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카릴 처칠 '탑 걸스'

clint 2023. 12. 28. 18:48

 

 

 

 

제목이 상당히 반어적인 「Top Girls」는 처칠의 작품 중 모든 등장인물이 전부 여성인 유일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초현실적 저녁만찬으로 시작된다. 이는 「Top Girls」 직업소개소의 여자 직원이었던 말린이 이사로 진급하면서,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여는 만찬이다. 이 만찬에 역사에 등장하는 '여성 유명 인사들을 여러 명 초대한다. 이들이 말린의 파티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에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말린이 현재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 등장인물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남성들을 위해 사회에서 마련한 역할들을 해냄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는 그룹과 가부장적 문화가 요구하는 이상적 여성상을 생활 속에서 실천함 으로써 그들의 존재가치를 얻게 되는 그룹이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등장인물은 빅토리아 시대 탐험가인 이사벨라 버드와 854년에 남자로 가장하여 가톨릭교회의 정상인 교황자리까지 오른 교황 조안이다.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등장인물은 13세기 일본 황제의 영향력 있는 애첩이었던 귀부인 니조와 후작과 결혼했던 농부 딸 그리셀다이다. 이 두 그룹의 여성들은 살아가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이나 심리적 억압, 성적 억압, 개인성 박탈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 예로 후작부인의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그리셀다는 자녀들의 희생을 받아들이며, 교황 조안은 아기의 출산으로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한다. 이 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예외적 인물로 역사 속의 실존인물이 아니라 그림 속의 인물인 덜 그렛을 들 수 있다. 덜 그렛은 복수의 이야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마치는데, 아기를 잃어버린다는 점에서 다른 인물들과 통한다. 덜 그렛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그들의 인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남성들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보인다. 즉 그들은 각기 권위주의적 아버지. 남녀차별을 극단적으로 하는 애인들, 잔인한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며 그들이 명하는 대로 살아갈 뿐 그들의 목소리는 전혀 내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끔찍한 시련을 겪으며 이를 극복한다. 이들은 남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말린에게 혐오감을 주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말린 자신도 이러한 특성을 아직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 지루하고 먼 길을 걸어왔어요.' 라는 그녀의 주장은 공허하게 들린다.

 

 

 

 

말린은 최고 경영진까지 도달하기 위해 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녀의 딸 엔지는 언니 조이스에 의해 암울한 하층계급이 사는 시골에서 키워지며 딸 엔지는 엄마가 말린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이 사실은 자본주의적 덕들을 추구하기 위해, 다시 말해서 출세하기 위해 모성적 본능, 인간적 감정, 도덕적 가치를 말린이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연극 마지막에 원하지 않는 좀 모자라는 아이를 키우는데 자신을 회생하는 언니 조이스(하층계급)와 벌이는 논쟁에서 말린은 다윈식의 개인주의의 공허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녀의 딸에 의해 대변되는 '멍청하고 게으르며 겁에 질린 사람' 을 위한 자리가 그녀의 주장 속에는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비록 말린은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녀의 성공이 다른 사람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처칠은 이처럼 역사와 현재를 공존시킴으로써 여성의 지위 변화가 피상적이었음을 제시하며 또 한편으로는 역사적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이 현대 인물들을 연기하게 함으로써 여자의 상황이 본질적인 면에서는 발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 조안은 중간층 간부 사원인 말린 (말린은 일할 때는 남자같이 취급되며 남성 지배세계에서 경쟁하기 위해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함)이 되며, 에이프런 위에 무장한 덜 그렛은 현대판에서는 말린의 10대 조카, 엔지로 분한다.

 

 

 

 

한 직업소개소에서 어렵사리 부사장직에 오른 여주인공의 이야기이다. 1부는 여주인공의 부사장 승진 자축파티로, 역사 속에서 최고의 여성의 자리에 오른 여러 여자들을 모아 가상의 파티를 여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탑 걸즈’는 모두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성을 포기하거나 남성에게 의존하는 방법으로 최고의 여성이 되었고 그래서 모두 행복하면서도 불행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제2부는, 여주인공의 일상 장면으로, 그가 여성으로서 부사장직에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질시와 공격을 받고 있는지, 그 직업소개소를 찾는 수많은 여자들이 능력과 무관하게 얼마나 화려한 직업여성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제3부는 이보다 몇 년 전 상황으로, 시골에서 지능이 낮은 딸 하나를 키우며 사는 언니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지능이 낮은 언니의 딸이 사실은 주인공의 사생아임이 밝혀진다. 주인공의 성공은 언니와 같은 하층민 노동여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주인공이 역시 하층민 노동여성이 될 수밖에 없는 그 딸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것에서 명확해지듯 계급의 문제와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탑 걸즈의 위치에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Top Girls」는 역사적 사실과 자연주의적 가정극을 혼합함으로써 현실을 비판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작품의 첫 장면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 여성 인사' 들이 참석한 말린의 승진 축하 파티이다. 그 다음 장면에 엄마에게 반항하는 앤지가 키트와 함께 무대 위에 등장한다. 그러고 나서 이틀 후에 엔지가 말린 사무실에 앉아 있게 된다. 그리고 1년 전으로 돌아가 말린이 언니 생일날 언니 집을 방문하는 장면은 말린과 조이스 사이의 정치적 논쟁을 벌이면서 끝을 내게 된다. 이러한 전개는 작품을 인과적 논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작품의 전체적 흐름을 일반적 파노라마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원형에서 개인으로 나아가게 한다. 「Top Girls」는 점차적으로 초점을 좁히면서 짧지만 서로 연계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면은 중심적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을 제일 마지막에 둠으로써 액션은 변화 없는 순환의 원 모양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말린이 그녀의 딸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지 않고 끝을 낸다. 앤지의 대사 '무서워' 로 끝나는 이 작품의 결말은 매우 암울하다. 결말만 암울한 것이 아니고 등장인물들의 삶도 우울하다. 말린은 성공의 대가로 자신의 아기도 언니의 손에 말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낙태의 고통을 인내해야 하며 언니 조이스는 가난으로 인한 심한 육체노동 때문에 자신의 아기를 유산하게 된다. 여성의 자립 을 성취한 것과 같이 보이는 말린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 해방이란 것이 사실 수세기 동안 남성들이 여성들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해온 공격적이고 약탈을 목적으로 한 가치 체계를 그대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처칠은 이 작품을 통하여 주장한다.

 

 

카릴 처칠

 

 

카릴 처칠(Caryl Churchill)은 1950년에 희곡을 쓰기 시작한 이후 엄청나게 많으면서도 의미심장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쓴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그는 사회적 역할과 성, 그리고 연극적 역할과 성간의 관계를 재현해내는 작업을 끈질기게 추구하였다. 미간 테리와 카릴 처칠은 둘 다 사회적, 연극적 역할과 성(gender)를 재창조하는 작업을 끈질기게 추구한 결과 연극의 형태와 방향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을 정도로 연극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여 그 결과 여성작가로서는 매우 드물게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중산층 부모의 외동딸로 1938년에 런던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라서 데이비드 하터(D. Harter)라는 변호사와 결혼하여 런던 교외로 이사하여 아들 셋을 낳았으며 여러 차례 유산을 하는 어려움도 겪으면서 라디오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많은 다른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처칠도 자신이 인정하는 이상으로 복잡하고 힘든 삶을 살았다. 라디오 드라마를 쓰게 된 이유는 집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가정을 떠나서 보내는 시간이 비교적 적어서 처칠과 같은 가정주부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런던에 처칠과 같은 무명의 극작가가 활동할 수 있는 프린지 극장(Fringe Theatre)같은 활동 무대가 아직은 생겨나기 이전이었던 탓에 처칠이 작품을 써서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라디오 방송이었고 게다가 수입도 꽤 괜찮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세 명의 어린 아들들이 설치는 집안에서 글을 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하루에 몇 시간 정도 글 쓰는 시간을 얻기 위해 가정부를 고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게 한다는 점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자신이 직접 아이들을 돌보면 훨씬 더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글을 쓰면서도 처칠은 자신의 아이들을 돈을 주고 남에게 돌보도록까지 하면서도 뭔가 이루어 내지 못하면 엄청난 정신적 부담과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막내아들이 두 살이 되던 해에 가정부가 사정상 그만 두고 떠나가자 처칠은 더 이상 사람을 쓰지 않기로 결정을 한다.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 일인가? 희곡을 쓰는 일이 과연 아이들을 키우는 일보다 그토록 더 중요한 일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애써보았지만 뾰족한 해답은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주말에나 가끔은 저녁시간에 틈을 내어 글을 쓰는 일을 계속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그는 종종 글을 매우 빨리 썼다. 그가 쓴 희곡들 중 많은 작품들이 일(노동)이란 것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또한 여성이 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일(노동)로 인정하는 것이 여성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그가 이해하게 된 것이 처칠의 생애에서 바로 이 시기였다는 점을 그의 작품들은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