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버나드쇼, '오로라를 위하여'

clint 2015. 11. 29. 17:55

 

 

 

 

 

이 작품의 원작은 그의<그는 그녀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했는가>라는 희곡 작품이다.
원작자 '버나드 쇼'는 1925년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영국의 매우 유명한 극작가.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의 지주계급으로 권력층에 속하지만, 사업에 실패하여 매우 가난한 20대를 보냈다고 한다. 가난하지만 귀족인 집안 분위기에서 청년기를 보낸 그는 세상을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눈을 갖게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문학활동 초기에 입센 문학을 연구하고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입센의<인형의 집>이라는 희곡이 기억에 생생한 건 아니지만, 여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통해 기존의 여자들이란 존재가 마치 인형이라고 느끼고 한 인간으로 자립하기 위해서 집을 나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이것만 봐도 입센은 당시 사회의 구조를 부정하고 비판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귀족 아닌 귀족으로 살아와 이러한 현실을 더 절실히 느꼈을거라 짐작되는 버나드 쇼 역시 작품으로 그러한 당대의 현실을 비판했을 것이다.
이 작품<두 남자를 사랑하는 법>에서 그러한 현실의 모순적인 모습이 역시 드러난다.
작품은 18세의 잘생긴 청년 '헨리'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이지만 유부녀인 '오로라'와 극장에 가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아오고, 오로라는 헨리가 그녀에게 바쳤던 시를 잃어버려서 남편에게 자신의 부정이 발각될까 두려워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헨리는 오로라를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사랑을 믿고 결혼을 하자고 하지만, 현실과 지금 가정의 평화를 깨뜨릴 생각이 없는 오로라는 그 청혼을 거절한다. 그 때문에 헨리는 크게 상심하고, 오로라는 그런 헨리에게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 상황에 오로라의 남편(밤퍼스)이 나타나고, 오로라가 없는 사이에 그는 자신의 여동생이 자신에게 오로라가 잃어버렸던 시를 가지고 있다며 헨리에게 그 시를 보여주게 준다. 헨리는 그 시는 다른 오로라를 대상으로 쓴 시라며 밤퍼스에게 거짓말을 하지만 밤퍼스는 여태까지 자신의 부인(오로라)을 사랑하지 않았던 남자는 없었고 그 남자들이 모든 헨리보다 멋진 남자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헨리의 말을 믿지 않고 화를 내며 격투를 벌인다. 이 격투 장면에서 밤퍼스와 헨리는 서로의 옷을 하나씩 벗어버리며 서로 도망치고 잡으며 격투를 벌인다. 이때 뒤늦게 나타난 오로라가 싸움을 말리고, 거짓말에 지치고 화가 난 헨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밤퍼스에게 욕을 하며 자신의 진실을 털어놓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고 그 시를 쓴 대상이 바로 밤퍼스의 아내 오로라라는 것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밤퍼스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자신이 오히려 매력적인 부인을 가진 자긍심으로 기분이 좋아져 오히려 화해를 청하고 헨리에게 이 멋지고 아름다운 시를 책으로 출판하자는 제의를 하게 된다. 아무런 반항할 힘조차 없는 헨리는 밤퍼스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이 시의 제목을 무엇으로 하면 좋겠냐는 그의 질문에 헨리는 '그는 그녀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했는가?(How He Lied To Her Husband?)'라는 말을 남기면서 연극은 막이 내린다.

 

 

 

나는 이 연극을 보며 화가 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첫째로 이 연극의 주인공인 밤퍼스 부인(오로라)에게 화가 났다. 오로라는 처음부터 헨리와의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현실을 포기하거나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오로라가 헨리에게 남편에게 거짓말을 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절정이었다. 그건 정말 오로라의 헨리가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이용하는 것 같은 극단적인 이기심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로라는 정말로 헨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 그들이 사랑하도록 만들며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즐기는 것 같다.
둘째로는 오로라의 남편인 밤퍼스 씨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낭만적인 모습이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부인의 가치를 몰라준다며 난폭한 모습의 괴팍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부인과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를 화내고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헨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에 화를 내며 격투를 하지만, 그가 화를 내는건 헨리가 오로라에게 시를 바친 것 보다 시를 바쳤다는 사실을 숨기는 그 사실에 화를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을 말했을 때는 오히려 오로라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시를 출판하자로 제의를 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밤퍼스는 오로라를 정말로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너무나 사랑해서 그 모든 것을 다 포용할 만큼 사랑하는 것일까. 내 생각엔, 밤퍼스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가 자신의 부인이라는 그 사실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밤퍼스 역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격투장면은 작품 안에서 가장 의문점이 많은 장면이었다. 일단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밤퍼스씨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고 흥분되고 격한 상황이 고조되어가는 것을 묘사한 장면인지 아님 관객들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한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밤퍼스와 헨리는 속옷 한 벌만 남기고 몽땅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다시 떠올려보면 그들은 화가나서 옷을 던져 버리는 것도 아니고 서로 하나씩 벗어서 탁자나 하프 위에 곱게 올려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다.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아마도 '옷'이라는 건 단지 격식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현실적으로는 아름다운 아내를 둔 밤퍼스와 어떤 남자도 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오로라이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순수청년 헨리이지만, 결국 그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본 그들일 뿐이다. 뒤에서 본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쉽게 바람을 피우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유부녀에게 정렬을 불태우는, 윤리적인 잣대로는 그 누구하나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어이없는 캐릭터를 가진 인물들이다. 그들이 옷을 곱게 벗어놓고 결투를 보이는 어이없음과 같이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제목에 있어서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다.<두 남자를 사랑하는 법>이 이 연극과 통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원제의 제목이 더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잘 드러나는 것 같다.<그는 그녀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는가>라는 말에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더욱 잘 묻어난다고 생각이 된다.

 

 

 

어쨌든 이런 모습이 그 당시의 유럽 사회의 일면이라고 생각한다면 비판적인 요소가 곳곳에 있는 과도기적 사회였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나 여자 주인공인 오로라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 어떤 인생관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자신의 여성성을 발휘하여 남자들로부터 구애를 받고 그것을 즐기면서도 현재의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잃을까봐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될까봐 두려워하고 급기야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거짓말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구질구질한 모습까지 보이는 완전 전근대적인 여성인 것이다. 버나드 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피그말리온(Pygmalion)'에서도 이러한 비판이 상통하는 관점이 보여진다. 이 극은 히긴스가 런던 토박이인 꽃 파는 소녀를 훈련시켜 귀부인 행세를 하도록 하는 과정과 이 실험의 성공이 몰고 온 결과를 보여주는데, 정확한 억양은 익혔지만 예의 바른 대화술은 배우지 못한 엘리자 둘리틀이 상류사회에 등장하는 장면은 영국의 극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이 작품은 1938년에 영화화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쇼에게 안겨주었고, 뮤지컬〈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56, 영화화 1964)로도 각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나중에 오드리 헵번이 영화화한 것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뮤지컬이나 연극에서는 상류사회의 여인으로 변했어도 결국 자신을 그렇게 만든 히긴스의 사랑을 얻지 못한 엘리자가 떠나는 장면이 끝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비판적인 시각으로 실험해보지만, 자기 자신은 꽃 파는 소녀를 받아들이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히긴자의 모습이 당대 사회적인 시각을 인물들이 느끼는 감도는 우리가 생각한 상상이상이었다는 것이 짐작이 된다. 허례허식을 비판하지만 자기자신도 그 속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연극이 다른 연극과 달랐던 점이 있다면, 연극 속에 해설자가 존재하는 특이한 구성과 관객을 참여시키려고 하는 점이었다. 중간에 극이 잠시 멈추면 해설자가 나와서 관객들에게
장면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고 다음 장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연극을 관람했던 곳이 관객이 50명도 채 안들어갈 것 같은 정말 작은 소극장이었기 때문에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는 듯한 기분도 주고 배우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며 연극을 즐길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좋았다. 원작에서도 이러한 것인지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런 형태를 도입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시도는 매우 좋았다고 생각된다. 관객들이 아직은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활발한 토론과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연극이라는 장르는 영화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덜 받는 것 같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건 그만큼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이라는 것은 볼 때엔 다소 과장되고 이해할 수 없음을 느끼지만, 곱씹어볼수록 더욱 생각해 볼 거리가 있는 장르인 것 같다. 눈 앞에서 보여지는 장면이기 때문에 생생하고, 주위를 끌 수 있는 다른 장치가 없이 오로지 인물이 중심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사건이든 인물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연극의 매력이 아닐까? 더군다나 이 연극이 버나드 쇼의 작품이 원작이니만큼 그의 생애와 당시 배경을 통해 유럽의 근대사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의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