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데커, 토머스 미들턴 공동 집필의 '왈패 아가씨'는 1611년 공공 극장 포춘(The Fortune)에서 초연되었다. 이 초연에서 몰의 실제 모델인 메리 프리스(Mary Frith)가 무대 위에서 남장한 채 류트를 연주하며 노래했다고 하니, 여성의 무대 출연이 법으로 금지되어 소년 배우들이 여성역할을 했던 런던에서 메리 프리스는 공공극장 무대에 등장한 첫 여성인 셈이다. '왈패 아가씨'는 도시희극의 유행 이후 1951년까지는 리바이벌 공연 기록이 없고, 브라이언 기번스나 알렉산더 레가트 등의 도시희극 연구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왈패 아가씨'가 영문학 비평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1990년대에 여성주의 비평이 도래하면서부터인데 근대 초기 영국에서 남장여성은 성과 젠더, 결혼과 계급. 여성성과 남성성 등 다양한 이슈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용한 모티프가 되는바, '왈패 아가씨'의 몰은 그중 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인물로 여성주의 비평의 관심을 받았다. 근대 초기 영국에서 의복은 단순한 옷의 의미만이 아니라 신분과 계급의 척도여서 계급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의복의 옷감이나 장식, 장신구의 종류가 복장법(Suniptuary Law)으로 일일이 정해져 있을 정도였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는 남장은 화려한 옷차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반사회적인 행위였으니, 이는 남장이 당시 사회의 근간인 가부장제에 대한 도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초기 영국에서 가부장제는 가정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위계질서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였고 그런 가부장제의 기본이 남녀 간의 종속관계였으니, 남장은 이러한 남녀 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의도적인 도발과 전복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남장은 제임스 1세 즉위 후 1620년대까지 실제 런던 거리의 유행이기도 했는데, 남장에 대한 각계의 비난은 매우 거세서 심지어 국왕인 제임스 1세까지 이 비난에 가세했다고 한다. 이는 남장이 복장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위계질서를 위협하는 일탈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고, 또한 이를 역으로 보자면 당시의 성과 젠더의 개념들이 상당히 불안하고 유동 적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근대 초기 영국은 인구 증가, 산업 발전. 도시 집중, 교육 확대 등으로 유례없는 사회계급 간의 변동을 겪었고 그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컸던 시기였으니, 남장에 대해 당대인들이 가졌던 거부감은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남장에 투사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남장여성에 대한 당대의 거부감은 '왈패 아가씨'에서 주변 인물들이 몰에게 보이는 상투적인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랙스톤이 몰을 보자마자 성적으로 유혹하거나 오픈워크 부인이 몰과 자기 남편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은 남장여성과 창녀를 동일시하던 당대의 관습적 태도와 일치하고, 알렉산더 경이 몰을 괴물 취급하며 그녀가 도둑일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왈패 아가씨'는 '서문(Prologue)'에서부터 이러한 남장여성의 부정적인 상투형과 몰을 차별화하여 여러 부정적인 유형의 왈패아가씨들을 나열한 후 극중 남장여성 몰은 "더 고상한 날개로 난다.”라고 미리 예고한다. 실제로 극에 등장한 몰은 남장여성이 갖는 부정적 상투형과는 거리가 멀고 실제 모델인 몰 프리스의 수상한 삶과도 다른 옹골지고 당당한 삶을 사는 여성이다. 몰은 남장여성의 부정적 상투형과도 차별화되지만 다른 문학 속 남장여성들과도 다르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남장여성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자 옷을 입고 남자 행세를 하고 결국엔 여성의 자리로 기꺼이 돌아가 행복한 결혼을 이루지만, 몰은 남자로 "변장”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에 의해 남장하고 극의 끝까지 남장을 벗지 않으며 결혼도 거부한다. 즉 몰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남장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남장을 한 것이다. 몰은 자신을 돈으로 유혹하는 랙스톤에게 결투를 신청해 칼싸움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리하고, 여성혐오적인 담론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여성을 웅호하고, 자신을 괴물로 보는 알렉산더 경의 혐오감을 역이용해 세바스찬과 메리의 결혼을 도와준다. 즉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면서도 남성의 특권과 역할을 대등하게 해냄으로써 남성/여성의 이분법으로 규정되는 당대의 성역할과 젠더 개념을 넘어서서 그 이분법의 인위성과 부당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장여성 몰이 워낙 예외적인 인물이고 사회의 위계질서 밖의 인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몸의 존재가 그 위계질서를 공고히 할지언정 위협하지는 않는다. 즉 몰의 언행이 유례없을 만큼 전복적이고 이를 통해 근대초기 런던의 성 역할과 성 개념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만, 이것이 런던의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렇게 몰은 그 독특한 위치와 역할로 인해 '왈패 아가씨'의 시금석 역할을 한다. 몰에게 우호적인 인물들은 젊은 세대인 세바스찬과 메리, 데퍼 와 젊은 귀족들 그리고 정직한 중산층 상인들이고, 그녀에게 적대적이거나 위협이 되는 인물들은 구세대인 알렉산더 경과 데퍼 경, 호색한 랙스톤 정도인데, 이들은 몰로 인해 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각각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구세대의 편견과 탐욕이 몰로 인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면, 신세대들의 공평하고 편견 없는 태도 역시 몰로 인해서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런던의 다양하고 양가적인 세계를 대표한다. 런던은 탐욕스러운 부모와 음란한 한량이 상류층 시민으로 군림하기도 하지만, 똑똑하고 공평한 자식들과 정직한 중산증이 이들을 이기는 곳이기도 하다. '왈패 아가씨'의 선과 악 역시 양가적이어서, 이 극의 진짜 악당은 남장여성인 몰이나 교외의 소매치기들이 아니라 런던을 지배하는 늙은 신사계급이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남장여성 몰이야말로 이 극에서 가장 도덕적이면서도 올바른 인물이다. 즉 '왈패 아가씨'의 런던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신기하고 재미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가장 대표적인 도시희극 작가이자 런던을 가장 잘 아는 런던 시민 출신 작가 토머스 데커와 토머스 미들턴의 '왈패 아가씨'는 앞서 다른 세 도시희극이 보여주는 런던의 양면을 다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극을 공동 집필 한 데커와 미들턴은 가장 많은 도시희극을 집필했고, 둘 다 런던 출신 작가로서 런던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문학작품을 썼으며, 특히 미들턴은 런던 최초의 공식적인 연대기 작가로 일한 바도 있다. 즉 이들은 런던을 가장 잘 알고 런던을 가장 사랑하는 도시희극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그려낸 '왈패 아가씨'의 런던은 '구두장이의 축일'에 나오는 축제적 활기도 있고, '동쪽으로'의 탐욕과 속임수도 난무하며, '각자 기질대로'의 과장된 악당들이 여전히 활보하는 그런 세계이다. 이 런던에서 교외의 범죄자들은 무섭다기보다는 신기한 존재이고 정작 부패하고 끔찍한 것은 런던의 지배계급들이다.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은 런던 중산층의 상인부인이고 가장 정숙한 여성은 남장여성 몰이다. 즉 도시희극 후기작 '왈패 아가씨'의 런던은 선과 악, 헌신과 속임수. 공평함과 차별이 공존하는 혼란스럽고 양가적인 세계이고, '왈패 아가씨'는 그런 런던을 따뜻하면서도 풍자적인 시각으로 구석구석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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