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한 작가 오를로프(Olof)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젊은 연인이자 화가인
에밀(Emil)이 나온다.
남편 오를로프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일련의 상황을
희극적인 각도에서 방관하며 아내를 조롱한다. 그는 아내와 불륜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나 내뱉는 사랑의 언어조차 결국 '말의 희극'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자신이 남편으로서 진정으로 아내를 이해하거나 사랑하지 않았으며,
아내 또한 진실된 감정이 아닌 허상에 빠져있었음을 깨닫는 비극적이면서도
냉철한 각성의 순간을 의미하는 제목의 작품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이 작품을 통해 20세기 초 빈 모더니즘(Wiener Moderne)의 시각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감정의 실체를 날카롭게 해부한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진실해 보이는
'말(언어)'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위선과 공허함을 꼬집고 있다.

한국연극은 아직도 최초, 최고의 무엇무엇을 내세운다. 극단 민예의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순간>(슈니츨러 작·임수택 연출, '97년11월 마로니에소극장) 공연에 관한 광고는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초연되는 오스트리아 연극.’ 극단은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작가의 공연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프로그램 속에 작가를 소개한 글이 있고(이 글의 대부분은 최근 번역 출간된 작가의 소설 꿈의 노벨레〉에 담겨있는 옮긴이의 글을 인용했다), 작가의 잠언 모음이 있고, 작품연구가 있고, 비엔나 모더니즘과 작가의 관계에 대한 글이 실려있다. 이 글 가운데 주목할 것은 작가가 살았던, 작품의 배경인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생활의 분위기에 관한 묘사이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장엄한 낙조, 황홀한 멜랑콜리, 화창한 일요일이면 빈의 중심 거리를 가득 메우는 산보객들, 실크 모자에 시가를 문 신사들, 양산을 받쳐들고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귀부인, 쌍두마차, 노천 카페, 매혹적인 커피향, 감미로운 음악처럼 주고받는 대화, 오페라 극장, 연극, 은은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상류 사회 응접실의 커다란 안락의자와 피아노, 거기에다 창문에 길게 늘어진 커튼은 몰락해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혼을 가려주었고, 푹신하게 깔려있는 양탄자는 먹장구름처럼 밀려오는 변화의 발걸음 소리를 빨아들였다.”(프로그램 속에 실린 ‘비엔나 왈츠와 슈니츨러의 윤무’에서 인용) 프로그램에 실린 글은 이런 분위기를 공연 전에 관객들에게 먼저 주입한다. 작가를 음악의 말러, 그림의 클림트, 학문의 프로이트와 등가의 반열에 놓는다.

<우리가…>는 간통한 아내와 사는 남편이 응접실에서 맴돈다.
공연은 상류사회 인물들의 우아함과 내면에 가두어놓은 이야기를 말로만 전하고,
덩어리 큰 화분과 배우들의 의상 그리고 연기 등이 모두 낡고 어설프다.
좁은 무대에 비해 무대장치는 크다.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무대장치는 관객의
상상력을 차단한다. 무대의 공간이 없는 곳에 이야기의 공간은 막혀 있다.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순간은 아내의 외도를 알고도 사회적 체면과 딸의 장래 때문에
10년 동안이나 모르는 체 침묵하던 남편이 딸을 시집보낸 다음 날 아내에게 결별을
선언한다는 내용인데, 아내의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동료에 대한 열등감과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서로 충돌하면서 비틀어 놓은 남편의 꼬인 '말'과,
가정과 사회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믿음으로 사랑의 부족을 메울 수 있다고 믿던
아내의 '말'이 만나면서, '말'이라는 것의 원초적 부정확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말고는 의지할 곳이 별로 없는 인간의 궁색함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비록 시대와 사회 배경은 다르지만 이러한 주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정녕 그것이 보편적 상황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가 정확히 표현되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이 어설픈 번안이나 막연한
정도의 중성화보다는 훨씬 유효하다. 물론 이 공연은 그러한 번안이나 중성화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번역에 있어 완전 우리말이 되어야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철칙이다. 이 공연의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의 일상 회화 관행과 차이가 큰 길고 어색한 문어투와 외국어 번역투로
슈니츨러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 다음의 문제는 그러한 말을 옮기는
배우들의 대사 구사력에서 발생한다. 즉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간간이 표준말
발음과 억양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한 흔적을 드러내 보이는 연기자도 있고,
전형적인 번역투나 더빙투 내지는 낭독투로 대사를 하는 연기자도 섞여 있다.
이런 정도의 연기력으로는 '말'의 액면가를 넘어 세밀한 이면가를 따져야 하는
이 작품의 진수를 맛보도록 하기는 어렵다 하겠다.
더욱이 무대장치는 협소한 공간 탓인지 너무도 빈약해서 비엔나의 낭만적이고
화려한 분위기와는 전혀 걸맞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연극계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안할 때 그것을 크게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을 자산으로 하는 부분
즉 분석이나 연기는 경제적 능력과 크게 상관이 없는, 이른바 자각과 노력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학구적이고 진지한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든
'치밀하고도 정확한 분석'과 '최대한 정확한 표현 및 전달'을 이끌어낼 방법을
모색해야 하리라 본다. 원론적으로 말해, 연극은 무대라는 터와 이야기라는 터를
동시에 갖는다. 연극은 터와 터가 겹치는,
터 속의 또다른 터가 자리잡는 이중적인 터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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