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은성 '빵야'

clint 2024. 6. 5. 09:27

 

 

나나의 손 끝에 걸린 소총 트리거, 어디를 향해 당길 것인가.
번번이 편성에 실패하는 한물간 40대 드라마 작가 나나는 
소품창고에서 '99식 소총' 한 자루를 발견한 후 드라마편성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자세로 집필을 시작한다.
하지만 돋보이는 주인공이 등장해야 한다거나, 편성을 위해 
현실과 타협할 것인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장총과의 만남이 길어질수록 더 깊어져 간다.
평소처럼 장총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설득하던 어느 날, 
나나는 그의 방아쇠가 일반적인 방아쇠가 아닌 다른 금속물을 
가져다 붙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빵야가 말한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나나는 과연 거대한 상업자본에 맞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장총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장총은 평생 꿈꿔 온 자신의 소원을 마침내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파주에 위치한 영화 소품창고. 낡은 영창 피아노 위, 세고비아 기타 옆 묵직한 나무 케이스에 담긴 장총 하나가 놓여있다. 1945년 인천 부평 조병창에서 태어난 99식 소총 ‘빵야’다. 당대 최고의 성능으로 300만 정이 생산된 아리사카 99식 소총은, 일제 제국주의 침략의 주력 화기였다. 작품은 이 99식 소총을 의인화해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작품은 40대 여성 드라마작가 ‘나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드라마 편성에 번번이 실패하는 한물간 작가는 시나리오 소재를 찾던 중 소품 창고에서 오래된 99식 소총 ‘빵야’를 발견하고, 빵야의 이야기는 곧 나나의 이야기가 된다. 빵야가 만나온 주인들과 그들이 겪은 시간은 극중극 형태로 나나의 시나리오 <트리거>에 한 자 한 자 기록된다. 1945년 강제로 무기 제작에 동원된 어린 영이의 손을 거쳐 탄생한 빵야는 첫 주인인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기무라를 만나 수많은 조선인을 죽이는데 이용된다. 이후 순진무구한 조선인 병사 길남에게, 명포수의 딸 중국팔로군 선녀에게, 그리고 다시 배곯는 게 싫어 군에 입대한 형제 많은 집 장남 국방경비대 무근, 서북청년단 신출에게도 전해진다. 한국전쟁 중에는 학도병 원교와 북한군 의용대 아미의 손을 거쳐 빨치산 토벌대 보아라부대 병사 동식과 빨치산 소녀 설화의 손에 맡겨진다. 이후 빵야는 심마니, 사냥꾼, 포경꾼, 건설업자, 영화 제작자 등을 거쳐 소품 창고에 이른다.



소총이 의인화된 독특한 소재의 작품으로, 소총이 겪어온 전쟁의 이야기와 불운했던 근현대사의 순간들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되는 작품이다. ‘빵야’와 ‘나나’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유한다. 빵야와 주인들이 보내온 삶을 통해 근현대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묻는다. 또한 마침내 완성된 나나의 드라마 대본이 ‘대중성’을 이유로 편집되고 각색되는 모습을 통해, 이 시대에 ‘진짜 이야기’는 무엇인지 질문한다. ‘빵야’는 진짜 이야기에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2022년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연극부분에 선정되었고, 2023년 제61회 대한민국연극인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작가의 글 김은성

오래전부터 사람이 아닌 사물이 끌고 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어느 날 문득, '금속'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금속의 변화와 여정을 통해 짚어보자.' 그리스 시대의 동상이 녹여져 전투에 쓰이는 칼이 되고, 그 칼이 다시 녹여져 말의 편자가 됐다가, 금속활자가 됐다가, 범선 바닥의 피막이 됐다가, 중국의 범종이 됐다가, 1차 세계대전의 탄피가 됐다가, 동전이 됐다가, 숟가락도 됐다가... 변형을 거듭하는 금속의 일생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자료조사를 하면 할수록 감당하기 힘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을 때 뉴욕에서 두 달 정도 지내게 됐다. 센트럴파크를 걸어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가는 일이 즐거웠다. 악기전시관과 무기 전시관이 가깝게 붙어 있었다. 다양한 악기들을 보고 난 후 온갖 무기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했다하루는, 기다린 장총 한 자루를 보고 있는데 '금속의 연대기' 대신에 '총의 연대기'를 쓰면 어떨까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끌고 갈 총을 찾아 취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본군의 주력소총이었던 '아리사카 99식 소총'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목을 '트리거'로 정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작업에 너무 경직된 힘이 들어가 진전이 버거웠다. 제목부터 좀 경쾌하게 바꿔보자 생각하다가 어렸을 때 장난감총을 가지고 "빵야! 빵야!" 하면서 전쟁 놀이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뛰놀던 동네가 한국전쟁 시기에 참혹한 학살이 일어났던 곳이라 새삼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99식소총의 이름을 '빵야'라고 붙여주고 제목을 소총 이름으로 가자고 마음먹게 됐다. 경쾌한 느낌이 드는 어감을 살리면서도 전쟁과 놀이가 겹치는 이중적 의미도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연대기적으로 방대하게 다룬 작품이라 비극적 역사 속 인물들의 아픔을 되새기는 것도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빵야>에서 내가 가장 중점을 두고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을 꿈꾸다 실패했을 때, 그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이다. 좌절과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무엇을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어떻게 다시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드라마를 끝까지 쓰고 싶은 나나' '악기가 되고 싶은 빵야'의 도전과 실패,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서 일단 나부터 위로 받고 싶었던 것 같다길남이와 살구, 선녀의 바위 전설, 무근의 어머니 사탕 장면, 꽃나무담 장면 등 울고 웃으며 쓴 대목이 많지만 내가 참 좋아하는 대목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주를 마시는 교회', 양평해장국 장면이다. 대본을 쓸 때 잘 풀리지 않는 날이면 혜화로터리에 있는 양평해장국에 가서 소주 한잔 기울이며 많은 생각들을 했다.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날, 얼큰 해장국에 한잔 기울이고 있는데 저기 저 자리에 혼자 앉아 한숨 쉬고 있는 몇 년 전의 내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순간, ',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대본에 담자 마음먹었다초연을 보면서 해장국집 장면이 나올 때 그때 생각이 나 울컥했다.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공연이 끝난 직후, 혜화로터리의 양평해장국이 문을 닫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폐업직전에 사장님을 만나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꼭 재개업해서 나의 교회가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장 아끼는 장면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마지막 장면이다. 빵야가 총의 주인이었던 인물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나나가 빵야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어려운 결단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이다. 보고 있으면 말로는 정리하기 힘든 벅찬 감정이 밀려온다. 극 속의 나나처럼 나에게도 중간에 멈춘 대본이 많다. 멈춰버린 대본 안에 갇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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