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처용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재창작한 작품이다
거센 폭풍에 배가 뒤집혀 뭍에 오른 처용과 그 친구.
이 마을은 갑부할멈이 돈으로 마을을 장악한 곳이다.
그 갑부는 말을 듣지 않던 아들을 광에 가둬 죽인 사연이 있고,
갑부는 처용을 마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만들려한다.
아들의 며느리인 여인에게도 강요한다.
도축업자는 노루를 잡아 마을에 고기를 대주는 일을 하지만 마을
여인들을 꾀어 욕정을 해결하며 나아가 갑부의 돈과 권력을 노린다.
갑부의 며느리인 여인도 그런 그에게 사로잡히고...
처용은 달 밝은 밤이면 밖에 나가 춤추며 노래한다.
마을 사람들은 점점 그 처용이 갑부의 아들인양 대하지만
처용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갑부와, 도축업자의 부정과 불의를 파헤친다.
작가의 변 - 최문정
긴 터널을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겁도 없이 들어선 길. 터널의 끝은 밝음이라는 확신조차 갖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섰을 때, 온 몸은 상처 투성이었다. 인수봉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그 가슴 섬뜩함이 이 작업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날 사로잡고 있다.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는 너무 힘든 길이었다. 하나의 얼굴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자기의 여러 얼굴 중에서, 그렇다면 진정 '나'라고 내세울 얼굴은 또 무엇일까. 자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 그 힘으로 주위를 밝힐 수 있는 그 얼굴을 찾고 싶다. 가을의 덕수궁은 참 곱다. 어스름 저녁이 깔리는 덕수궁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 배 우들의 모습에서 작은 위로를 받는다. 고맙다. 이 힘든 작업에서 주저앉지 않고 열 심히 싸워준 연출과 배우들에게 나의 작은 애정을 보낸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있게 끔 아이들을 봐준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삼국유사에 처용설화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헌강왕이 울산 지역에서 풍경을 감상하며 노닐다가
돌아가는 길에 잠시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왕이 신하들에게 무슨 일인지 물으니 일관(日官)은
"동해 용왕이 꾸민 일 같사오니 선행을 베푸시어 그를 달래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동해 용왕을 위하여 여기서 가까운 곳에 절을 세우도록 하라."라고 명하자
자욱하던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개었다.
그 후로 그 냇가를 개운포(開雲浦)라 불렀다.
동해 용왕은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거느려 왕의 앞에 나와서
"베풀어주신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일곱 아들 중의 하나가 왕을 따라가서 보필하게 되었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은 처용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하고 급간이라는 벼슬도 주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처용의 아내를 사랑한 역신(疫神)은 사람으로 둔갑하여
처용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몰래 아내와 함께 잤다.
처용이 집에 돌아와서 두 사람이 함께 누운 것을 보고,
"동견(東京)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집에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는 내 것이다마는 앗은 것을 어찌할꼬"라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추었다.
깜짝 놀란 역신은 본모습으로 변하여 무릎을 꿇고
"제가 공의 아내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하여 감히 못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저에게 화를 내고 꾸짖지 않으시니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앞으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사라졌다. 이 일이 있은 후 처용은 문신(門神)으로 신격화 되고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문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좋은 일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疫神은 헌강왕때 處容이라는 門神신화가 생성될 수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역병은 두창, 천연두라고 불리는 전염성이 강하며 치사율이 매우 높은 질병으로서 특히 8. 9세기에 동아시아 전반에 위력을 떨쳤다. 이에 중국에서는 종규 등을 비롯한 여러 축역신과 문신들이 그리고 신라에서는 처용이라는 문신신화가 만들어져 유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전 시대까지 극성을 부리던 재해와 전염병이 헌강왕대에 이르러 잦아들면서 조금이나마 사회가 안정되던 것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설화로 보인다. 많은 학자들이 민화의 기원을 찾고자 연구를 했는데, 경주대학교 정병모 교수는 민화의 시작을 이 처용(處容)의 형상(形狀)을 문에 붙이는 '처용 문배'라고 주장한다. "문배(門排)란 정월 초하루 대문에 붙여 잡귀를 막고 복을 불러들이는 용도로 사용된 그림이다. 처용 문배는 처용의 얼굴과 모습을 그린 문배를 가리킨다. 세시풍속으로 본 민화의 시작은 문배이고, 이 문배 가운데 통일신라시대의 처용 문배가 그 첫머리에 해당한다." <한국불교미술사학회 학술저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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