '바람난 어머니로 인하여 붕괴된 가족이야기'라 햄릿을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서 , '세기말적 현상'이며, 적당히 비극과 희극이 가미된 후 무대로 올라 서기를 희망했다.
그런 그의 말에서 '굿'은 후대에 사람들이 '햄릿'을 위한 굿을 안했기에...라는뉘앙스로 전제를 깔고가며 , 이 극이 그러한 '망자를 위한 영혼을 달래는진혼곡'이 되었으면...하는 바램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진혼곡의 사이에 극의 효과를 위하여 페이소스적 웃음도 뭇어나는 그러한 극으로 이 '햄릿-침실에서'가 무대 위로 올라온 것 같은데..... , 글쎄..지금은 선뜻 말하기가 묘하다. 아직은 그것을 말할 때는 아닌것 같다.

'세익스피어의 무대 구성상 3대 특징은 , 막간 없는 계속성 , 빠른템포의 대사위주 , unlocalization 을 꼽는다. 그리고 또한 spectacle에 대한 적극적 시도도중요한 경향으로 지적된다.' 그러면서 그분은 이러한 무대를 꾸몄다고 그 의도를 말씀하신다. ' 세익스피어의 무대를 연상하고 , 브레히트와 그로토스키 무대를 겹치고, 월슨의 이미지 연극의 분위기를 더해 본다. 시적 분위기의 무대가 연상된다. 시,공을합성한 총체적 시(TOTAL POEM) 라고 이름을 붙여 본다.' 비로소 뭔가가 잡히기 시작한다. '총체적 詩' 라는 대목에서 뭔가 실마리가 이제내가 갖었던 어느 단상과 어우러져 물가 안개를 바람처럼 걷어 내고 있다. 사실 이 연극의 이해를 위하여 나는 '햄릿'을 두 번 정독하게 되었다.또한 그래도 잡히지 않아 , 내 영원한 정신적 스승인 밀란 쿤테라에게 어쩔 수없는 도움의 손길을 펼쳐 , 그에게서 '불멸'중 어느 부분을 정독하라는 게시를받고 그 부분을 읽어 보았다. 또한 프로이트와 라캉의 책을 찾다가 그냥 넘겨버리곤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대신 앉혀두고 밍기적 밍기적 거리며 손목을 잡아봤다. 쿠스타프 클림트의 '희망2'라는 미술작품도 본의아니게 읽어보게 되었다. '라캉의 제자이며 레주비언'이라는 '불멸'속 이야기에서 , 나는 밀란 쿤테라가현재 누구와 치열하게 싸움을 하는 듯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누구일까?"극을 천천히 되돌아 생각해 본다. 역시 '총체적 詩'의 구조가 맞는 말 같다. 우선 극의 순서는 ' 정해진 바 없고 알려진 바 없다'는 투이다. 우리나라 말로 정해진 순서 없이 마구 홍길동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거기에 더하여 중간엔 빔 프로젝터로 스크린에 "괴상망측할 정도의 형상"이 시간을 뽀개고 있다. 그 속에 나오는 단어는 CIRCLES , UPON , STONE , WISH 이다.눈동자의 동공같은 그속 , 블렉홀 속으로 빠져드는 그러한 영상이 시간을 길게 잡고 ' 안방 마님'처럼 척허니 안방을 꿰차고 앉아 있다. 순서를 잡기 어렵다. 이상한 그림이다. 왜? 연출가는 저것을 관객들에게 보여 주고 , 아까운 시간을 배려하고 있었을까? 그 답은 지금 나는 모른다.단지 극의 진행시 그 순서가 텍스트의 진행과는 완전히 "순 자기 멋대로" 의
절차를 밟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극의 빠른 진행? 글쎄~ 그건 절대 그런 것같지는 않았다. 극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니 , 극의 진행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는 없고 판단할 근거가 없슴으로 판명될 것 같다.
일단은 '총체적 詩'에서 출발을 하지만 결국은 로버트 월슨의 '이미 연극'의형식을 주된 내용으로 가져간 극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시 = 이미지' 라는 정통성과 , 앙토냉 아르토의 ' 왜 서양연극은 , 연극을대화극이라는 관점 밖에서 바라보지 않는가...'라는 말을 실험적으로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 극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의 뒷받침으로는<서양연극에 있어서 '분절언어'의 특권적 지위와 그것과결부된 '심리'적 연극에 대한 저주와 부정>인데 ..라는 앙토냉 아르토의 말을증거로써 제시하고 살짝 나는 아리랑 고개를 넘기로 했다.
'햄릿'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아니 세익스피어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있다라고 말하는 헤롤드 볼륨의 말을 기억하면서 , '개념과 이미지'라는 단어에주목하고 , '햄릿'에서 , '햄릿-침실에서'의 작가인 김 현묵이 가져가려는 주된 그러한 키 포인트는 프로이트와 어니스트 존즈의 '햄릿의 무의식적 욕망에 촛점을 둔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그의<복수 지연>을 설명했고 , 쟈콥라캉은 '햄릿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 욕망의 길을 잃고 헤매는 타자 지향 의 인물'로 규정했다는 것에서 그의 극에대한 키 포인트를 나는 찾고 있다.
그러한 작가 김 현묵의 촛점에서 극의 전개는 프롤로그 부분을 제외하면,'이해가 안간다. 어떻게 그러한 연극이...'라는 덴마크의 현왕인 클로디오스의대사로 부터 극이 시작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연극이 끝난 후' 부터 이 극은 시작되면서 , (텍스트에서는 그 '곤자고의 시역'이라는 , 햄릿에 의해서 '덫'이라는 제목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연극중 연극을 보고난 후 숙부인 왕의 모습과 그 후의 왕의 기도와 함께 천국과 지옥의 개념과 실행하지 못하는 암살 부분에서...) 다시 처음의 장면으로 되돌아가는 , 순서가 없는 ( 관객 입장에서는 ) 그러한 구성 요소를 갖고 시작되고 진행되고 있었다. '햄릿의 무의식적 욕망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 욕망의 길을 잃고헤매는 타자지햐의 임물'이라는 점을 극은 계속적으로 그 중심 내용으로 가져간것으로 나는 해석을 일단 하고 싶다. 그러한 것에서 햄릿의 어머니인 거트루트 왕비의 욕망을 빌고 차용하여 , 햄릿의 무의식적 욕망을 더불어 어우러지게 표현하였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작가 김 현묵은 '햄릿'을 '화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더 생각을 필요로 하며 , 완전 이해되지 못한 극이기에 계속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김현묵 작/연출의<햄릿- 침실에서>는 '넌 나에게 무엇인가 , 난 너에게 무엇인가 사랑이여! 그대 이름은 고독하다!'라는 긴 문장으로 부제 , 또는 중심어가 프로그램에 적혀 있다. 프로그램에 적힌 그러한 중심어, 또는 다소 긴 부제의<햄릿 -분신놀이>는 공연에 관한 명쾌한 답변을 제시하며,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관객에게 정확히 밝히고 있다. 올해 현재까지 올려진<햄릿>4편 즉, 극단 反의 제1회 反 공간 실험제 중 첫 작품인 <간이역 -END>, 극단 열린 의 오순한 연출<데프로마시옹1' 햄릿'>,연희단거리패 혹은 이윤택의<햄릿>그리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김현묵 작/연출의 <햄릿 '침실에서>의 네 작품 모두 다 본 관객으로,<햄릿-침실에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현재까지 올려진 네 작품의 특징은 모두 원작을 기초로 재구성된<햄릿>이며, 극작가 및 연출에 의해 정전인 셰익스피어의<햄릿>을 재해석한 작품들이다. '재구성'과 '재해석'의 특징을 갖는 네 작품의 다른 공통점은 그 표현이 '실험극'의 형식을 갖고 있고, 원작의 구성과는 차별을 갖는 구성과 함께, 원작이 표현하지 못한 부분을 임의 확대해석한 재해석의 공통점이 있다. 네 작품의 세세한 구성요소의 비교와 재해석 상의 차이점, 관객들의 반응과 문제점 등은 나중 기회에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김현묵의<햄릿-분신놀이>를 두 번째 본 후 정리를 통한 극단 예성동인의<햄릿- 분신놀이>를 이야기를 하고싶다. 이 공연의 특징은 단 세 명의 배우가 무대를 활보하지만, 결코 그들의 숫자가 연희단거리패의<햄릿>보다 적지 않고, 무대가 비사실적 요소로 가득차 있는 텅 빈 상태일 수 있지만 연극이 설치미술과 만나 , 가득한 상징을 중심으로 텅 빈 공간을 가득메워주고 있는 '연극적 연극'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을 것이다. '연극적 연극'이라는 것이 다시 전면에 들어설 정도로 연극은 이미 [연극]이 아닌 현실에처해 있다. '무식한 관객'이니, '관객 없는 극장'이니 하는 것들도 사실 그 원인이 과연 어디에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더 이상 공부하고 탐구하려하지 않는 연출과 배우, 나 연출 입네하고 ,나 배우이네 하고 폼만 잡는 일부 배우들과 함께, 타 매체에 어슬렁거리다 친정이랍시고 일년에 한 두어 번 나들이하는 겸 '연극'을 하는 일부의 '연극인'에 의해 이미 '연극'은 [연극]이 되지 못하고, 관객은 나날이 줄어가건만, 대학에서의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는 학생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 이상 김해경 선생이 살아 지금 이 상황을 다시 본다면 그의 시에서 말하신 '이상한 가역반응'을 다시금 이야기하실 것으로 개인적으로 생각한다.'연극영화과'이지 영화연극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극인의 자존심은 영화의 금전만능,스타 시스템에 이미 시꺼멓게 물들어버려진 것 같다.
마치 그러한 현재 풍조에 유유자적 지고 높은 자존심을 챙기며 배를 곯고 있는 이 땅에 살아남은 참다운 [연극인]은, 이미 그 이름을 호명하며 손가락을 꼽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희귀존재 또는 천연기념물 아닌 천연기념인 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월간연극 1999년 10월 호에 기고한 김현묵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연극' 속에는 '먼저 연극인들 스스로가 자성해야 한다' (중략)..'우선 각 극단들이 초심을 회복해야 한다' (중략)...'남편은 아내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관객은 연극인들 하기 나름이다. 날이 갈수록 '참을 수 없는 존재'로 치닫는 관객 층을 극장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방법은 '관객도 교육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 그로토프스키는 말한다. "우리에게는 의식 있는 관객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다. 가볍고, 웃기고, 한번 씹고 버리는 그런 문화를 원하는 관객들의 의식을 우리가 깨어주어야 한다. 이건 전쟁이다. 보이지 않는 전쟁.연극이 본래 지닌 진지성과 축제성을 갖춰 나가면서 연극을 보게끔 교육시켜야 한다.(중략).... 우리들의 일그러진 연극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지 오늘부터 면벽(面壁)의 시각을 가져보자' 고 적고 있다.
김현묵 작 연출의 <햄릿-분신놀이>는 작년<햄릿-침실에서>란 제목으로 조병진 교수에 의해 먼저 무대에 올려진 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난해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볼거리의 제공과 생각하는 것이 있어 모두 네다섯 번의 관극을 시도했지만, 이해되는 것과 보여지는 것 차이에는 많은 거리감이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 당시 마지막 날 공연에서 극작가인 김현묵은 '꼭 다시 이 작품을 내 연출로 무대에 올리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는 아주 멋지게, 그리고 단 한 방에 날려 버린 것이다.<햄릿-침실에서>는 무대에서 표현하지 못했던 '놀이'개념과 "진지한 축제성"을 갖고 있다. 또한 말하고자 하는 작/연출의 '넌 나에게 무엇인가 , 난 너에게 무엇인가 사랑이여! 그대 이름은 고독하다!'는 것을 명확히 무대에서 단 세 명의 배우를 통하여<햄릿>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 위대한 성취, 연극의 자존심으로 다시금 일어서는 투철한 예술 혼의 꺾쇠에 갇힌 [연극]을 관객들에게 남김없이 선사한 위대한 영웅적 그의 모습은 너무도 전사 같은 , "'빡빡 깎은 머리의 우스꽝스러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비극적이다!" , "너무도 비극적이다!" 1963 년 생의 중년의 나이에 그의 빡빡 깎은 머리 모습은 차라리 비극적이다. 전쟁을 하고 있고, 총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음과 함께 , 그는 자신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무대에서 작품으로 실현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머리는 "'빡빡 깎은 우스꽝스러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넌 나에게 무엇인가 , 난 너에게 무엇인가 사랑이여! 그대 이름은 고독하다!'는 차라리 햄릿이 오필리어가 되고, 햄릿이 햄릿의 분신이 되는 것보다, 이 땅의 한 진실한 예술 혼을 갖춘 꺾쇠에 갇힌 [연극]인이 [연극]을 사랑하는 것은 고독하다! 는 절규를 보게 한다. '연극은 인생의 본질을 거울에 비추는 행위와 같다'는 것은<햄릿-침실에서>에서 극작가 겸 연출가인 김현묵이 갖고 가는 '분신'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그러한 '분신'과 '거울'이 상호 소통하여 교환될 수 있음을 극과 연결하여 말해 줌으로써, 일부 관객이 갖는 '실험극은 난해하다'에서 그 문제되는 '난해'를 가장 설들력 있는 극중 이해를 통해 "관객에게 진지하고 유쾌하고 연극답게!" 풀어주고 있는 연극이 바로<햄릿 -침실에서>이다. 그가 관객에게 그러한 '분신'과 '거울'이 바로 하나임을 명확히 알려주고 , 이해시켜 설득력으로 다가서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반복과 극중극의 기법을 통해서이다. "반복과 두 번의 극중극"의 사용에서 관객은 재구성되고, 재해석된 , 단 세 명의 배우를 통한<햄릿>실험극의 형식을 만나면 서도 , '난해한다'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대신 '너무도 유쾌했다' , '즐거운 연극이었다' 혹은 '연극다운 연극을 봤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사실 관객이 주로 사용하는 '난해하다'는 말은 배우들과 연출 그리고 극작가들에게는 치욕으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나, 일부 연극인들은 마치 그것을 무슨 훈장처럼 여기고 있는 듯 하다.
'연극을 제대로 설명했으면, 보여 주었으면 , 연극다운 연극을 만들었으면 난해 하다는 말을 제가 왜 합니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일부의 찬동에 의한 매너리즘에 빠진 연극인들이 모여 서로 밀실 정치처럼 속닥거리다 급하게 올려지는 일부의 '연극'은 모처럼 대학로를 찾은 관객들에게 실망을 안길 뿐이며,
그들이 다시 극장을 찾지 않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그런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것을 자랑하듯 우쭐거린다. 결국 인구에 회자하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그래서 우린 다 모르고..'의 반복이 되는 것이다. 김현묵 작/연출의<햄릿- 침실에서>는 그러한 '반복과 극중극" 기법의 사용이외에도 소설적 구성의 보편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수미쌍관법' 즉, 처음과 끝이 같은 , 프로로그와 에필로그가 같은 구조의 형식으로
왕비가 햄릿을 독살하는 설정을 프롤로그에서 암시하며,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다시 반복 재현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한 "암시와 반복, 그리고 재현의 수미쌍관법" 구성으로써 극이 반복되는 소설적 흥미 또는 재미와 함께 연출이 갖고 극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강조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다 쉽게 그러한 연출과 극작가의 숨은 메시지를 무대에서 표현하고 있고 관객들은 그러한 기법을 통해 자연스러운 이해와 객관적 설득력으로 배우를 통해 전해지는 극 내용의 이해와 함께 감동이 오는 것이다. 그러한 소설적 구성이 갖는 특질로써의 재미와 흥미는 기타 연극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배우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대사가 갖는 웃음 유발과는 다른 차원의 웃음과 페이소스를 관객들에게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다. 원전의 재해석과 재구성을 통한 실험극의 형태이기는 해도 김현묵의<햄릿- 침실에서>는, 셰익스피어 대사가 갖는 황금같이 변치 않는, 씹고 씹어도 언제나 단물이 흘러나오는, 주옥같은 명 대사가 극작가 김현묵의 "노련한 언어의 황금조율사"의 손의 의해 세련된 배우의 입에서 토해질 때 ,객석은 모두 한탄을 하고 감탄을 하고 발을 구르는 것이다. 그런 그의 대사의 특징은 "삼단논법과 변증법의 정반합의 형식"을 갖고 관객을 울리고 웃기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셰익스피어 대사가 갖는 "황금언어율"을<햄릿-침실에서>라는 재구성과 재해석을 실험극으로 진행하면서도 천하의 셰익스피어가 갖는 언어 조율의 우수성을 제대로 제 맛을 살리고 윤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맛깔 나는 대사를, 재구성과 재해석된 자신의 작품으로 소화하면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작품 속에 유지하고 있음에서 올 해 올려진<햄릿>네 편의 작품 중 단연 그 부분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햄릿>의 재해석의 과정 중에서 무대에 올려진 네 편의 작품 중에서 원작자인 셰익스피어가 갖는 '남성적 글쓰기'와 가장 가까운 형태의 시선을 견지한 것은 오순한 연출의<데프로마시옹Ⅰ '햄릿'>에 나타난 '여성중심주의 시각' 혹은 '여성적 글쓰기'와는 사뭇 대조적이어 서로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이다.

<햄릿-분신놀이>중 극중극 '곤자고의 시해'와 극작가 겸 연출가 김현묵이 원작과는 다른 또 한 번의 극중극 '어긋난 시선'을 극중 삽입한 것은 그가 부제로써 말하고자 한 '넌 나에게 무엇인가 , 난 너에게 무엇인가
사랑이여! 그대 이름은 고독하다!'에서의 '어긋난 시선'의 결과로 그 사랑이 고독함을 다시금 강조하는 기법이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그건 밀란 쿤데라의 소설처럼 "에세이적 소설"을 말하는 것으로, 소설처럼 재미있고 에세이처럼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삶의 성찰을 제공하는 연극이 바로 [연극]인 것이며, 또한 그것은 꺾쇠에 갇혀 다른 연극과 비교되는 [좋은 연극]이다. 김현묵 작/ 연출의<햄릿-침실에서>는 "소설처럼 재미있고 에세이처럼 무겁지 않고 삶의 성찰을 이야기해 주는 연극다운 [연극] [좋은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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