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주수자 '공공공공'

clint 2024. 6. 2. 20:35

 

 

어떤 무기수가 감방에 갇혀 있다.  그는 오랫동안 감방에 

지낸 까닭으로 명태처럼 마르고 쪼그라져 있다. 
얼굴은 세월에 닳아 거무튀튀하고, 
눈빛은 제주 돌하르방처럼 툭 불거지고 사납다.
그런데, 그의 옆 감방에는 동물도 함께 갇혀 있다.
거기서 이따금 꽥꽥, 우우,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던 어느 날, 용수라는 젊은이가 감방에 들어오게 된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대한 용수의 반항심은 하늘만큼 크다.
게다가 절름발이 간수는

 허허수와 주팔삼 두 사깃꾼을 데리고 나타나는데…….

 

 



연극은 공연일 뿐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혹시 당신이 생각하는 연극의 개념이 무색무취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면 지금 당장 접어두길 권해본다. 단언컨대 연극은 당신을 행운으로 이끌어주지도 않을뿐더러 비범한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공연 자체가 아니라는 얘기다. 니체 따위를 연상하며 허무주의를 논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기획 의도가 교훈적이던 풍자적이던 공연의 메시지가 현실의 감정과 연관될 때야말로 본연의 가치를 실현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연극 ‘공공공공’은 고뇌와 허무의 극단을 이색적으로 소개하는데, 러닝타임이 지속될수록 관객으로 하여금 아이러니한 일상감을 절감케 한다. 이번에 첫 무대에 오른 ‘공공공공’은 앞서 정의 내린 바와 같이 하나의 ‘극’ 일 뿐이다. 연극은 결코 현실이 아니지만, 한결같이 현재를 상연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관객에게 극도의 ‘현실감’을 체감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장치로 작용하게 된다. 

 



극의 배경은 일상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감방이다. 극악의 범죄자들이 등장하는 와중, 난데없는 동물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무기수, 석방의 희망조차 없는 그는 그곳의 현자 격 인물이다. 그를 중심으로 사회에 불만을 품은 ‘용수’ 종교적 교리를 앞세운 사기꾼 ‘주팔삼’, 주가조작 경제사범 ‘허허수’ 그리고 이들의 질서를 관리하는 ‘간수’가 등장해 내용을 전개해나간다.  연극 ‘공공공공’은 비현실적인 가상의 상황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여 자신들이 당면한 현재를 우회적으로 실감케 하는 오묘한 구성으로 흘러간다. 주요 배경이 되는 ‘감방’은 자유의 박탈이라는 객관적 상황과 미래지향적인 희망이라는 역설적 환경을 설정한다. 극에서 공간이 주는 의미는 단순한 환경적 개념을 넘어선다. 이는 정점에 이른 악인들마저도 자연스럽게 상호 관계시키는 연계를 수행하는 동시에 극 전반을 흐르는 분노, 조롱 그리고 자만의 감정까지도 통제하는 초월적 개념으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다. 죄의 깊이가 무기한인 최장 수형자 ‘무기수’는 극 중 절대자와도 같은 ‘간수’와도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지구와 인류의 고해성사를 대행하는 등 비범한 성인의 면모로 관객에게 모순적 인사를 건넨다. 공연의 낯선 분위기가 익숙하다고 느낄 즈음, 우리는 점점 현실의 이면을 극에서 찾을 수 있다.

 

 



단순히 1차원적 관점에서 풀이하자면, 자유가 박탈된 감방이라는 배경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제한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 삶을 대변하는 것이며, 극 중 죄수들의 모습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죄의 본질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론해 볼 법하다. 공연의 개요에서도 ‘당신은 삶의 주인입니까? 포로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해석은 마땅히 타당하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 현실세계와의 대비효과만으로 온전한 실감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비록 자그마한 호두 껍질 속에 갇혀 있더라도, 온갖 불행과 끔찍한 비극에 휘말려 있더라도 그대의 영혼이 자유를 찾아 헤매고 있다면 ‘공공공공’의 세계로 진입할 준비가 됐다”라는 소개평을 활용해 관객에게 슬쩍 힌트를 던진다.
공연의 제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0’으로의 회귀와 이상적 가치의 갈구는 극이 전하고자 하는 본질적 메시지 중 하나다. 관객 중 누구도 죄수번호 ‘9000’의 무기수가 저지른 죄목이 무엇인지, 얼마나 감옥에 머물렀는지는 못한다. 아니 굳이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옳다. 극의 시작부터 등장한 그는 악질 범죄자로의 인식보다는 ‘성인’에 가까운 언행으로 일관되기 때문이다. 좁은 감방에서 지구적인 안녕을 기원하는 무기수의 모습은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인지적 혼란을 일으키며 그들을 ‘관찰자’에서 ‘당사자’로서 자조하게 만든다. 고립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무기수의 몸부림을 직관하며 시공간적 한계에 좌절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상은 흡사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보르헤스’의 작품인 ‘원형의 폐허들’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대상으로서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결국에는 자아 인식과 함께 최초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이치와 같은 맥락으로 말이다. 공연은 “만약 감옥에서 탈출해 자유를 찾을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관객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이어 감옥의 형상 자체를 아예 허물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이런 황당스러움을 수습하기는 커녕 당면한 상황을 탈출의 기회로 여길지 아니면 의미 없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치부할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넘겨버린다. 한낱 연극 따위가 대체 관객에게 그리 큰 부담을 줘야만 하는가에 대한 볼멘소리가 새어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하지만 극을 집필한 주수자 작가의 작품집 ‘빗소리 몽환도’를 살펴보면 다소의 이해가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난데없이 소설 속 주인공이 집 문을 두드리며 현실의 상황에서 조우하게 되는 상황이나, 죽음을 택하려는 줄리엣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설명하려 안간힘쓰는 모습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작품집과 동명의 단편 ‘빗소리 몽환도’에서는 오히려 소설 속 주인공이 현실의 나에게 “현실이란 난해한 것이에요. 환상만큼이나 난해하죠.”라며 조언을 건넨다. 즉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 가령 인류적인 위험이나 소속된 사회의 부조리, 개인사 같은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에 우리는 고통을 안겨주는 그 ‘현실’에서 한발 물러나 감정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로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하자면 ‘초월적 자아’ 그리고 ‘초월적 사고’를 통한 현실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인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행위는 타인에 자신을 투영하거나 가상 속 설정을 극대화하는 등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비현실적 상황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간다는 점은 연극 ‘공공공공’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갑자기 들이닥치는 문제와 사고는 우리에게 미처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삶의 완전한 좌절을 선사하곤 한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객관성보다는 비관적 주관성이 의식을 지배해버리는 순간이 닥쳐오면 누구라도 일순간에 자신을 잃고 공황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극복을 위해 우리는 과감히 가상으로 투영해보는 ‘초월’을 추구한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해 구원해주길 바라고, 뜻밖의 행운으로 되레 행복해지는 상상과도 같이 말이다.
그러나 갈망이 극에 달할수록 현실적 자아가 겪어야 할 비참함의 정도는 반비례되기 마련이다. 공연의 관람으로 얻은 잠시간의 관조는 비현실적 ‘망상’과도 맞닿아 있다. 연극의 가치를 실현되기 위해서는 현실의 문제를 직면이라고 ‘공공공공’은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리하자면 관객에게 넘겨준 의미 해석에 대한 숙제는 ‘부담’이 아닌 원초적인 ‘번뇌’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연극은 공연일 뿐이지만, 동시에 계기가 된다. 계기는 동기로 작용하여 현실에 의지를 북돋을 수 있으리라. 공연의 말미, 지금의 현실이 ‘나락’인지 혹은 ‘연옥’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즈음 “혹시 지금이 ‘천’의 순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식적 초월을 감히 시도해 본다. 그리고 관객에게 다시 물음하고 싶다. 당신은 현재를 통감하고 있느냐고.

(투데이신문 오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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