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은 도입에 닥터 잭이 아름다운 아내 콘스탄스를 소홀히 하고, 콘스탄스의 여자친구인 요염한 모습의 마리와 바람을 피우는 사실을 가지고, 장모와 처제인 마샤, 그리고 친구 바바라가, 콘스탄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논란을 편다. 마침 콘스탄스의 여자친구 마리가 등장하고, 닥터 잭과 마리는 가족이 자신들의 불륜사실을 모르는 줄 알고 밀회를 약속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돌연 아내 콘스탄스의 남자친구인 훤칠한 미남에다가 품위 있고 예의 바른 신사 버나드가 15년 만에 콘스탄스를 찾아온다. 버나드는 아직도 콘스탄스를 사랑하고 있음을 콘스탄스에게 은밀히 고백한다. 닥터 잭은 마리와의 밀회를 즐긴 후 마리의 침실에 닥터 잭의 이름이 새겨진 담배 곽을 빠뜨리고 오는 잘못을 저지른다. 담배 곽을 발견한 마리의 남편은 아내의 불륜사실을 갈파하고, 닥터 댁의 집으로 예고 없이 방문한다. 마침 마리와 바바라도 콘스탄스 집을 방문하고 있던 참이라, 잭은 장모와 처제가 있는 면전에서 마리와 함께 마리남편에게 낭패를 당하기 일보직전에 이른다. 바로 이때 콘스탄스가 외출에서 돌아오고, 이러한 광경을 목도한 콘스탄스는, 마리의 침실에 둔 담배 곽은 자신이 놓고 온 것이라며, 천연덕스럽게, 잭과 마리의 불륜사실을 앞장서 은폐해 주고, 두 사람의 결백을 주장함으로써, 마리남편의 의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정중한 사과까지 하고 떠난다. 닥터 잭과 마리는 일촉즉발의 위기로부터 콘스탄스의 지혜와 재치로 구함을 받게 된다. 닥터 잭과 마리는 콘스탄스 앞에서 고개를 바로 들 수 없는 처지와 입장에 놓이게 된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목격한 버나드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콘스탄스에게 청혼을 한다. 콘스탄스도 버나드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말하지만, 이혼만은 절대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버나드와 영원한 친구사이로 평생 우정을 지속하기로 약속한다.
시간이 흐르고 콘스탄스는 괜찮은 직업을 택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다. 휴가철이 다가오자 콘스탄스는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남편 잭에게 6주간 집을 비우겠노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버나드와 함께하기로 한 여행이라고 고백한다. 닥터 잭의 노발대발이 극점에 이르렀을 때 돌연 버나드가 등장한다. 닥터 잭이 버나드에게 항의하려는 순간, 버나드는 자신이 당분간 여행을 떠날 것임을 잭 부부에게 알리려고 방문했음을 밝히고, 혹시 콘스탄스가 유럽을 방문하면, 자신에게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고, 두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버나드는 대기하고 있는 차에 몸를 싣는다. 닥터 잭은 오해가 풀려, 콘스탄스를 예전보다 더욱 사랑하고 있고, 자신의 평생사랑은 콘스탄스 뿐이라고 고백한다. 콘스탄스는 그 말을 믿겠노라고 답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버나드의 차에 동승하기위해 집을 떠나는 것으로 연극은 끝이 난다.

무대 위에 오른 공연물이라는 하나의 객관적 사실을 놓고 말하면 여인극장의<아내란 직업의 여인>은 희극으로 되어 있지 않다. ‘로라’를 패러디한 듯한 이 가정적 일상생활의 한 단면은 풍속극다운 면이 더 강해서 여권신장론자의 비위를 긁기 알맞은 것이다. 부도덕한 남편에 맞서 부정을 저질러도 변명할 여지가 없이 상황을 만들어 나가는 여인은 냉정하게 계산된 복수를 실천한다. 그 술수는 위선의 폭로와 위악의 프로세스 때문에 충분히 코믹해질 수 있는 구성을 지닌다. 남성의 허장성세와 턱없는 자부심을 건드려 가며, 기대감의 배반으로 설정된 그 희극적 충격은 연출의 임의적 해석과 연기자의 미숙 때문에 원점의 의미에서 꽤나 멀리간 표현이 된다.''

10여 년을 같이 살다 보면 생기기 쉬운 공허감의 극화라고 부를 수도 있는<아내란 직업의 여인>은 그 따분함을 외도라는 모험으로 달래는 남편과 주변의 인간관계에서 형성되는 상황의 변화를 활용한다. 그런 경우 거짓된 남편과 맞서는 정숙한 여인의 대비는 그런 역학 관계를 형상화시킬 만한 연기력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가사를 놓고 있는 중년여인은 남자를 위한 고급 창녀이다. 남편은 부도덕하니까 자신도 따라서 남편을 속이고, 부정직해지는 아내는 창녀와 같다는 ‘콘스턴트 와이프’의 주지는 남편의 탈선을 창녀에 들인 비용으로 간주하여 이를 용서하고 그에 값할 만큼 성실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력으로 돈을 벌어 방값과 식대를 물어 주고 나서, 독립된 자유인으로 떳떳이 부정으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하는 이 ‘노라’의 재치는 결혼을 좋은 직업으로 간주하는 작가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의 비정한 페미니즘을 대변하는 것이다.

여인극장으로서는 오래간만에 극단 이미지와 일치하는 작품을 고른 셈이고 극단의 수준으로 봐서는 특별히 질이 떨어지는 공연도 아니지만, ‘말의 극화’에 눌려 드라마의 극화가 딸린 이유가 말의 중압으로 인하여 굳어지고 죽어나는 연기와 몸짓 때문이라면 결국 그만큼 몸으로 체연해야 하는 연기력의 부족은 무대 위의 불안을 커버할 길이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잠시 선을 보인 물티모어 역 김옥환의 자신 있는 움직임의 동작이 믿음직스럽다. 연기력의 미숙과 불안은 물론 신선한 맛을 줄 수도 있다. “여성을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 속에서의 여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여성 표현에 주력했다” (연출 강유정씨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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