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밤필로프 '출림스끄에서의 지난여름'

clint 2016. 2. 15. 12:44

 

 

 

 

 

「출림스끄에서의 지난여름」은 1974년 볼쇼이 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진 이래 공연 때마다 대성공을 거두어 온 작품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밤필로프의 요절이 소련 현대 연극에 얼마만한 손실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1977년의 경우 세 극장 중 한 극장 꼴로 수천 번이 상연되었다. 알렉산드르 밤필로프 (1937~1972)는 이르쿠츠크 대학 역사철학 부를 졸업한 후 끄라스노야르스끄 둥지에서 기자 생활을 했는데, 이것은 후일 그의 문학에 귀중한 경험을 제공했다. 밤필로프는 유머러스한 단편집 한 권을 출판한 뒤 연극으로 전향하여 1972년 익사할 때까지 의욕적인 창작 활동을 했다. 1962년 단막극 「천사와의 20분」을 발표한 이후 「들판이 보이는 집」(단막 코미디, 1964), 「유월의 이별」(2막 코미디, 1965), 「장남」(2막 코미디, 1967), 「오리 사냥」(3막극, 1967), 「식자공과의 사건」(단막, 1972), 「출림스끄에서의 지난여름」(2막, 1972)이 뒤따른다. 따라서「출림스끄에서의 지난여름」은 밤필로프의 마지막 희곡이다.

밤필로프의 문학 경력은 체호프와 유사하다. 즉 유머러스한 단편 작가로 데뷔하여, 처음에는 단막 희곡을 집필했고, 마침내는 단편과 짧은 희곡의 기능을 통합하는 완전한 길이의 희곡을 집필하게 되는 점이 그러하다.

 

 

 

「출림스끄에서의 지난여름」에서는 시베리아의 한 조그마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몇몇 인물의 삶이 점진적이고 겸허하게 서로 단절된 부분들이 맞물리게 될 때까지 되는 대로의 평온무사한 길을 따르게 되고, 이 사이에 체호프적인 긴장감이 제고된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감정적인 갈등의 하나는 찻집(식당 또는 선술 집)외 주인 부부, 아파나시와 안나 - 와 안나의 난폭한 사생아 빠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체호프보다는 입센이나 고리끼류의 사악한 가족을 연상케 하는 것이지만, 이 세 사람의 관 계에서는 어느 순간에라도 폭발할 수 있는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다. 두번째 관계는 어떤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관계에서 는 찻집의 베란다 방에 살고 있는 경박하나 지능적인 이혼녀 지나 와 고통을 받고 있는 예심 판사(우리 식으로는 형사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블라지미르 샤마노프가 중심이 되고 있다. 첫 번째 관계에서 안나가 사생아 빠시까로 인하여 부담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샤마노프 또한 차 사고를 낸 저명인사의 아들을 재판에 회부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실패한데 대한 무력감과 부담감을 안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자기 스스로를 파멸시키고자 권총을 휴대하고 다닌다. 밤필로프의 희곡에는 총이 곧잘 등장한다. 이것은 체호프가 보여 주는 멜로드라마적인 총의 모티브를 연상시킨다. 총은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격발되지도 않고 아 무도 다치지 않는 까닭에, 총은 밤필로프와 체호프와의 연관성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체호프와는 또 다른 점을 보여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두 관계를 잇고 있는 인물이 발렌찌나이다. 그녀는 젊고 매력적이며 수줍음을 잘 타는 아름다운 여자이다. 그녀 역시 체호프의 인물을 연상시키는 행위를 하는데, 그것은 정원의 쪽문을 고치는 일이다. 이 일은 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에 영원히 계속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쪽문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질서 및 안정성 - 심지어는 주변의 도덕성에 이르기까지 - 을 회복하려는 그녀의 희망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이로 인하여 그녀는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긍정적인 인물이 된다.

 

 

 

연극적인 갈등은 지나와 빠시까가 발렌찌나와 샤마노프 사이에 로맨스가 있음이 명백한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에 생성된다. 그러나 발렌찌나와 샤마노프의 관계는 엄밀히 표현하자면 발렌찌나의 남자에 대한 관심의 표현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인다.

사악한 감정의 메커니즘은 질투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진다. 발렌찌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빠시까는 샤마노프와 대립하게 되고, 지나도 발렌찌나와 샤마노프 사이에 사랑의 싹이 트는 것을 보고 음모를 꾸민다. 이것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희곡 「전원에서의 한 달」을 연상케 한다. 지나는 샤마노프에게서 발렌찌나를 떼어놓기 위해 그녀를 메체뜨낀과 결혼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 것이다. 결국 빠시까를 달래기 위해 발렌찌나는 그와 함께 근처 도시의 댄스파티에 가기로 동의해 버린다.

이 희곡에서 가장 큰 긴장감은 1막에 나오는 빠시까와 샤마노프의 사건 이후에는, 뽀미갈로프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와 발렌찌나가 누구와 함께 있었느냐고 물을 때 조성된다. 아버지의 분노가 폭발할 가능성올 알고 최악의 상태를 염려한 발렌찌나가 메체뜨낀 (아버지가 결혼시키려고 하는)과 함께 있었다고 선언하여, 예상된 폭력의 가능성은 무산된다. 다음날 아침 장면은 전형적인 체호프식의 반(反)클라이맥스로, 체호프적인 '출발' 장면이 뒤따르게 된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등장인물들은 떠나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으로 구분 되는 것이다.

밤필로프는 독창성이나 자극적인 면에서 스탈린 시대 이후의 극작가로는 바실리 악쇼노프와 함께 정상에 군림한다. 밤필로프의 스타일은 19세기 러시아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그는 체호프의 후예라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독특한 경향을 정립한 훌륭한 극작가이다.

 

 

 

 

 

늙은 이르쿠츠크 원주민 예레메예프와 젊은 히로인 발렌찌나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이미 초장부터 체호프 적 드라마의 전형적 분위기를 연출해내고 있다. 대수롭지 않은 자잘한 일상의 부침 속에 사람들이 제각기 생각하고 느끼는 아픔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은 나름의 독특한 성격과 심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네들이 고유하게 지각하는 삶의 감정은 시베리아 소도시의 비루한 일상에 파묻혀 소소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드라마는 예레메예프와 발렌찌나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어 곧 주요 인물들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타이거 지역의 소도시 출림스끄에 위치한 한 찻집을 배경으로 모여드는 인물들은 크게 가족의 축과 연인의 축으로 구분되는데,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로 찻집 여주인 호로시흐와 그녀의 남편 제르가체프 및 그들의 아들 빠시까가 있다. 그런데 이 가족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심히 삐걱거리는 가족이다. (북유럽 드라마의 '가족의 비밀' 모티브) 결혼 전 호로시흐는 제르가체프와 약혼한 상태에서 그가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빠시까를 낳았던 것이다. 때문에 빠시까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제르가체프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괴롭히는데 집착하고 있으며, 호로시흐는 그녀 나름대로 자책감에 사로잡혀 남편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더구나 여름을 지내기 위해 귀향한 빠시까는 두 부부 사이의 불화를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빠시까라고 이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다. 기실 그는 어머니가 있는 출림스끄에 안착하고 싶어 하지만, 의붓아버지와의 소원한 관계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그의 심사를 크게 뒤틀어놓고 만다. 다른 한편, 연인의 축의 중심에는 샤마노프와 까시끼나(지나)가 있다. 다소 분방한 이혼녀인 까시끼나는 샤마노프에게 애정을 갖고 그의 마음을 사고 싶어 하지만 샤마노프의 태도는 무척 방어적이다. 도시의 예심판사인 샤마노프는 어딘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을 감춘 듯 보이고,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까시끼나에게 끊임없이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는 도시에서 어느 유력자의 아들이 차로 사람을 치어죽인 사건을 제대로 기소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 출림스끄로 왔기 때문이다. 까시끼나는 어떠한가. 그녀도 나름대로 고민과 고통이 있는 여자다. 유연하게 남자에게 이야기를 유도해가는 품세와는 달리, 그녀는 언제나 불운이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믿는다.

이 출림스끄의 찻집에 모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대체적인 인격적 특질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어떤 아픔 - 소위 '사연'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아픔 - 사연의 유/무 및 친/소 관계가 주요 인물의 자격을 결정짓는 작용소가 된다. 왜냐하면 가족의 축과 연인의 축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요인에 따라 그네들의 극적 밀도가 결정지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레메예프는 술에 절어 상대방의 말을 무력하게 반복하기만 하는 주변 인물이지만, 그 역시 아픔 - 사연(지질학자들을 안내하며 보낸 젊은 날의 노동을 증명하지 못해서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된 사실, 도시로 떠나간 아내와 딸을 찾지도 못하는 사실)을 지니는 이유로 출림스끄의 인간 군상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반면, 발렌찌나의 아버지 뽀미갈로프와 그녀의 구혼자로 나서는 메체뜨낀은 외양이 곧장 내면의 형태로 직결되는 유형들로서, 비속함만을 드러내며, 해서 드라마의 중심축에 대해 별다른 접근성을 갖지 못한다.

 

 

 

 

1970년경 밤필로프가 이 드라마의 초안을 잡았을 때의 원래 제목이 "발렌찌나"였던 데서 알 수 있듯, 이 여인은 드라마 전체의 중심인물이자 가장 긍정적인 인물상이다. 겁 많고 순박한 성격의 이 아가씨는 드라마의 초반부터 줄곧 찻집의 화단 일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는데, 사람들이 쪽문을 열고 지나가거나 혹은 돌아가는 수고를 하는 대신 마구 가로질러 가는 탓에 쪽문 문짝이 늘 망그러지는 탓이다. 마치 상처받은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암시라도 하는 듯한 이 '늘 망가지는 화단'은, 그러나 발렌찌나의 애정 어린 보수 의지로 언제나 원상태를 회복한다. 따라서 이 화단은 질서와 안정성, 발렌찌나를 둘러싼 도덕적 구조의 부여 행위 등이라 부를만한 것으로, 극중 인물들이 행위자 발렌찌나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무대장치라 할 수 있다. 발렌찌나의 끊임없고 지칠 줄 모르는 보수 행위는 샤마노프의 발사되지 않는 총알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인 실제적 행동이다. 즉, 그녀야말로 드라마 전개를 통해 유일하게 행동하는 인물임을 지시하는 계기가 화단의 보수인 것이다. 또한, 샤마노프 등의 인물들이 과거 - 드라마의 前史로서 암시되는 - 의 질곡에 얽매여 현재를 낙담하며 소모하는데 반해, 제2막에서 발렌찌나가 겪은 불미스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여전히 화단 손질로 드라마를 끝맺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 곧, 무상한 일상의 부침 가운데 파헤쳐지고 훼손되는 화단은 계속해서 가꾸어지고 복원됨으로써 삶의 낙관과 희망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예레메예프를 제외하고) 애초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화단일은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이끌어내는 변화의 영역인 화단은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하고 대화하는 교차점이자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 진 자신을 드러내는 변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변화라는 것이 각 인물들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으며, 그 진정성이 자못 의심스럽다는 점, 또 이후의 삶이 열린 채로 남아있어 어떻게 진전될지 단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러 해석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말이다.

 

 

 

가족의 축이 어느 정도 외적인 배경 역할을 맡는다면 연인의 축은 또 다른 연인 테마의 선분을 파생시켜 나간다. 의기소침해 있는 샤마노프에게 호감을 갖는 발렌찌나에게 빠시까가 연정을 품게 되고, 샤마노프를 잃을 것이 두려운 까시끼나에 의해 충동질 당한 메체뜨낀이 다시 발렌찌나에게 구애하며, 여기에 그녀의 진심을 알아챈 샤마노프가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이중삼중으로 겹쳐지는 연인의 축은 드라마를 절정으로 치닫게 만드는 운동-관계의 축이다. 샤마노프를 향한 발렌찌나의 호의에 분개한 빠시까의 협박은 둘 사이의 불발탄 소동으로 비화되며, 2막부터 뒤늦게 그녀의 사랑을 깨달은 샤마노프 및 뽀미갈로프에 의해 사윗감으로 공식 인준을 받은 메체뜨낀이 사랑의 대오에 가담함으로써 이 구도는 더욱 급격하게 돌아간다. 발렌찌나는 빠시까를 달래기 위해 함께 댄스파티에 가기로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샤마노프는 밀회의 쪽지를 그녀에게 보내고 이는 곧 까시끼나에게 들통 난다. 한편 발렌찌나를 찾는 메체뜨낀은 샤마노프를 뒤쫓아 다니며, 우여곡절 끝에 발렌찌나를 만난 샤마노프는 다시 빠시까와 격돌을 벌인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뽀미갈로프가 (샤마노프든 빠시까든 자기 사윗감을 훼방한 작자를 박살내버릴 기세로)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대 파국으로 치닫기 일보직전까지 나아가는데, 누구와 함께 있었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샤마노프와 빠시까는 모두 자신들이라도 외친다) 뜻밖에도 발렌찌나는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아닌 메체뜨낀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사건은 갑작스럽고 어이없게 종결돼 버린다. 발렌찌나가 어느 쪽이든 한 사람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애증을 뚜렷이 구분하고 기존의 얽힌 관계를 일거에 풀어버리리란 기대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모두는 완전한 어둠 속에 침잠해버리고" 마는 것. 결국은 이렇게 '사건 없음'으로 또는 충분히 의미 부여받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고사해버린 사건', 잔뜩 부풀려진 긴장감에 비해 너무나도 사소하게 연소해 버린 '사건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이야말로 가장 '놀랄만한' 결말 방식이며, 그런 뜻에서 밤필로프를 체호프 적 극작가의 대열에 포함시키는지 모르겠다. 한낱 변경의 소도시에서 하루밤새 벌어지는 일상인들의 아웅다웅거림이 무슨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발사되지 않는 권총은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라 그만큼 사건화 되기 어려운 일상의 미소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물증일 터이다. 제각기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비슷한 인물 군상이 맞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상황 및 행동은 그네들의 말이 담아내는 심각하고 엄중한 무게를 실어낼 수 없다. 말은 언제나 의미의 과잉으로 넘쳐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삶의 진실은 체험적 감수성의 정도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안고 있는 아픔과 사연 하나하나는 그네들에겐 실존 자체를 짓누르는 존재론적 굴레로서 지각되겠지만, 기실 그것들이 충돌하고 한데 합쳐지게 될 때엔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가볍고 소극적인 것이 되어 버리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밤삘로프가 이 드라마를 희극으로 의도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긍정적 인물로서의 발렌찌나가 명확하고 충분하게 묘사된 때문이다. 게다가 곳곳에서 마주치는 체홉의 기억이란, 이 드라마의 상황 설정이 일상의 정경 채취에 치우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정조를 다분히 묵직하게 만들어 준다. 이는 아마도 모두가 떠나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인물들은 자기들의 아픔과 사연을 온전히 떨어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떠남으로써 다른 생을 점쳐볼 도리밖에 없다. 그 중에는 어머니의 애원을 못 이겨 떠나는 빠시까 같은 이도 있고, 타이거를 비롯한 토착지에 대한 친근함을 찾아 떠나는 예레메예프도 있다. 그리고 샤마노프는 이전의 재판을 속개하러 도시로 가려 들지만, 이는 어떤 확고한 의지와 결의가 정해진 결과는 아니다. 그는 '그저' 떠나보려 한다. 그러나 <벚꽃 동산>(1903)을 연상시키는 이 결말은 또한 마찬가지로 비극이 아니다. 망그러진 울타리를 다시 세우는 발렌찌나의 묵묵한 의지, 그녀의 지속적인 노력이 "완전한 어둠"의 밤을 상쇄하는 아침의 희망이 되어주는 까닭이다. 단순히 내몰린 상태에서의 길 떠남으로부터 막연하지만 가고자 하는 분명한 의사를 표명하기까지 어떻게든 변화된 모습을 연출하게 되었음에도, 아직까지는 쪽문을 일으켜 세우는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은 이제 갓 시작된 새로운 삶의 가닥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단초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끝나도 삶은 계속되듯이, 무대를 떠나간 등장인물들의 무대 밖 삶은 지속될 것이며,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굴러갈지는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