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스테파노 마시니 '리먼 트릴로지'

clint 2024. 5. 3. 19:45

 

 

희곡 책으로 600페이지. 공연시간 5시간. 160년간의 리먼 브러더스의 초창기부터 몰락까지를 다룬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리먼(Lehman)이라는 이름은 2008년 금융 위기와 정장을 차려입은 수백 명의 직원이 상자를 들고 은행 사무실을 떠나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2008년 9월 15일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Lehman Brothers)의 예기치 못한 파산 이후. 국제금융 시상이 큰 타격을 입으리라는 예측과 함께 이런 이미지가 전 세계에 퍼졌다.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두고 "전 세계에 충격파를 끼칠 붕괴"라고 보도했다. '쓰나미'는 이수선한 당시를 정의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리먼 브러더스의 CEO인 딕 폰드(Dick Fild) 역시 이듬해 뉴욕 감시관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면서 회사의 파산에 대해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파산 당시 리먼은 직원 2만 5000명을 거느린 미국에서 4번째로 큰 투자은행이었다. 금융 혼란은 금융 및 자본시장에 심각한 기능 장애를 일으켰다. 불황에 빠진 세계 경제에 치명타였다. 리먼 브러더스는 10조 달러의 경제 손실을 초래한 서브프라임 사태로 쑥대밭이 된 금융시스템 과열의 상징이 되었다. 금융 및 투자세계의 풍요로움도 영원할 수 없음을 상기시킨 일이었다. 자극적인 이미지, 극적인 뉴스 헤드라인, 실질적인 일상의 변화(중소기업과 가구 총구매력 감소로 이어진 광범위한 경기 침체를 대부분이 경험했다)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경제 붕괴를 야기한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제시스템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테파노 마시니는 리먼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연극의 기능은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국제적인 경기 전체를 초래한 은행에 관한 희곡으로 사람들이 경제에 흥미를 가지도록 할 수 있을 자문했다. 어째서 경제가 곧 사람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리먼 브러더스 사례를 연구하면서 나는 은행의 몰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별로 흥미롭지 않나는 것을 깨달았다. 은행은 리먼 가족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의 몰락은 곧 가족의 몰락이었다. 은행 파산의 파는 매우 다. 은행이 160년간 존속했고, 리먼가 이야기는 같은 기간 서구문명의 역사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나는 이 위대한 사가(Saga)를 쓰는 데 헌신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되었다."

 

 

마시니 리 가족이나 은행의 파산,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표현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뭘 받아야 하고 누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설교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작가에게 더 시급한 것은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마시니는 경제 이면의 인적요인인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자 한다. 경제학은 자원과 상품이 생산, 분배, 사용 및 관리되는 방식과 관련해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를 연구하고 설명하는 사회과학이다. 거시적 관점에서 어떤 것도 우발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모든 행동과 상호 작용은 숫자와 동계로 설명된다. 마시니의 작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미시적 관점이다. 그는 그러한 행동과 상호 작용 이면에 있는 사람들, 즉 결정을 내리고 지속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내면 깊은 곳의 욕망과 동기를 추구하는 인간을 드러낸다. 마시니는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와 관련된 부분은 작품에 포함하지 않기로 했다. 극은 1968년에 사망한 리먼가의 마지막 후손 바비의 죽음 이후 끝난다. 가족의 유산은 흩어지고, 리먼 은행은 뿌리가 잘린 채 상어떼에 의해 파괴된다. 연극에서 2008년의 위기는 1929년 리먼 형제와 세계 경제가 겪었던 대공황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두 경제 위기의 원인은 대체로 동일하다. 그러나 끝내 파산을 부른 리먼 은행의 최근 성장에 대해서는 생략함으로써 마시니는 2008년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은행의 기원, 즉 인간성과의 접촉을 잃고 개인회의 최대치에 도달했을 때 나타났음을 강조한다.

삼부의 첫 부분은 물질, 사물, 직물, 면, 단추, 인간에 대해 역설한다. 점차 물질과 육체가 희미해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시작된 현실과의 괴리를 반영한다. 다양한 재료를 다루고 만지고 변형하는 것과 관련된 일은 점점 더 저급한 직업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리먼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돈을 면화나 커피 같은 상품을 사고 유하는 도구로 본 19세기 은행의 개념에서 시작해 사회는 돈을 수단이자 목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점차 제어할 수 없게 된 메커니즘이 메타버스, 신용카드 및 암호화폐 시대에 여전히 불가피하게 진보하고 있다. 리먼 은행 부사장 로런스 맥도널드(Lawrence McDonald)는 2008년 파산 당시 은행 이사회의 어느 누구도 그런 결과를 상상하거나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은행은 빚을 지고 있었다. 마시니의 희곡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 발전에서 리먼 일가가 수행한 역할에 초점을 맞춰 실물 경제에서 금융 경제로의 전환, 그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리먼 트릴로지>는 형식 또한 매우 파격적이며 다양한 스타일과 내러티브 접근방식을 보여 준다. 포스트모던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로서의 마시니는 연극을 특정 장르를 표현하는 완전한 웰메이드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텍스트를 이야기를 구성하는 원초적인 연극적 소재, 구성 요소로 보고 무대에서 이를 생동감 있게 재현할 방법을 찾아낼 연출, 드라마투르기, 배우에게 전 달한다. 사실 이 작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한 세부 사항과 시각적 언급으로 가득 찬 무질서한 텍스트다. 대화는 3인칭 내레이션으로, 내레이션은 뉴스로, 뉴스는 시로, 시는 놀랍게도 재치 있는 코미디, 고전 서사시, 심지어 비극으로 전환되면서 장면이 품고 있는 정신과 본질을 드러낸다. 텍스트는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동적인 시스템으로 다뤄진다. 텍스트가 끊임없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관객이 상상력을 발휘해 장작에 기여하도록 만든다.  복잡한 접근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매우 개방적이며, 고정된 형식이라는 극문학의 경직된 비전을 깨고 연극을 어떻게 제작할지 선 하도록 충분한 자유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전 세계에서 마시니의 <리먼 트릴로지>가 매우 다양한 버전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이 를 방증한다. 이 연극은 24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어떤 작품도 다른 것과 유사하지 않았다. 2014년에 쓰인 이 연극의 잠재력이 곧 이해되었다. 프랑스 코메디 드 생테티엔(Comédie de Saint-Étienne)에서 초연되었다. 7명의 배우가 출연한 이 공연은 비평가 상을 수상히 2016년까지 순회공연을 했다. 독일 드레스덴과 쾰른에서는 네거티브 명의 배우가, 스페인에서는 12명의 배우가 공연했다. 2015년 루카 론코니 감독은 12명의 배우를 데리고 밀라노 피콜로 극장에서 5시간에 걸쳐 이 작품을 공연했다. 2018년 런던 국립극장에서 영국 초연이 이루어졌다. 극작가 벤 파워(Ben Power)가 각색하고 샘 멘데스(Sam Mendes)가 연출을 맡았으며, 배우는 단 셋이었다. 같은 프로딕션이 2019년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Park Avenue Armory)에서 공연했고, 2020~2022년에는 코비드로 인해 브로드웨이 네덜랜더 극장(Nederlander Theatre)에서 간헐적으로 제공인되었다. 다양한 프로덕션의 공연들이 두루 인정을 받았다. 특히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은 2022년 토니 어워즈(Tony Awards)에서 최고의 연극, 최고의 배우(Simon Russel Beale). 최고의 감독(Sam Mendes), 최고의 무대 디자인 및 최고의 조명 디자인 등 5개 부문을 수상했다. 스테파노 마시니만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이탈리아 극작가는 거의 없다. 다리오 포, 루이지 피란델로, 카를로 골도니 등 전 세계에서 번역되고 있는 이탈리아 고전 작가들에 비견될 만하다. 마시니의 작품은 국경을 초월해 현대 세계화 시대의 산물로서 형식이나 주제 면에서 보다 보편적인 비전을 표현할 수 있다.

 

 

 

루카 론코니의 글 (2015년 이탈리아 밀라노 피콜로 극장에서 <리먼 트릴로지>를 공연한 연출가)
2012년 여름 <리먼 트릴로지>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나는 이것이 놀라운 의외성을 지닌 참신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시사적인 소재를 다루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계로 다가왔을 지언정 장점으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극작품은 보도(무엇보다도 증인을 위한 것으로 연극과는 아주 먼 장르인 다큐멘터리에서 변주된 표현기호를 따름)보다는 분석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 강렬한 인상은 이 작품이 지닌 너무도 명백한 혼재성에서 비롯됐다. 복합적이고 특정하기 어려운 체계 안에서 문학이 연극으로 가까이 다사와 잠시 잠깐 그 서사적 경계를 잃고 대화로 이어지는가 하면, 이번에는 다시 소설이라기 보단 논픽션으로 넘어간다. 전부터 문학과 연극이 서로를 비추면서도 결코 마주치지 않는 두 개의 길이라고 생각하곤 했던 나로서는 이러한 분리를 명확하고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해소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관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어 왔다. 암담한 '극화'를 통해 그러한 분리성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마시니는 이 작품에서 장르간 차이나 서사성 간 차이에 앞서 존재하는 서술 시점의 괴리를 메우지 않은 채 용감하게 그대로 두었다. 나는 최근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를 연습하면서 배우들에게 '희극처럼 하지 말라'는 주문을 자주 했는데 연출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모호함 속에서 강력한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기에 원래의 모호한 특성을 유지하려 했다. <리먼 트릴로지>의 미덕은 바로 '희극'이 보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어느덧 점점 열풍을 몰고 있는 허풍스러운 서사적 모험담에 자신을 내맡긴 것에 있다. 양자물리학의 발견이나 다우존스 지수의 탄생을 ‘극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작가라면 감춰진 일화들을 극적으로 각색함으로써 그 과학자나 경제학자의 공인되지 않은 전기를 그려내려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160년 역사가 중립적인 논픽션 허구적 흐름 악몽과 망상의 서사를 끊임없이 넘나들면서 펼쳐지며 누군 지 모를 전지한 내레이터의 논평이 영화시나리오 같은 흐름과 대조적인 조화를 이루며 이야기를 계속해 분절 시킨다. 여기까지가 언어적 표현 측면이 있다면 구조적 측면에도 틀림없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실제로 나는 매번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이 어떤 문화 혹은 시대를 기반으로 하든지 늘 그것을 읽는 다양한 방식을 상정할 수 있으며 때로는 반어적으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줄거리만큼은 손대지 못하고 존중해야 한다. 마시니의 이 테스트에서는 그로 인한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이 글이 모든 교과서적인 인과성의 기계적 한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서로 독립적이거나 분리가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대여섯 가지의 뜻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그럼에도 그러한 여정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상황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일한 제목 이래 여러 가지 현대적이고 모순된 하지만 일관성 있는 쇼를 모아 놓은 공연의 역설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제2부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 필립이 진보주의자인 사촌 허버트와 싸우는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한편에서는 은행 경영에서부터 실질적으로 배제되면서 저물어가는 두 늙은 창업주 형제의 이야기가 다른 편에서는 경마와 미술 전시를 넘나드는 직계 자손 바비의 입문 여정이 전개되는 등 최소한 두 가지의 사건이 병렬식으로 전개되는데 텍스트는 이를 매우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이 사건을 서로 연결해주는 사건은 아무리 기다려도 등장하지 않으며 그것이 이 텍스트를 다면성을 지닌 문학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다양한 자극에 대해 수용적이며 그중 어떤 자극도 작가의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 요컨대 반복 말했던 '위험한 극작춤'의 패러다임 속에서 나는 터무니없게도 편안함을 느끼는데 대부분 어떤 작품이 이 작품처럼 있는 그대로를 제시하고 자극제로서의 역할에 시작하면서 예언자인 양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을 때다. 나는 밀라노 피콜로 극장을 위해 에드워드 본즈의 <인간들의 연합(the company of men)>(경제라는 주제를 도덕적 함의 속에서 다루기를 거부하는 또 다른 작품)을 연출할 때와 마찬가지로, 구원자적 태도를 버리고 관객에게 단지 인식의 길에 대한 영감을 심어 주는 것에서 멈추는 그 일관성 있는 절제력을 칭송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극작품이 항상 지녀야 하는 소명의식일 것이며, 가식적인 현대성이라는 외견상 특성에 따라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작품에 피상적으로만 현대적이라는 지위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적이라는 말의 정의는 끊임없이 그리고 너무도 빠르게 변모하고 있기에 '지금 이곳의 이야기'라는 특정 조건만을 갖추었다고 해서 시대의 함께하는 작품이라 평가받기는 거의 힘들다. 늘 이러한 요건에만 몰두하고 그것을 뽐낸다면 오늘날 새로운 희곡이라는 것이 빠지기 쉬운, 참을 수 없는 매너리즘과 결합하기 쉬워진다. 어쩌면 현대성이라는 특징을 추구하는 대신 다가올 미래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최악의 경우라도 예지에 대한 야망은 키울 수 있을 것이며 당연히 그것이 자족적인 순응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호작용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의 미래 연극은 수동성과는 정반대에 있는 그 특성으로 인해 할 말이 무척 많아질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영화는 이미 반역사적인 표현 장르가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호작용에 둔감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영화가 3차원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으며 보다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어떤 타협을 찾으며 연극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마시니의 텍스트는 매우 현대적인 연극을 필요로 한다. <리먼 트릴로지>는 성숙한 희곡으로서 안내자나 조율자 없는 통찰력과 자주성을 요구한다. 우리가 면죄라는 보상이나 처벌. 그 어떤 행동 매뉴얼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텍스트 안에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 가게 한다. 위안거리가 있다면 연극에서 작가와 그가 다루는 소재간 연결성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는 것,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그러한 관계가 탄생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의 아직 가려져 있는 부분에 대해 점점 더 계몽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는 사소한 일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상 작가는 작품을 쓰도록 요구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2008년 9월 발생한 거대 리먼의 붕괴가 작가뿐만 아니라 극을 향유하는 우리와도 관련 있는 것은 모두가 그것에서 파생된 경제 위기의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시니는 그러한 실패를 재구성해 보려 하지 않는다. 그는 경제학자인 양하면서 이를 분석하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벌어진(따라서 다루기가 불가능한) 일이기에 야심만만한 작업이 되었을 수도 있겠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속내를 감추고 머뭇거리는 대신 망원경으로 보듯 100년 전에 일어난 사건들과 은행의 홍적세와 중생대를 들여다보고, 정통 유대교인이라는 강한 정체성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던 첫 세대 헨리, 이매뉴얼, 메이어 삼형제가 미국에 상륙한 후의 황금기를 칭송한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작품을 분석하는 또 다른 관점인데 유대교에 대한 리먼의 소속감은 갈수록 더 흐릿해 지지만 그들은 완전한 무신론으로 돌아서는 대신 오히려 자본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종교로 입문하게 된다. 게다가 오늘날 경제학을 숭상하는 이들은 사제와 고위 관료 중간 쯤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장된 유대 의례보다도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희곡의 핵심 경제라는 것이 비밀스럽게도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오래 퇴적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대종교들을 상대로(심지어 유대의 역사는 수천 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압승을 거두면서 의례로 탈바꿈했다는 데 있다. 경제를 종교로 보는 이런 분석을 따른다 하더라도 리먼의 사건이 종교 체계의 내적 파괴로 종결된 것이라는 결론은 배제해야 한다. 당시의 다른 모든 종교들처럼 자본주의 또한 개혁 필요성이 절실했고 당연히 그 순간은 극적이었다. 모든 신학이론과 교리체계 전체를 재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자본주의가 실행할 자기개혁의 결과가 어떨지는 알지 못하지만 모든 개혁 계획의 '반反(antithesis)'으로서 유일하게 피해야 할 상황은 보통 잔인하고 냉정하게 진행되는 혁명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서서히 (물론 격렬한 충격과 함께) 해제되는 동안 우리는 자본주의의 혁명보다는 과학의 혁신이나 수명 연장 같은 전혀 다른 분야의 전례 없는 혁신을 목격할 확률이 더 높다. 리먼이 붕괴하기 훨씬 이전에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조로즈 루폴로 작 <악마의 거울>을 연출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 경제학 매뉴얼을 연극 형태로 소개한 것으로 마지막 파트인 3부에서 바로 자본주의 모델의 지속가능성을 다루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리먼 3부작은 그 후속 격이라 할 수 있겠다.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나왔을 뿐이지만 앞의 작품보다 훨씬 극적인데 이것은 자본주의 체계가 지속 불가하다는 첫 번째 경종이 강하게 울린 직후에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시니의 텍스트는 이 시점에서 멈춘다. 자본주의를 선험적으로 비난하는 도덕주의적 태도도 스스로부터 살아남아야 할 만큼 일관성 있는 이 세계의 진보적이고 장중한 운명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라는 합리주의적 태도에 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절대적인 저주와 온전한 징송이라는 상반되지만 수사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 두 위험성 사이를 항해하는 과정에서 마시니는 우리에게 정해진 틀이 없는 인간 군상을 제시한다. 월트 디즈니가 아주 잘하는 착한 사람(반자본주의자)과 나쁜 사람(<도살장의 성 요한나>에 등장하는 피에르폰트 마울러 같은 이)의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동적이고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뛰어난 극적 효과를 지닌다. 자유자재로 명암을 조절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순성 속에서 인물들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 모든 심리적 효과나 공감효과는 억제되었다. 등장인물들이 내러티브의 메커니즘 속에서 강력한 존재 이유를 지니기에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텍스트에 따라 끊임없이 1인칭과 3인칭을 완전히 분리해 연기해야 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내가 연출한 <혼란(Pasticcinccio)>이나 <카라마조프> 그리고 앞서 언급한 곰브로비치의 희곡에서도 실험한 바 있다. 이러한 성공적이고도 야심에 찬, 끊임없는 안팎의 삼투압 구조가 <리먼 트릴로지>를 흐름성을 지닌 유진 오닐의 <이상한 막간극>에 가깝다고 느끼게 하며 이런 독특한 해결책은 바그너적 특징까지 보이는 <리먼 트릴로지>가 진행되는 동안 생동감 있게 효율적으로 유지된다. 흑인 노예로 유지되던 앨라배마의 '라인의 황금'이 결국 신성을 지닌 경제 지수가 지배하던 월스트리트의 황준에 도달하기까지.  

 

 

스테파노 마시니(Stefano Massini. 1975~)
피렌체 대학교에서 고대 문학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2000년 피콜로 테아트로 디 밀라노(Piccolo Teatro di Milano)에서 루카 론코니(Luca Ronconi)의 조수로, 마조 뮤지칼레 피오렌티노 페스티벌(Maggio Musicale Fiorentino Festival)에서 국제 감독의 조수로 일하며 연극계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L'odore Assordante del Bianco>로 이탈리아 최고 극작상인 피에르 비토리오 톤델리상(Pier Vittorio Tondelli Award)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플라이아노상(Flaiano Prize)을 수상했고 <La Fine di Shavuoth>로 발레코르시상(Vallecorsi Prize) 후보에 올랐다. 2005−2006 시즌에는 칼렌차노(Calenzano) 만초니 극장 소속 연극 센터(Theatre Centre) 여성 극장(Theatre of Women)과 협업을 시작해 ‘우리의 삼부작(Trittico delle Gabbie)’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2008년 경제 위기에 뒤따른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의 사건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가장 야심찬 작품이자 성공적인 작품인 <리먼 트릴로지(The Lehman Trilogy)>를 썼다.

 

Stefano Mass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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