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쥘르 르나르 '홍당무'

clint 2024. 1. 26. 17:28

 

붉은 머리 때문에 홍당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프랑소와는 
사랑에 굶주린 외로운 소년이다.    
방학동안 집에 와있는 홍당무는 어머니의 학대와 멸시에 
점점 자신감을 잃고 집을 나가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의 사냥에 동행할 기대로 들떠있는 홍당무에게 
하녀로 일할 아네뜨가 찾아오고, 
홍당무는 그녀와 긴 대화를 나눈다. 
어머니의 반대로 사냥을 가지 못한 홍당무는 아네뜨의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난생 처음 아버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진정한 화해를 한다.
아버진 홍당무를 별명이 아닌 프랑소와라는 본명으로 불러준다.

 

 

 

홍당무의 어머니는 특별한 이유 없이 홍당무를 미워하고 괴롭힌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항상 바쁘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홍당무는 눈치가 빤하다. 

밥을 먹을 때나 인사를 할 때도 엄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어린 소년은 자신이 감당하기에 삶이 너무도 힘들 때면

자살과 가출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홍당무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가정에서

겉으로 표현을 잘 안 하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우치고

삶에 의미를 찾아가게 된다. 

때로는 엉뚱하고, 아이다운 순진함도 가진 우리 시대 아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동명 소설을 읽고 자란 세대에게 단지 사춘기 소년의 고뇌 정도로 비추어 진다면 큰 오판이라고 말하고 싶다 ( 그 소설은 동화 수준으로 각색되어 있기에 그렇다) 성인들이 꼭 보고 느낄 그런 작품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아도, 작품을 읽어도 그렇고 옛날의 추억이며 아빠 엄마로서의 입장에 공감되어 눈가가 촉촉히 젖어듬을 느낄수 있다. 그리고 무척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는데 작가인 르나르가 직접 각색 하였다고 하니 누구보다 작품의 흐름을 잘 희곡화 하였으리라

 

 

 

뛰어난 작가들을 무수히 배출해낸 프랑스에서도 쥘르 르나르(1864 -1910)만큼 독특한 작가는 그 유래가 드물 정도이다
1894년에 소설 〈홍당무〉가 발표된 뒤, 1900년에 다시 희곡 〈홍당무〉가 발표되자, 르나르는 일약 극작가로써의 명성을 확보했으며, 희곡 〈홍당무〉는 곧 꼬메디 프랑세즈의 정기 레퍼토리로 선정되었다. 한없이 어리석고 고독하고, 그런가 하면 엉뚱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별난 소년 홍당무(주인공의 별명). 이 작품은 바로 그 〈홍당무〉와 가족 사이의 인간관계. 수년에 걸친 애증과 고독 등이 한 시간의 드라마 속에서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파헤쳐지는 희비극이다.
르나르는 사랑의 굶주린 한 소년의 비애와 원한을 분노하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담백한 그의 독특한 표현으로 유머러스하게 그려나간다. 그것은 르나르 자신이 말하듯, 그는 시인의 눈을 가진〈영상의 사냥꾼〉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고 외로우며 때로는 도망하고, 때로는 도전하는 홍당무에게서 우리는 한결같이 그 고독한 영혼에 매혹되고 만다.
〈홍당무〉는 몰이해한 부모와 뼈아픈 고독을 결코 울부짖지 않는다. 그는 냉혹한 현실을 오직 정직하게 폭로할 뿐이다.

쥘르 르나르

 

「홍당무」는 처음 1894년 여러 개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연결해 소설 형식으로 발표되었으며 1900년 이를 다시 작가 자신이 2년여에 걸쳐 희곡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르나르는 메마른 가족관계 속에서 사랑에 굶주린 한 소년의 모습을 냉혹할 정도의 풍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이 이 「홍당무」에서도 염세주의적 경향이 작품 전체에 깔려 있다. 과묵하고 마음속에는 애정을 간직하고 있으나 표현이 없는 아버지, 친엄마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대한 불만을 아들을 냉대함으로써 해소하는 어머니, 그 사이에서 순진하면서도 엉큼하고 때로는 교활하기 까지한 꾸밈이 없는 천덕꾸러기 소년인 주인공을 통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 고통이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동명 영화(193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