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알렉산드르 푸시킨 '보리스 고두노프'

clint 2023. 12. 29. 14:20

 

 

이 작품의 배경이 된 '동란의 시대'를 살펴보자.

러시아 역사에서 참칭자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가 나타난 1604년부터 미하일 로마노프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1613년까지 약 10년 동안을 '동란의 시대'라 한다. 이 시기에 심한 기근, 모스크바 통치권의 계승 문제, 사회적 무질서로 인한 내란, 참칭자의 등장, 외국의 간섭 등으로 백성의 삶은 황폐해졌고, 국가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참칭자의 출현에서부터 미하일 로마노프가 새 황제로 선출된 때까지 러시아 황제 자리를 둘러싼 암투는 절정에 이르렀다.<보리스 고두노프>에 나타난 사건의 시간은 1598년 이반 4세의 아들 표도르가 죽은 때부터 시작, 1605년 가짜 드미트리가 제위에 오르게 되고 보리스의 아내와 아들이 살해되자 끝난다. 러시아 역사에서 대귀족{보야르)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보여준 '동란의 시대'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한때 그토록 막강한 힘으로 충만했던 러시아가 어쩌다가 그렇게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을까?” 라고 언급한다. 이에 우리는<보리스 고두노프>의 시대적 배경이 된 '동란의 시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1584년 황제 이반4세(재위 1530~1584, 뇌제 또는 폭군이라 불림)가 죽은 후 그를 계승할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다. 이반이라는 총명한 황태자(1554~1581)가 있었지만, 광적인 생활을 하던 이반 4세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쇠 지팡이로 그 아들을 내리쳐 죽이고 말았다. 황제 이반 4세의 제위를 계승할 후손은 심신이 병약한 표도르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미트리라는 두 아들뿐이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태어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이반 뇌제의 일곱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교회법은 세 번의 결혼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병약하지만 첫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표도르가 황제 자리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가 된 표도르는 기도를 하거나 교회 종소리를 듣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황제는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정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정을 이해할 만한 능력도 없었다. 무능력한 황제는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다. 이반 4세 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한 국내 정치적 상황과 황제의 무능력은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국민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들은 늘어나는 부채 부담과 극심한 중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주 지역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작은 토지를 분배받아 생활하던 귀족들의 불평도 점점 심해져갔다. 이처럼 생활환경이 나빠지자 농사짓는 농민의 수효가 점점 줄어들면서 기름진 토지도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상인과 기술자들도 정부가 거두어들이는 무거운 세금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변경지대로 이주했다. 15년이 채 안 되는 표도르의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 중심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국가 질서가 전반적으로 혼란에 빠지자 그늘 속에 가려졌던 귀족계급이 다시 힘을 얻어 독재정치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사람은 타타르의 후예인 보리스 고두노프 였다. 보리스의 누이동생 인리나가 표도르와 결혼해, 보리스가 황제 표도르의 처남이 된 것이다. 어리고 병약한 황제 표도르 대신 손위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섭정을 하게 된다. 고두노프는 학문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었지만, 정치적인 처세술이 뛰어나 주변에 강력한 힘을 구축함으로써 당시 가장 강력한 존재로 등장했다. 사실상 보리스 고두노프가 실질적 황제로서 국가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공식 문서에서 그 '위대한 군주의 처남이자 러시아의 지배자’로 호칭되었다.
둘째 아들 드미트리는 고두노프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북방에 있는 작은 마을 우글리치에서 호위병의 경호를 받으며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1591년, 겨우 여덟 살밖에 안된 어린 드미트리 황태자가 목에 칼을 맞아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다. 그 즉시 고두노프는 진상 조사단을 우글리치로 보냈고, 얼마 후 조사단은 드미트리가 조그마한 손칼을 가지고 놀다가 간질발작을 일으켜 실수로 그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바실리 슈이스키를 대표로 하는 진상 조사단은 그의 죽음을 단순사고사로 결론내렸다. 이 사건은 보고내용을 그대로 인정해 마무리되긴 했지만, 의문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드미트리가 고두노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문은 고두노프에게 그리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두노프의 반대자들은 계속해서 그가 제위에 오르기 위해 드미트리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1598년에 사망한 황제 표도르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고두노프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고두노프는 비록 섭정을 통해 권력을 잡고 제위에 올랐지만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용기와 애국심이 있는 인물로 러시아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통치자였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계속된 대기근으로 10만 명이상이 사망하자 민심은 흔들렸고, 이와 때를 같이해서 대귀족들 역시 반감을 갖고 그의 권좌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때 자기가 죽은 드미트리 황태자라고 주장하는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자객들을 피해 살아남은 진짜 황태자라고 주장했으나, 사실은 추도프 수도원에서 도망친 수도사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였다. 당시 고두노프를 시기하던 귀족들은 오트레피예프로 하여금 자신이 드미트리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다음 폴란드 귀족들에게 소개해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를 만나게 했다. 참칭자 드미트리는 폴란드 왕과 귀족에게 도움을 청했고, 만일 자기가 러시아 황제가 되면 러시아 남부 지역 일부를 넘겨주고 러시아를 동방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겠다는 약속을 한 대가로 폴란드에서 병력을 지원받았다. 1604년 오트레피예프는 폴란드 군대와 함께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농민과 도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더욱이 지방 관리들까지 합세해 그가 이끄는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다. 설상가상으로 1605년 보리스 고두노프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아들 표도르가 제위에 올랐다. 대세를 알아차린 모스크바 귀족들은 몽골- 타타르족의 피가 섞인 것으로 알려진 고두노프가문을 전복시키기 위해 참칭자 편에 가담했다. 마침내 모스크바에 입성한 오트레피예프는 황태자 드미트리의 죽음을 조사했던 슈이스키에게 진상을 발표하게 했다. 슈이스키는 붉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당시 상황에 대해 "고두노프가 보낸 자객이 죽인 사람은 드미트리가 아니고 한 수도사의 아들이었다."고 진술했다. 이에 석분한 군중은 크렘린 궁으로 몰려갔고, 고두노프 일가는 황궁을 버리고 피신했다. 참칭자의 지지자들은 고두노프의 일가친척을 살해한 뒤 그들이 음독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가짜 드미트리는 당당하게 크렘린 성에 입성했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가짜 드미트리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는 약속대로 폴란드 귀족에게 정부의 주요 관직을 내주었고, 호화 주택과 금은보화를 주었다. 자기에게 협력한 병사들에게 나랏돈을 나눠 주었다. 국가 질서가 무너지고, 오트레피예프의 부하들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이 곧 법이었고, 물건은 물론 여자까지도 마음대로 빼앗아 갔다. 참칭자 오트레피예프는 자기를 도와준 폴란드 귀족 므니세크의 딸 마리나에게 청혼하는 한편 고두노프의 딸 크세니아에게도 추파를 던졌다. 마리나 므니세크가 결혼식을 마친 후 향연은 연일 계속되었다. 사회 전체가 무법천지로 변하고, 국민들의 원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교활한 간신 슈이스키는 모반을 도모했다. 그는 국민의 원성을 이용해 참칭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직접 권좌에 앉아 통치하고자 했다. 국민과 대 귀족들은 참칭자에 대한 반감을 일시에 폭발시켜 참칭자와 그의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슈이스키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번에는 귀족들의 변혁을 주도했던 바실리 슈이스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반 4세가 죽은 지 22년 만에 옛 귀족 계급이 다시 모스크바 대공국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슈이스키를 따르는 무리와 반대하는 무리가 나뉘어 대립하게 되고, 이때 키예프 동북부에 있는 도시 푸치불에 제2의 참칭자가 등장했다. 그는 자기가 진짜 황제 드미트리라고 주장하고 전국을 민중봉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이름은 이사예비치 볼로트니코프였다. 그는 카자크 인으로 전쟁 포로출신이었고, 지혜롭고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그가 차르를 참칭해 도시에 나타나자 끊임없이 내란에 시달리던 러시아 농민과 일부 카자크 인들이 그의 편에 가담했다. 카자크 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들과 러시아정부의 압제에 못 이겨 도망갔던 농민, 상인, 노예 등이 그를 환영했다. 그리하여 그는 쉽게 수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소유할 수 있었다. 볼로트니코프의 군대는 100일도 채 되지 않아 모스크바 가까이 접근해 슈이스키의 정부군과치 열한 공방전을 치른 후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 혼란이 수습되는 과정에서도 폴란드는 재차 간섭했다.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이 사나이는 이번에도 자기가 귀족 반란 중에 기적 적으로 살아남았다는 소문을 유포했으며, 새로 구축한 진지에서 첫 번째 참칭자의 미망인 마리나와 결혼까지 했다.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모스크바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국경 부근에 본영을 세워 러시아 정부를 계속 협박하다가 그해 말에 동료에게 살해되었다. 슈이스키의 정책에 대한 모스크바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폴란드와 스웨덴이 러시아내정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슈이스키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외세를 이용하고자 스웨덴과 군사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이 동맹은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슈이스키를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에 상륙한 스웨덴 군이 노브고로드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슈이스키가 조카이자 총사령관인 미하일 스코빈슈이스키를 독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귀족들은 귀족 회의를 소집해 슈이스키를 퇴위시켜 버린다. 이로써 러시아는 또다시 통치자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폴란드 군과 스웨덴 군이 러시아에서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으며, 이들과 러시아인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 전 국민이 일어나 외세에 강하게 저항했다. 마침내 러시아 군은 폴란드 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1613년에 미하일 로마노프가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오랜 '동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러시아역사와 문학에서 참칭과 사칭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 되어 왔다. 우리말로 참칭으로 번역되는 러시아어 '사모즈반스트보'는 '제멋대로 스스로 왕이라고 일컬음'을 뜻하며 '왕이나 정부를 참칭하다'와 같은 문장에서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참칭'은 거짓 왕이나 거짓 정부를 지칭하는 칭호다. '사창이라는 말은' 이름이나 직업 따위를 거짓으로 속여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주로 개인에게 붙여진다. 참칭과 사칭은 같은 의미이나, 일반적으로 사용자에 따라 의미의 지평이 조금씩 달라진다. 앞에서 우리는 황제를 참칭하는 가짜 드미트리가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았다. 16세기 "동란의 시대"에 시작된 가짜 드미트리 1세와 2세의 출현은 러시아 역사의 어두운 측면이었다. 두 사람의 가짜 드미트리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일시적이나마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러시아에 대한 침입과 간섭을 계획한 폴란드의 야망과 더불어, 농노제를 강화하고 상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을 택한 고두노프 정권에 대한 대 귀족과 러시아 민중의 반항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참칭 문제는 문학에서도 작가들이 좋아하는 모티프였다. 18세기 극작가 수마로코프의 비극<참칭자 드미트리>. 푸시킨의<보리스 고두노프>와 《대위의 딸》, 고골의《검찰관》은 모두 참칭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보리스 고두노프>는 이후 역사 드라마의 지류를 형성한 근원지로 평가된다. "17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러시아에서 새로운 참칭자의 출현 없이 2, 30년이 지나간 적은 없다"라는 러브조이의 말처럼 참칭 문제는 푸시킨과 고골이 활동하던 시대의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러시아의 참칭 문제를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통찰해 볼 필요가 있다. 푸시킨의 드라마투르기 형성 과정에서 참칭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칭은 역사의 반복성과 인간 심리의 보편성에 대한 문제로 나타난다. 푸시킨은 의도적으로 참칭 문제를 부각하고 있다.
첫째로<보리스 고두노프>에서 오트레피예프의 참칭 연기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도 탁월하게 인정을 받는다. 추도프 수도원의 수도사 오트레피예프는 피멘의 모범적인 제자였다. 그는 수도사 제복을 입고 금욕하며 살기엔 너무 젊고 의욕에 넘친다. 그는 수도사로서의 고통을 호소하며 참칭의 뜻을 품게 된다. 수도사로 일생을 마치기엔 너무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기에 그는 참칭자로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을 실행에 옮긴다. 폴란드 귀족들 앞에서 수도사가 아닌 러시아 황족의 피를 가진 자로서 연기하고, 마리나 앞 에서는 열정적인 애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의 연기가 절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위기의 상황에서다. 리투아니아 국경의 선술집에서 자신의 인상착의가 적힌 수배 전단지를 보고 마치 바를람의 인상착의가 적혀 있다는 듯이 연기한다. 정체가 탄로나자 순식간에 칼을 든 난폭한 폭도로 변한다. 그의 연기력은 홀레스타코프처럼 천재적인 대담성과 즉흥성에서 나온다. 참칭자로서 그의 연기는 역사와 정치에 나타나는 참칭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나타낼 정도로 탁월하다. 둘째로 푸시킨은 참칭자의 특성을 이름 변조를 통한 정체성 문제로 다루고 있다. 푸시킨은 오트레피예프에게 붙여진 다양한 이름의 변신을 통해 참칭의 속성을 잘 드러낸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추도프 수도원과 그다음 리투아니아 국경지대 술집에서는 그리고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비시네베츠키의 집에서 그의 명칭은 참칭자로 바뀌었으며,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지도력을 획득한 노브고로드 평원에서는 잠시 드미트리로 불리다가, 다시 셉스크의 패배 이후 숲 장면에서는 가짜 드미트리와 참칭자라는 명칭으로 동시에 불리고 있다. 셋째로 푸시킨은 정치에서 참칭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첫 장면에서 네 번째 장면까지 고두노프는 황제 등극을 사양하다가 마침내 내키지 않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이를 수락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는 황제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대귀족과 백성의 믿음을 얻어내기 위한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귀족 슈이스키는 사기꾼들이 쓰는 전형적인 수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러시아인에게 '동란의 시대'는 특별한 역사시대였다. 푸시킨의<보리스 고두노프>는 '동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쓴 역사드라마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고 과거에 일어난 일을 다루지만, 역사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적인 이야기를 덧붙여 만들어진다. 역사는 민족이나 집단의 운명을 추적하고 드라마는 역사적 인물의 개체적 운명을 추적한다. 역사와 드라마의 보편적 특성을 살려 정의해 보면, 역사 드라마는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상상력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고난과 피의 역사를 체험한 러시아인에게 역사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의지로 죄우 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었다. 어쨌든 러시아 민족적 차원에서든 개인적 차원에서든 역사는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외적 조건이요. 불가항력적인 힘인 것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고두노프의 고뇌와 몰락 및 러시아적 현상 또는 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참칭의 문제를 흥미 있게 다루고 있는 역사물이다. 이 드라마에 나타난 푸시킨의 역사의식과 참칭의 메커니즘은 텍스트 이해의 지평을 확대해 준다.
푸시킨의 창작 단계를 시기 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왕실귀족학교 리체이 시절(1813~1816), 둘째로 페테르부르크 시절(1817~1820), 셋째로 남부지방 유형시기 (1820~1824), 넷째로 미하일롭스코예 유형시기(1824~1826), 다섯째로 1820년대 후반창작시기(1826~1830), 여섯째로 볼디노의 가을창작시기(1830), 일곱째로 1830년 대창작시기(1831~1837)다. 푸시킨은 어머니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에 2년간 머물면서 창작의 시야를 넓혀 역사드라마를 구상했다. 카람진의 《러시아국가의 역사》(전12권, 1816~1829)를 읽으면서 푸시킨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라 할 수 있는 '동란의 시대'(1604~1613)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카람진의 역사서《러시아 국가의 역사》 제10권과 제11권을 기초로 했으며, 푸시킨은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데 카람진의 해석을 따랐다. 카람진은 역사서의 첫 페이지에서 "질서를 세우고 사람들의 이익을 조화시키며 그들에게 지상에서 가능한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라 표명했다.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옹호한 작가이자 역사가인 카람진은 고두노프를 비극적인 인물, 과거 때문에 고통 받는 진보적인 통치자,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정치적 필요와 양심 사이의 괴리 때문에 파멸하는 나약함을 보여준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푸시킨이 역사성과 사실성에 집착해 작가적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1831년 초판본의 제목이고, 그 이전 1825년에 쓰인 초고 제목은<황제 보리스와 그리슈 카오트레피예프에 대한 희극>이었다. 완결된 초고는 25장으로 이루어졌으며, 초판본은 6장과 14장이 빠져 23장으로 되어있다. 초판본에는 초고와 비교해 빠지거나 덧붙여진 부분들이 조금 있다. 초고가 출판되지 못한 것은 황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허락을 받아 출판할 당시에 푸시킨은 이 작품이 무대에서 공연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는 독자에게 읽히는 희곡으로서의 기능을 고려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 소설이나 역사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되기가 매우 어려운 장르다. 어떤 특정한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해 작품을 쓸 경우, 그의 삶이 이미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규명되어 있는 까닭에 그 일대기를 쓰려는 작가는 이야기 선택의 폭이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시킨의<보리스 고두노프>는 역사문헌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들의 삶을 그리면서도 역사적으로 결정을 앞둔 상태에서 그들이 겪는 인간적 고뇌라든가, 사회적 역할과 개인적 인간관계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 같은 것이 아주 깊이 있게 그려져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역사적 인물들이 더욱 인간적이고 친숙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보리스 고두노프>는 역사의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 경험했을 심리적 실존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 줌으로써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좀 더 그럴듯하게 알려 준다. 이 역사 드라마는 역사적 사건의 전말은 물론이고 역사적 순간을 살았던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푸시킨의 예술 창작 특성은 과감한 예술적 실험을 통한 혁신적인 도전 정신이다. 그의 도전 정신은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예술작품은 19세기의 기념비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작가들에게까지도 무한한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푸시킨의<보리스 고두노프>에 나타난 다양한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은 형식적 특성이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희곡과는 달리 연극에서 내용의 큰 단락을 구분하는 단위인 막 없이, 총 23장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막이 없이 일련의 장 또는 에피소드의 연속으로 구성된 희곡도 흔히 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막과 장의 구별이 없는 희곡은 거의 없었다. 또한<보리스 고두노프>는 당대의 형식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고전주의의 삼일치 법칙(시간, 장소, 행위의 일치)에서 벗어나 있다. 작가가 실험적인 형식을 사용한 것이다. 전통적인 규범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러나 전통적 규범에 불만을 느껴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 푸시킨의 문학적 실험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각운이 없는 무운시(無韻詩)로서 약강 5음보격(강약8보격, 산문으로 된 장면도 있다)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러시아 민속 시에서 유래했으며, 이후 블로크나 안나아흐마토바의 시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지금까지도 이 작품의 형식적 구조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동시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대화로 된 역사의 조각", "역사적인 장면들’’, 그리고 "단편들”이라고 부르면서 "통일성의 부재"를 단점으로 지적했다. 둘째로 읽기 위한 희곡이라는 특성이다. 무대 공연보다 는 읽을거리로 쓴 극을 서재극 (書齋劇), 또는 클로짓 드라마 (Closet Drama), 또는 클로짓 플레이(Closet Play)라 부른다. 그리고 공연보다는 문학적으로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쓰인 희곡을 레제드라마라 한다. 공연을 전제로 하는 일반 희곡과는 달리 읽기 위해 쓴 희곡이기 때문에 사상적, 문학적 요소를 더 중시한다. 셋째로 언어적 특성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푸시킨은 근대 러시아어 규범을 확립하는 동시에 완성했다. 푸시킨은 지배계급의 언어와 민중 어를 적절하게 사용해서 당대 표준어의 실례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지배계급의 언어란 교회 슬라브어와 프랑스어를 말하고, 민중 어는 일반 국민이 사용하는 보통 언어를 말한다. 그리고 푸시킨은 작품에서 다양한 신분과 계급에 따라 적절한 언어 감각을 잘 드러낸다. 슈이스키와 보리스 고두노프는 상류층 언어를 사용하고, 성(聖) 바보는 성경적 언어를 구사하고, 민중은 개성에 따라 민중 어를 사용한다. 수도사들의 어투도 특징적이다. 리투아니아 국경의 선술집에서 보여준 수도사들의 거친 언어는 흥미롭다. 또한 드미트리의 호칭(그리고리, 가짜드미트리, 참칭자)이 변함에 따라 그의 성격의 발전 상태가 잘 드러난다. 푸시킨의 창작은 형식 및 언어 차원에서 언제나 미래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넷째로 장르적 특성이다. 푸시킨은 근대 러시아문학의 장르적 기틀을 확립한 동시에 완성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창작열은 언제나 새로운 형식과 장르 실험으로 나타났다. 그의 장르에 대한 실험 역시 '시작의 시작'이었다. 이 작품은 비극으로, 그것도 낭만주의 적 비극으로 간주된다. 흥미로운 것은 1825년 초고의 제목<황제 보리스와 그리슈카 오트레피예프에 대한 희극>에 나타난 장르는 희극이었으나, 1831년 최초 출판 당시의 제목<보리스 고두노프>는 '비극'이라는 부제가 붙는다. 같은 내용의 작품을 푸시킨은 희극으로 또는 비극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섯째로 예술사조의 복성이다. 비평가들의 말에 따르면 푸시킨의 작품은 비극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가 공존하는 낭만주의 작품이다. 귀족들은 비극적 요소를 보여주고, 민중은 희극적 요소를 보여 준다. 문학적 낭만주의는 러시아 문학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러시아의 민족적 자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자기 민족의 역사적 운명과 역사적 사명에 대해 숙고하고 역사철학에 몰두하게 만들었다.<보리스 고두노프>에서도 민중이 주체로 등장하면서 민족 및 종교적 각성과 대립이 나타난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대립, 정교회와 가톨릭의 대립이 작품에서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참칭자는 가톨릭 사제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보중하건대 2년 안에 모든 러시아 백성과 북방 교회 전체가 표도르의 대리인, 가톨릭 교황의 권력을 인정할 겁니다.” 참칭자와 교활한 귀족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사리사욕에만 몰두한다. 폴란드는 대표적인 외부 세력으로 러시아 내정에 깊게 관여한다. 가짜 드미트리는 폴란드 왕에게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약속한다. 반면에 어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사실주의 작품이라고 간주한다. 작품의 핍진성에 대한 푸시킨의 견해에 따르면 드라마는 실제적 리얼리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장인물인 늙은 수도사 피멘 역시 리얼리즘적 요소를 다분히 제공하고 있다. 푸시킨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을 정초한 작가로 간주되고, 그의 영향을 받은 고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엡스키는 러시아 리얼리즘 소설을 완성한 작가들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심리주의 드라마로도 평가된다. 특히 보리스의 심리적 분열이 잘 나타나있다.

 

 

 

푸시킨 전문가들은<보리스 고두노프>를 어떻게 이해하고 분석할까? 소비에트 시점 대다수 비평가는 이 작품에 나타난 민중성과 역사성 연구에만 몰두했다. 반면에 서구 비평가들은 셰익스피어 모티프나 희곡의 형식적 특성 분석에 집중했다. 일반적으로 서구 평론에 따라<보리스 고두노프>에는 당시까지 유행하던 프랑스풍의 희곡과는 다른 세익스피어 풍의 낭만적 비극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문학사가 드미트리 치젭스키는 《슬라브 문학사》에서<보리스 고두노프>를 낭만주의 시기의 대표적인 드라마로 설명하고 있다.
드라마 문학은 일부 세이스피어적인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다. 드라마는 막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여러 조역들. 그중에서도 하류층 사람들을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고전주의 드라마의 시간과 장소의 일치와는 반대로 이 낭만주의 드라마는 사건의 장소를 바꾸고, 사건의 진행 시간을 늘렸다. 무엇보다도 진지한 장면과 우스운 장면을 섞은 점은 고전주의 시학에 대한 근본적인 반발이었다. 누구보다도 푸시킨이 자신의 작품<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하고 있다. 동료들이 이 작품의 성공을 이야기했지만, 푸시킨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실 그는 독자나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로 밝혀졌다. 그의 동료 카레닌은<보리스 고두노프>를 극단적으로 혹평했다. 이 희곡은 드라마가 아닐뿐더러 미적 요소가 전혀 없는 습작 수준의 작품이기에 무가치한 글이라고까지 평했다. 다른 비평가들 역시<보리스 고두노프>는 통일성이 없고, 역사적인 장면만 산만하게 나열한, 결점 많은 작품이라고 했다. 벨린스키 역시 양가적인 비평을 했다.<보리스 고두노프>가 탁월한 예술성을 보여 주지만 여러 가지 결점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푸시킨의 천재성에 비해 결정적으로 패배한 작품이란 것이 그의 논조다. 키레엡스키는<보리스 고두노프>를 '관념 드라마' 또는'철학적 비극'으로 간주하며, 작품의 형식적 특성을 인정했으나 장면 사이 의 연결성이 없음을 지적했다. 블라고이는<보리스 고두노프>의 건축적 구성을 연구 분석하고, 고두노프와 참칭자를 양 날개로 한 구조적 대칭성을 강조했다. 미르스키는 이 작품이 극적인 행동보다 서술체적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연극으로 상연되기보다는 읽기에 더 훌륭한 '서재극'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당대 비평가들이 모두 부정적인 견해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소수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옹호했다. N. 나데주딘은 보리스 고두노프가 중간에 죽은 것은 통일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한 찬반의 논쟁적 담론은 현재까지도 계속된다. 혹자는<보리스 고두노프>를 심리 드라마로 평가한다. 혹자는 브레히트의 역사극과 연관시키거나 영화의 몽타주 이론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도<보리스 고두노프>에 나타난 푸시킨의 코드를 완벽하게 풀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푸시킨은 러시아의 미래임이 틀림없다. 한편 공연 예술가들은<보리스 고두노프>를 어떻게 무대에 올리고 평가할까? 이 희곡 작품은 발표된지 40년이 나 지난 1870년에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펠드만의 평가에 따르면 그 공연은 가장 심각한 모순을 노출한 어리석은 시도 중 하나였다. 그 후 메이예르홀트가 1924년과 1937년에,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1930년대에<보리스 고두노프>를 무대에 올렸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보리스 고두노프>는 아무리 문학성이 탁월한 희곡 작품이라 해도 문학성과 공연성은 다른 것임을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