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외된 폰 호르바트 '우왕좌왕'

clint 2023. 12. 30. 18:01

 

 

 

 

 

익살극 <우왕좌왕>은 두 나라 국경 사이를 흐르는 강의 다리 위에서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한 남자를 보여 준다.

하블리체크는 왼쪽 나라에서 "반세기” 동안 살았으며 "30년”이나 세금을 내 온

조그마한 약방 주인이었으나, 이제 파산한 이방인이라고 강제로 추방당한다.

그는 왼쪽 나라 국경 관리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지만 통하지 않고

건너편 오른쪽 나라로 쫓겨난다. 오른쪽 나라는 하블리체크가 출생한 나라,

즉 그의 고향으로 바로 그곳에 그의 거주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블리체크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 나라 국경 검문소로 가서 국경을 통과하려고

하지만, 이 나라 법이 이미 오래 전에 개정되었다고 한다.

하블리체크는 외국에 오래 체류하면서 신고기간을 놓쳤기 때문에,

거주권을 상실한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나라로도 입국할 수 없다.

그는 다리 위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국경 경비대에 사정해 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다리 위에 머물며 밤을 지새우게 된다.

이 밤중에 다리 위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우선 왼쪽 나라 경비대원의 딸 에바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른쪽 나라 젊은 경비대원 콘스탄틴을 만나러 간다.

또 하블리체크의 딱한 사정을 옆에서 알게 된 오른쪽 나라 여관 여주인은

그를 동정해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한편 양쪽 나라 수상들이 가짜 여권을 갖고 위장한 채

이 한적한 다리 위에서 비밀리에 물밑회담을 하려하고,

마약 밀매꾼들도 외딴곳에 있는 이 다리를 이용하려 한다.

수상들의 비밀회담은 하블리체크를 상대편 수상으로 오인해

기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간다.

그동안 하블리체크는 오른쪽 나라 수상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수상들이 떠난 다음에는 마약 밀매꾼들이 등장해 방해가 되는 하블리체크를 

강물에 던져 버린다. 그들은 이미 콘스탄틴과 에바를 결박해놓고 왼쪽 검문소를

통과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물에서 나온 하블리체크가 콘스탄틴과 에바를 풀어주고,

함께 마약 밀매꾼들을 쫓아 콘스탄틴은 밀매단을 체포한다.

하블리체크는 마약 밀매단 체포에 걸려 있는 거액의 상금을 받지만,

그 반을 에바와 콘스탄틴에게 양보한다.

사윗감이 가난하다고 결혼을 반대했던 에바의 아버지는

상금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결혼에 동의한다.

이때 여관여주인이 전 수상의 전보를 가져온다.

전보에서 전 수상은 퇴임 전 마지막으로 지시를 내려 하블리체크의 국적회복을

승인한다. 하블리체크는 여관 여주인과도 미래를 약속한다.

행복한 두 커플의 탄생과 함께 작품은 막을 내린다.

 

 

 

 

 

호르바트는 이 작품에서 실로 새로운 실존에 대한 개인적 고민 일부를 진심으로 쓰고 있고, 아무데도 정착할 곳이 없는 과도기로서, 중간 상태, 난관극복 상태로서 실존에 대해 쓰고 있다. 작품 속 하블리체크의 호소는 거의 모두 호르바트의 호소라고 볼 수 있다. 콘스탄틴과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고국에 입국하지 못하자 하블리체크는 말한다. "그럼 끝냅시다. 이젠 나도 더 이상은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럼 이제 다리 위에 있겠소! 다리 위에서 자겠소, 알겠소?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해가 뜨나, 달이 뜨나! 당신들은 그걸 보게 될 거요, 당신들은! 여기서 다리는 이곳도 저곳도 아닌, 아무 데도 아닌 곳이고, 국경 경비대원 콘스탄틴은 그를 그리로 쫓아낸다.
"오래 살아서 익숙해진 나라를 이렇게 떠나야한다면…" 하는 생각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베를린과 그에게 결정적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독일이란 나라를 향한 마지막 시선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한 피날레 첫 연에 들어 있는 작별 인사에서 그는 다시 용기를 얻는다.
"이런 순수한 기쁨이 있다는 것 내가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니! 갑자기 경계선이 무너지고.
나는 다른 사람 모두와 함께 전혀 알지 못하는 옛 고향에서 살 수 있다네, 경계선 없이 사랑하는 고향에서!
풍자와 유머로 가득 찬 이 익살극은 1934년 12월 18일 취리히에서 초연해 크게 성공한 이후, 1948년 핀란드에서 테오 링겐(Theo Lingen) 감독과,1954년에 독일 에리히 가이거 (Ericl Geiger)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외된 폰 호르바트는 1933년 익살극<우왕좌왕>과<센 강에서 온 미지의 여인>작업을 마무리하지만, 계획한<믿음 사랑 소망>의 초연이 그해에 집권한 나치에 의해 저지당하고, 독일 무르나우에 있던 부모의 집이 수색 당하자, 헝가리 국적을 가진 그는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도피한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는 더 이상 그의 작품은 공연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사이에 그는 오랫동안 떠나 있던 헝가리 국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여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그는 여가수 마리아 엘스너와 결혼도 하지만 이 결혼은 다음해에 끝난다. 호르바트의 독일 추방, 결혼 실패와 같은 이런 실제 삶은 그의 익살극<우왕좌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점은, 이 극이 1934년 12월 13일 취리히 사우슈 필하우스에서 구스타프 하르퉁(Gastav Hartung) 연출로 초연되었을 때 이미 드러난다. 이때 공연 프로그램 소책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우리가 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막 여행 가방을 싸고 있었다. 그는 15년간 외국에서 살았는데, 이제 가급적 빨리 부다페스트로 떠나야 했다. 헝가리 국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였다. 다행히도 그는 15년 기간이 만료되기 하루 전날 그 일이 떠올랐다. (중략) 호르바트는<우왕좌왕>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도장 찍힌 인쇄 서류의 위력을 멋지게 풍자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훨씬 그 이상의 것이다. 즉 아무데도 갈 수 없어서 다리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그 남자는 거의 하나의 상징이다. 그는 거의 호르바트 자신이다, 여행 가방을 싸면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마음속에는, 고작 개인적인 작은 동경을 품고, 얼굴은 움직이지도 않고, 겉으로는 아무것에도 동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호르바트는 수십 년 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에 와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가목록에 들어가고, 크뢰츠, 슈페어, 투리니 같은 이 시대 신 민중극 극작가들의 본보기가 된다. 그가 상황을 묘사하고 정확히 분석하는 방법은, 개인의 운명을 일반적인 사회적 위기의 징조로 묘사하는 것과 같고, 현실성 있으며 시대에 부응한다. 그는 자기 작품을 “민중극”이라 부르면서 사회 비판적 시대극을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시킨다. 시대극은 계몽적인 인상을 줘야하고 “의식의 정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충분히 의식적으로 오래된 민중극을 형식적으로, 윤리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민중극 형식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이때 나는, 고전적인 민중극 작가들보다 민중 가수와 민중 희극 배우의 전통에 더 많이 의지한다." 그가 말한 전통은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있었던 인플레와 대량 실업 시대에 나온 당대 연극들이다. 호르바트는 소시민들의 일상에서 드러난 실상을 그린다. 궁핍과 삶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들은 범죄자가 되거나 사악해진다. 때로는 사상도 팔고 나치 정권에서 거수기가 되고 동조자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등장인물 들이 겪는 절망과 곤경은 그들이 사용하는 절망적인 언어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호르바트는 그런 언어를 "교양 은어" 라고 정의한다. "오늘날 인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으려면, 교양 은어를 말하게 해야 한다. 교양 은어와 그 원인들은 당연히 비판을 도발한다. 그렇게 신 민중극의 대화가 발생하고 극적 사건이 생긴다. 진지함과 반어의 종합이다.”

 

 

 

 

 

호르바트가 묘사하는 소시민들은 오직 상투어로, 공허한 사고 모형에 따라, 틀에 박힌 말로만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비개성적이고, 내용 없고, 의식과 사고를 위축시키는 고정된 표현방식이다. 또 이런 등장인물들의 갑갑하고 소외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언어 상실이다. 이 소시민들이 극 중에서 아무리 유쾌하고 기분 좋은 것을 경험한다 해도 감동과 값싼 감상 등 정이 넘쳐흐르는 얼굴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잔인성과 비열함을 호르바트는 보여 준다.
호르바트는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표현주의 경향을 띤다.<모렌 골목의 살인>(1923~ 1924)은 탕아에 대한 멜로드라마다. 가족을 구하기 위해 주인공은 보석상에 들어 가 강도 살인을 저지른다.<산상철도>(1926)에서는 한 갱부가 공명심과 이익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죽음을 맞을 때 일어나는 노동자 소요를 다루고 있다. 희극<전망이 좋은>(1926)에서는 인플레 때문에 경제력을 잃은 남자들이 유산을 상속받기로 되어 있는 젊은 크리스티네를 얻기 위해 야비한 술책을 쓰며 서로 싸운다.<슬라데크, 검은 제국 군인>(1930)에서는 처음으로 정치적 현실을 다룬다. 비밀재판으로 극우파 의용군을 살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동시에 젊은 실업자 슬라데크가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는 오직 먹고살기 위해 "나치스 신봉자들"과 결탁하고, 여자 친구가 위험인물로 몰려 제거되는 것을 보며, 파시즘을 위해 행진한다.<의회주변>(1928~1929)은 성매매업과 투쟁하기 위한 회의를 다룬 익살극으로 사무총장들과 전권 대리인들이, 자신들이 타도해야 한다는 포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성매매 업으로 이익을 얻고 있음을 풍자했다. 그것은 실제로 "다민족동맹의 해"에 열렸던 여러 회의들에 대한 공격으로, 그 회의들이 결실 없이 낭비도 많고 자기들끼리만 관리해 실패했음을 비판한다.<이탈리아의 밤>은 1931년 시프바우어담 극장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적 상황, 좌파와 우파 사이의 잠재적 시민전쟁, 민주주의 붕괴과정 등을 단골주점에서 일어나는 익살극으로 만들어 사회적인 충격을 주려고 시도한다. 마을 차원에서 일어나는 파시즘과의 대결을 보여 준다. 호르바트는<빈 숲속의 이야기>(1931)와<카지미르와 카를리네>(1932)로 작가로서 결정적인 인정을 받는다.<빈 숲속의 이야기>는 독일 대표 극장인 '도이체스테아터'에서 하인츠 힐페르트가 막스 라인하르트 극단 배우들과 공연했다. 이 작품에서 호르바트는 "아름다운 도나우 강변"의 "조용한” 골목과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어나는 협박, 구타, 사기, 영아 살해를 그리며, 비판적 사실주의라는 의미에서 현대 드라마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작품을 만든다. 그는 이 작품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한다. <카지미르와 카를리네>는 뮌헨 옥토버 페스트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슬픈 사랑 이야기다. 사람들이 너무 불행해져서 사랑과 인간성이라는 사치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망명 시기에 나온 그의 작품들은 민중극이라기보다 우화에 가깝다.

 

 

 

<센 강에서 온 미지의 여인>(1933)은 비합리성을 가미한 교회 극이며,<하늘을 향해>(1934)는 악마에게 끌려가는 어느 극장장에 관한 현대판 신비극이다.<우왕좌왕>(1934)은 여권 없이 두 나라국경 사이에 있는 다리 위에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잡화상 주인에 관한 비극적 익살극으로 나치에게 계속 쫓겨 다니던 호르바트가 자기 상황을 가차 없이 풍자한 작품이다.<믿음 사랑 소망>(1932)은 합법적인 허가증 없이 행상을 했다고 처벌받고 실직한 뒤, 약혼자에게 버림받고 물에 뛰어드는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돈 후안 전쟁에서 돌아오다>(1936)와<피가로 이혼하다>(1937)에서는 고전적인 소재를 현대로 옮겨 놓는다. 〈남자들 없는 마을>(1937~1938)에서는 민족의 광기와 박해라는 현실적 주제를 역사적으로 변화가 많았던 헝가리로 배경을 옮겨 표현했다.<최후의 날>(1935)에서는 어느 하급 철도 관리가 잘못해서 일어난 사고로 열여덟 명이 죽는데, 그는 여자 증인 아나로 하여금 위증하게 해 자신의 죄를 숨긴다. 그러다가 과거로부터 벗어나려고 공범자를 살해한다. 결국 그는 법정에 서게 된다. 교회극으로 끝나는<폼페이, 지진 코미디>(1937)에서 로마 노예 톡실루스는 불의의 사회에서 오직 사기를 쳐야만 사랑과 인간다움에 대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다. 그는 체포되고, 사람들은 그를 사자들 앞에 던지려고 한다. 처음에는 화산폭발로 인한 생지옥과 새로운 기독교 질서에 대한 희망이 그를 살아남게 한다. 세계 전쟁에 대한 공포를 고대 세계로 옮겨 조명한 작품이다.

 

 

외된 폰 호르바트

 

 

작가 소개
외된 폰 호르바트는 1901년 12월 9일 피우메에서 태어나 합스부르크 다민족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굴곡 많은 청춘기를 보낸다. 크로아티아 왕국 항구도시 피우 메에서 헝가리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외된 요제프 폰 호르바트와 어머니마리아 룰루 헤르미네 프레날 사이에서 태어난 호르바트는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자주 거주지를 옮겼다. 아버지는 소귀족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군의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02년에 베오그라드로, 1908년에는 부다페스트로 이사한다. 여기서 호르바트는 가정교사에게 헝가리어로 교육을 받는다. 1909년 아버지는 뮌헨으로 근무지를 옮겼으나 호르바트는 부다페스트에 남아 대주교가 관할하는 기숙학교에 다닌다. 1913년에 뮌헨에 있는 부모에게로 가서 처음 독일어를 배운다. 그후 프레스부르크와 부다페스트를 거쳐, 빈에 있는 외삼촌 집에서 1919년 고등학교를 마친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네 번이나 다른 언어로 수업을 받았고,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다른 도시에 있는 학교에 갔다. 처음 독일에 갔을 때. 나는 신문을 읽을 수 없었다. 모국어는 독일어였지만 고딕 철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네 살에 비로소 처음으로 독일어 문장을 썼다." 그는 김나지움을 마치고 같은 해에 뮌헨대학에 입학해, 심리학, 문학, 연극학, 예술학 강의를 듣는다. 호르바트는 1920년《춤의 책》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뮌헨에서 《짐플리치시무스》를 간행하는 잡지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는 베를린에서 문학 활동을 펼친다. 극작품 열여덟 편 이상, 장편소설 두 편을 창작하는 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호르바트는 카를 추크마이어 추천으로 당시 문학적으로 큰 영광인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한다. 이런 성공 때문에 나치는 같은 시기에 호르바트에 대한 공격을 강화한다. 1933 년 히틀러가 집권한 후<믿음 사랑 소망>리허설이 취소되고, 호르바트는 잠시 연금 상태에 있다가 빈으로 도주, 나중에는 잘츠부르크 근교 핸도르로 옮긴다.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독일어권 극장에서 작품이 공연될 가능성이 줄어들자, 호르바트는 시대 비판적인 장편소설 《신 없는 청춘》과 《우리 시대의 아이》(1937)를 써서 성공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면서 호르바트는 또다시 도주한다. 헝가리, 프라하, 암스테르담을 거쳐 파리에 도달하지만, 그는 파리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된 1938년 6월 1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벼락에 쓰러지는 나무에 맞아 불운의 죽음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