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계급으로 상승하고자 애를 쓰는 프롤레타리아 쉽펠의 노력과 승리를 다루고 있는 희극. 작가는 쉽펠의 삶을 그려보이며 그가 어떻게 시민계급으로 상승하는지, 시민계급은 왜 그의 상승을 저지하려 드는지, 그의 삶이 과연 영웅적인 것이었는지 묻고 있다. 처절한 현실과 낭만적 유희가 교차하는 이 희극에서이러한 물음에 답을 구하려고 애를 쓰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인간과 현실에 대한 거짓없는 고백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1911년 11월 29일 쓰기 시작한 이 작품 초고의 제목은 {오, 계곡들은 넓고, 오, 저 높은 곳들이여 O Täler weit, o Höhen}이었다. 두번째 완성본에는 {프로테타리아 - 부르죠아적인 프로레타리아 Der Prolet - Le prolétaire bourgeois}라는 제목이 붙여졌으나, 1913년 출판될 때 출판사의 제안에 따라 {시민 쉽펠}로 바뀌었다. {시민 쉽펠}은 1913년 베를린 도이췌스 테아터에서 막스 라인하르트 연출로 초연되었으며, 슈테른하임의 작품들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또 가장 많이 공연되었다. 이 작품에는 귀족, 시민 그리고 프로레타리아 등 세 계급이 등장한다. {시민의 영웅적 삶에서}라는 작품집 표제어가 말해주듯이 다른 작품들은 모두 시민계급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 비해 이 작품은 줄거리 대부분을 프로레타리아 쉽펠이 이끌고 간다. 쉽펠은 마지막에 가서야 시민계급으로 격상된다. 슈테른하임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상반된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에서 {시민 쉽펠}도 예외가 아니다. 한 쪽에선 주인공 쉽펠을 정신병적인 변덕쟁이로 해석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선 그의 계급상승을 위대한 새로운 시민의 탄생이라고 축하한다. 테클라도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시민세계에서 예외적인 순수한 인간성의 소유자로 칭송받는가 하면 낭만적 사랑을 추구하다 처녀성을 상실하고 마는 어리석은 인물로 비하되고 있다.
이 작품을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구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민계급으로 상승하고자 애를 쓰는 쉽펠의 삶은 영웅적인 것인가 아니면 프로레타리아에 대한 배반인가? 물론 그는 시민계급에 대한 프로레타리아의 분노를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시민 히케티어의 집을 올려다 보며 "난 너희들을 증오한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혁명적 분노로 시작되는 이 독백은 "나는 이곳 아래에서 너를 애타게 그리워한다"로 바뀐다. 그는 분명히 시민계급의 전복을 통한 프로레타리아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계급의 삶을 동경하고 그 삶을 자기도 살고 싶다는 반혁명을 대변한다. 권총결투를 요구받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멀리 도망침으로써 결국 시민계급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때도 쉽펠은 사회적 체계를 비판하지 않고 다음의 기회를 엿보면서 간단히 그 질서체계에서 빠져나온다. 다음으로, 쉽펠은 어떻게 해서 시민계급으로 상승하는가? 그리고 히케티어 등 시민계급은 왜 쉽펠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는가? 이것은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비단 권총결투에서 쉽펠이 크라이의 팔에 약간 상처만 내고 이겼다는 것이 이유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시민계급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쉽펠의 노력은 처음에 일단 좌절된다. 히케티어 등 시민들이 같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을 "순전히 사업상의 일"로 제한함으로써 그 이상을 기대했던 쉽펠을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시민들도 합창대회 참가를 포기한다.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그러던 중 말을 타다 다친 후작이 치료차 히케티어의 집에 들르게 되고, 그가 떠나간 후 시민들은 합창대회에 참가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유인즉 후작이 합창대회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히케티어는 제 손으로 쫓아냈던 쉽펠을 부르러 몸소 찾아간다. 이 때부터 쉽펠의 계급상승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 후 쉽펠의 태도는 맨 처음 히케티어를 찾아왔을 때 태도와 달라진 게 없는가? 만일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작품의 외적 줄거리는 쉽펠이 갖은 애를 써서 시민계급으로 상승한다는 것이고, 이에 상응하는 내적 줄거리는 쉽펠의 내면, 곧 의식의 성장으로, 이것은 그의 독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의 가장 큰 변화는 자기의 주어진 현실을 보다 정확히 인식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는 필요할 경우 적당히 가면을 쓸 줄도 알게 된다.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가능할 때 칼을 뽑고 그렇지 않을 땐 가슴 깊숙히 숨겨둔다. 그는 심지어 시민으로서의 의식과 명예심 모두를 내면에 받아들인다. 그는 시민들, 특히 히케티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테클라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거절한다. 이제 막 생겨난 시민으로서의 명예심이 테클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민으로서 쉽펠의 의식이 완성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쉽펠은 권총결투를 요구받자 멀리 도망친다. 그는 마침내 이룩하게 된 계급상승과 장차 누리게 될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기꺼이 과거의 비참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무엇보다 자기의 "깊은 내면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변명한다. 그의 깊은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쉽펠이 거의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음에도 권총결투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승리를 하는 것은 분명 우연이다. 작가는 왜 여기에 우연을 개입시켰을까? 혹시 이 인물을 탄생시킨 신으로서 작가가 자기의 피조물에게 내린 축복은 아닐까?
두번째 물음, 히케티어 등 시민들은 쉽펠의 계급상승을 왜 저지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히케티어는 그렇게 혐오하던 쉽펠에게 왜 소중한 여동생을 주려고 하는가? 그들이 먼저 쉽펠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물론 합창대회 때문이다. 그렇다면 합창대회가 뭐길래? 시민들은 "어릴 적 즐거움"이요 조상들한테서 물려받은 전통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어쩐지 오만한 시민답지 않은 나약한 마음이 담겨있다. 당시 시민이란 거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어 사회에서 물질적 주도권을 갖고 있던 부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어릴 적 즐거움을 언급하고 낭만적 민요를 부른다는 건 어떤지 어색한 것이다. 왜 그들은 이렇듯 어색한 일을 꾀하는가? 어릴 적 즐거움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통이라는 건 변명에 불과하고 사실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얘기해보자. 혹시 민요란 시민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자로서 거칠고 비인간적인 자기들의 본 모습을 낭만적으로 미화하기 위한 가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낭만의 가면을 위해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민요를 불러야 했고 그것이 결국은 쉽펠에게 계급상승의 기회를 준 것 아닌가? 시민들은 동료시민 크라이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쉽펠에게 권총결투를 요구한다. 권총결투는 원래 귀족들의 관습이었다. 시민들이 명예를 내걸고 권총결투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히케티어 등 시민들은 자기 것이 아닌 다른 계급의 관습을 모방한다. 귀족처럼 행세하고 싶은 것이다. 쉽펠의 계급상승을 저지하려던 시민들의 시도는 바로 이 흉내낸 권총결투에서 최종적인 실패의 종지부를 찍는다. 결국 시민계급의 실패 원인은 결국 시민답지 않은 두 가지 일, 즉 낭만적 민요 부르기와 권총결투라는 귀족 흉내내기에 담겨 있다. 시민답게 충실히 살았다면 이러한 실패를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두들 자기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흉내나 내려고 하는 세상에서 시민다운 삶을 사는 시민은 영웅이나 다름없고, 이에 따라 {시민 쉽펠} 역시 "시민의 영웅적 삶에서"라는 표제어의 강령과 일치한다.
낭만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는 테클라를 따를 사람이 없다. 아직 철이 덜 든 소녀로서 그녀에게 최고 가치는 낭만이다. 그녀는 낭만적 꿈을 성취하기 위해 후작과 사랑에 빠진다. 낭만적 유희가 절정에 이르는 이 장면에서 낭만적 사랑은 단지 입에 발린 말뿐이고 그 뒤에 자리잡고 있는 본질은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다. 후작이 이것을 잘 이해하고 이용하는 데 비해 테클라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두운 밤 후작과 함께 헛간에 기어든다. 그 결과는? 당시만 해도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처녀성'의 상실이다. 히케티어가 테클라를 쉽펠에게 넘기고 쉽펠이 다시 그녀를 거절하는 것은 단지 이 사실 때문이다. 결국 테클라는 평소 낭만적이지 못하다고 무시해왔던 크라이를 현실의 반려자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결코 낭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후작과의 마지막 만남에서도 비극적 몰락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부가적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해서 낭만적 꿈을 갖게 되었는가? 테클라는 후작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하지만 왕자님은 멜랑콜리하신 젊은 영웅이세요. 저는 오빠랑 왕자님이 항상 나오는 민요를 하도 불러 이미 그 분이 오시기 전에 맘울 다 빼앗겼어요."(3막 1장) 여기에서 다시 '민요'가 등장한다. 수없이 민요를 듣고 노래하는 동안 낭만적 왕자에 대한 사랑이 테클라의 머리 속에 세뇌되어 있었던 것이다. 히케티어 등 시민들이 실내에서 '사냥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동안 이 민요를 배경음악으로 삼아 테클라는 창문을 넘어 후작의 사냥에 걸려든다. 일견 거칠어 보이는 삶을 낭만적으로 위장하기 위해 민요에 지나친 집착했던 것이 혐오스럽기 짝이 없던 쉽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만들었고 또 소중한 동생마저 망치게 한 것 아닌가!
* 슈테른하임의 작품 중 {속바지}가 한국연극誌 1984년 4월호에 {팬티}라는 제목으로 역자에 의해 번역, 소개된 바 있으며, 역자의 학위논문 {칼 슈테른하임과 현상학}(한국외국어대학교 1994년)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연보
1878년 4월 1일: 라이프찌히에서 유태교를 믿던 은행가이자 하노버 일간지 공동소유주였던 아버지 야콥 칼 슈테른하임과 신교를 믿던 어머니 마리 플랑케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884년 아버지가 베를린에서 주식과 부동산 중개인이자 신탁관리자로 자리를 잡자 베를린으로 이주. 1885년 - 1888년 초등학교.
1988년-1897년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
1897년 뮌헨대학교 철학 및 문학 학부 입학, 1898년 여름학기까지 수강.
그 동안 쓴 작품들을 보낸 바 있던 파울 하이제 Paul Heyse에게서 격려의 편지를 받음.
1898년-1902년 4월: {철의 십자가 Das eiserne Kreuz} 완성.
괴팅엔대학교에서 법학 및 국가정치 학부 수강.
첫번째 발표작 {구세주 Der Heiland}(단막극) 출판.
1899년 {비극적 장면: 속죄 Die tragische Szene: Erlösung}. 슈테른하임의 증언에 따르면 하우프트만 Gerhart Hauptmann이 다분히 아첨섞인 칭찬을 했다 함. 단편 형식의 많은 글들이 쓰여짐.
겨울학기와 1900년 여름학기: 라이프찌히대학교에서 문학사 수강.
1900년 {대단원! Finale!}(詩), {제목 없는 장면 Szene ohne Titel} , {오전의 대화 Vormittagsgespräch}.
11월 8일 오이게니 하우트 Eugenie Hauth와 결혼.
1902년 7월: {크룩도르프에서 Auf Krugdorf} 초연(드레스덴의 작센 왕립극장(연출: 에른스트 레빙어 Ernst Lewinger)
여름학기에 베를린대학교에서 심리학, 문학, 예술사 수강.
10월 1일: 브란덴부르크 소재 니콜라스 1세 중기병 연대에 일 년 자원병으로 입대.
1903년 4월 30일: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조기 제대
1904년 초: 아내와 일시적으로 별거하기로 합의를 봄.
치료차 아아헨 방문. 유부녀였던 테아 바우어와 사랑에 빠짐. 이 때 받은 인상에서 {울리히와 브리기테 Ulrich und Brigitte}가 생겨남. 양 쪽 배우자들의 강요로 테아와 헤어짐.
1905년 테아와 슈테른하임 사이의 딸 도로테아 출생.
{돈 주앙 Don Juan} 작업 시작(1909년 2월 완성)
10월: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 뒤이어 프라이부르크에 정착
1906년 1월: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 그의 미적 관점을 확립하고 철학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 데 결적적인 역할을 함.
테아와 헤어진 데 대해 우울해지고 작가로서 회의에 빠짐.
2월 26일: 성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프라이부르크 정신병원에 수감.
6월 14일: 아내 오이게니 하우트와 이혼
1907년 7월 15일: 지난 해 12월에 이혼한 테아 바우어와 결혼
음악가 오토 브리슬란트 Otto Vriesland 및 프란쯔 블라이 Franz Blei와 친교. 이 둘은 곧 친한 친구가 됨.
1908년 1월 2일: 아들 클라우스 Klaus가 태어남.
고호의 초기 그림들을 사들임.
친구 블라이를 위해 {휘페리온 Hyperion} 誌에 재정적 지원.
6월: 뮌헨 근교에 城 "벨레메종 Bellemaison"을 짓고 이주. 활발하게 사회적으로 교분을 쌓음. 이 중에는 막스 라인하르트와 하인리히 만, 프랑크 베데킨트, 후고 폰 호프만스탈 등이 있음.
가을: 스칸디나비아, 영국, 프랑스 여행. 프랑스는 1914년까지 자주 방문함.
1909년 블라이의 중개로 막스 라인하르트와 첫번째 만남.
7월: 그 동안 중단했던 {거인 Der Riese} - 훗날 {속바지 Die Hose}로 제목을 바꿈 - 작업 시작.
9월 파리에서 몰리에르의 {조르뉴 당딩 George Dandin} 관람, 이후의 작업에 크게 영향을 받음.
1910년 2월 11일: {빈쎈트 반 고호 Vincent van Gogh} 발표. 독일에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언론으로부터 처음 공격을 받음.
4월-8월: {속바지}; 10월-1911년 7월: {금고 Die Kassette}.
1911년 2월 15일: {속바지}가 경찰의 검열에서 풀려 베를린 도이췌스 테아터에서 초연(연출: 막스 홀랜더).
10월 24일 도이췌스 테아터에서 {금고} 초연(연출: 막스 홀랜더).
11월-1912년 7월: {시민 쉽펠}
1912년 2월: 아버지의 사업 실패, 주로 테아가 빚을 청산해줌.
5월: "벨레메종"을 팔고 여름에 벨기에로 이주.
9월 13일: 도이췌스 테아터에서 {돈 주앙} 초연(각색 및 연출: 막스 홀랜더). 이 공연 후 커다란 소동이 벌어짐.
1913년 3월 5일: {시민 쉽펠}이 도이췌스 테아터에서 초연됨(연출: 막스 라인하르트). 연극무대에서 첫번째 성공.
7월-10월: {멋장이 Der Snob}
9월: 첫번째 단편 {부제코브}가 바이쎈 블래터 Weißen Blätter 誌 창간호에 실림. 이 후 많은 작품들이 이 잡지에 처음으로 발표됨.
1914년 2월 2일: 베를린 도이췌스 테아터에서 {멋장이} 초연(연출: 막스 라인하르트).
3월-7월: {1913년}
8월: 전쟁이 시작되자 병무청에 신고하기 위해 브뤼셀을 떠났으나 쓸모없다는 판정을 받고 귀가. 독일의 무모한 애국주의에 놀람. 신경발작.
8월 29일: "행동 Die Aktion" 誌에 첫번째 기고. 훗날 이 잡지 멤버들과 느슨한 관계를 유지.
1915년 1월-4월: {나폴레옹 Napoleon}.
12월: 폰타네 Fontane 상 수상. 상금을 프란쯔 카프카에게 바침. 프로이센주가 슈테른하임 작품 7 편을 공연금지 조처함.
1916년 8월-10월: 몰리에르의 {수전노 Der Geizige} 각색.
11월 16일: 독일 고전주의와 논쟁벌이는 글 {괴테 Goethe} 발표.
11월-1917년 2월: {울리케 Ulike}
1917년 1월: 곳프리트 벤 Gottfried Benn을 알게 되어 계속 우정을 나눔.
4월 16일: 도이췌스 테아터에서 {수전노} 초연(연출: 라인하르트)
12월: 곳프리트 벤, 칼 아인슈타인, 테오도르 트라거와 함께 {시민적 이데올로기의 철폐를 위한 백과사전 Enzyklopädie zum Abbruch bürgerlicher Ideologie} 편찬 계획
1918년 3월: {울리케}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압류 조치됨. 1919년 후반에야 풀려남.
11월: 헤이그에서 {독일 혁명 Deutsche Revolution} 게재. 네덜란드 정부가 슈테른하임을 볼쉐비키주의자로 의심. 이에 따라 테아가 체류허가를 받지 못해 1919년 3월 네덜란드를 떠남.
{20세기초 연대기 Chronik von des zwanzigsten Jahrhunderts Beginn} 두 권으로 출간.
1919년 1월-1920년 2월: 장편 {유럽 Europa}
1월 23일: 프랑크푸르트 샤우슈필하우스에서 {1913년}이 미공개로 초연(연출: 구스타프 하르퉁).
1월 25일: 베를린 클라이네스 테아터에서 {백지상태 Tabula rasa} 초연(연출: 게오르그 알트만).
1920년 2월-5월: {베를린 혹은 온건미온주의 Berlin oder Juste milieu}
5월: 신경발작. 이후 몇 번에 걸쳐 심리치료사와 상담.
6월-9월: {고삐풀린 우리 시대인 Der entfessellte Zeitgenosse}; {탓쏘 혹은 온건미온주의 예술 Tasso oder die Kunst der Juste milieu}
11월/12월: 아이들 교육 문제로 뮌헨에 체류. 독일의 정신적, 정치적 발전에 점점 우려함.
1921년 2월 17일 다름슈타트에 있는 헤쎈 주립극장에서 {고삐풀린 우리 시대인} 초연(연출: 하르퉁).
1922년 4월/5월: {가련한 놈 Der Nebbich}.
6월: 사회주의자 오토 륄레 Otto Rühle와 친교, 창작에 큰 영향을 받음.
10월 9일: 다름슈타트에 있는 헤쎈 주립극장에서 {가련한 놈} 초연(연출: 하르퉁).
1923년 1월-5월: {고갱과 반 고호 Gaugin und van Gogh}.
10월 16일 드레스덴 노이에스 테아터에서 {속바지} 공연 - 슈테른하임의 첫번째 연출. 이후 그는 주로 베를린에서 자기 작품들을 직접 연출하며, 나중에 딸 도로테아가 무대장치를 위해 합류한다.
11월 6일: 함부르크 캄머슈필레에서 {화석 Das Fossil} 초연(연출: 에리히 쇤랑크 Erich Schönlank)
1924년 4월-10월: {오스카 와일드 Oskar Wilde}
12월 24일-1925년 1월 11일: 파리 공식 방문.
일련의 작품들이 이후 몇 해 동안 프랑스어로 번역됨.
1925년 3월 31일: 베를린 도이췌스 테아터에서 작가의 연출로 {오스카 와일드} 초연. {행동} 誌가 개인주의자라고 비난하고 관계를 중단함.
8월-1926년 3월: {우쯔나흐 학교 Die Schule von Uznach}
11월-1926년 2월: {루테치아 Lutetia}
12월 22일: 파멜라 베데킨트 Pamela Wedekind와 첫번째 만남.
1926년 9월 21일: 함부르크 도이췌스 샤우슈필하우스(연출: 아돌프 마를레), 쾰른 샤우슈필하우스(연출: 프리드리히 노이바우어), 만하임 국립극장(연출: 하이쯔 디트리히 켄터)에서 {우쯔나흐 학교} 초연.
1927년 12월 16일: 테아와 이혼. 파멜라 베데킨트와 우트빌로 이주.
1928년 9월 17일: {속바지}와 {멋장이}를 각색하여 {가면 Maske}이라는 제목으로 베를린에서 초연(연출: 칼 슈테른하임).
가을: 신경질환이 심해짐.
12월 11일: 정신과 육체 모두에 위기가 옴. 요양원으로 옮겨져, 심한 두뇌장애로 진단받음.
1929년 7월 1일: 형제들에 의해 베를린 요양원으로 옮겨짐.
10월 간병인과 함께 테아가 세를 낸 방으로 옮김. 파멜라 베데킨트와 다시 만남. 연말까지 건강이 크게 호전됨.
12월 18일: {시민 쉽펠}을 오페라로 만든 {테너 Der Tenor}가 베를린에 있는 독일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음악: 에른스트 폰 도나이 Ernst von Dohnàyi; 연출: 프란쯔 덴뽩러 Franz Denzler).
1930년 4월 17일: 베를린에서 파멜라 베데킨트와 결혼하고 브뤼셀로 이주.
1931년 5월-7월: 슈타른베르거 호수에서 휴가. 마지막 독일 체류.
1932년 7월 11월: {나의 삶에 비춰본 전쟁 이전의 유럽 Vorkriegseuropa im Gleichnis meines Lebens}(필사본).
1933년 나찌 정권에 의해 출판과 공연이 금지되자 수입이 완전히 없어짐. 죽을 때까지 우울증과 일시적인 의식불명, 무기력에 시달림.
1934년 2월: 파멜라 베데킨트가 그의 곁을 떠남.
4월-1935년 2월: 런던에 사는 여동생 트루데 Trude에 의해 그 곳으로 옮김. 작품을 영국 출판사와 극장에 소개하려고 시도.
10월 2일: 파멜라 베데킨트와 이혼.
1935년 2월: 브뤼셀로 돌아옴. 가정부를 구하던 중 헨리테 카르보나라 Henriette Carbonara를 알게 되어 훗날 함께 살게 됨.
5월 15일: {아르시스 후작 Marquis von Arcis}이 런던에서 {축복의 가면 The Maske of Virtue}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오름으로써 영어로 처음 공연됨. 이 공연이 성공할 경우 계속 무대에 오르리라고 희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음.
연말: 파리 방문. 테아와 다시 만나 우정 관계가 시작됨.
1936년 여름: {나의 삶에 비춰본 전쟁 이전의 유럽}이 생전 마지막 출판물로서 암스테르담에서 햇빛을 봄. 외로움이 점점 더 심해짐.
1938년 전반기: 관절 류마티씨즘으로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됨.
여름: 젊었을 때 친구 한스 헤어촉 Hans Herzog이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 때까지 재정적으로 지원함.
1940년 5월 17일: 브뤼셀이 독일군에 점령되고, 이에 슈테른하임은 일기와 기타 혐의가 될 만한 모든 자료들을 파괴. 친구들이 그와 헨리테 카르보나라를 나찌로부터 보호해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