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구메 마사오 작 윤백남 번안 '박명희의 죽음'

clint 2023. 4. 15. 13:40

 

윤백남의 <박명희의 죽음>은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三浦製絲場主>(『中央公論』, 1919. 8)을 번안한 4막의 희곡이다.  <박명희의 죽음>은 직공장 송하철이 팔을 잃은 여성 노동자인 박명희를 위 해 파업을 주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상적 노동공간을 만들겠다며 새로이 부임한 제사공장 사장 권영국은 이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박명희를 간호하다가 결혼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연적 영애에 의해 명희의 혼전임신이 밝혀지자 영국은 자신의 자식이라며 명희를 보호한다. 명희는 영국에게 결혼 전 송하철과의 원치 않은 관계로 아이를 가지게 된 사실을 고백하고, 그날 밤 송하철을 방문하여 '자기의 주의(主義)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혹독한 일'도 서슴치 않는 그의 태도를 비난하며 기차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구메 마사오 ( 久米正雄 )

 

윤백남은 <박명희의 죽음>의 번안에 대하여 원래가 번역을 염두해둔 작품이나, 조선의 인명과 지명으로 고치고 '조선사정과 풍속에 적합하게 고치는 범위 내에서 번안을 시도하였다는 소회를 적고 있다. 작가의 역()도 아니고 作도 아니다라는 언급은 <박명희의 죽음>에서 시도한 번안의 특이성을 나타내 준다. 지명과 인물의 개명 이외에 원작과 <박명희의 죽음>사이에 상이한 점은, 원작에서 미우라(三浦)가문의 '從女'로 설정된 연적(戀敵) '미우라 토시코(三浦俊子)' <박명희의 죽음>에서는 권씨 가문의 가정교사인 '영애'로 바뀐다는 점과, 제목이 <박명희의 죽음>으로 바뀐 제목의 차이이다. 미우라 토시코에서 영애로의 변화는 일본식의 가문 내 결혼이 '조선 정서'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인물설정의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극의 남성주인공인 '미우라 준 키치(三浦淳吉)'를 지칭하는 '삼포제사장주에서 여성주인공 박명희의 비극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박명희의 죽음'으로 제목이 변한 사실은 작가의 희곡 번안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극의 제목은 작품에 이름을 붙이는 의미 이외에도 작품 내용에 대해 정보를 주며, 관객들의 관심을 끌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번안과정에서의 제목의 변화는 이러한 관점에서 작가가 작품의 핵심을 무엇으로 파악하는가의 문제와 관객들의 기대 사이에서 파악하여야 한다.

 

윤백남

 

<박명희의 죽음>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 박명희는 1막부터 공장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여인이며그 자신이반항인 것 같은 광채가 번뜩이는' 직공장 송하철의 집에서 간호를 받는 인물로, 2막에서는 권영국에 의해 병원에서 간호를 받는 인물로 등장한다. 1막과 2막에서 타인의 보호를 받는 존재로 등장하는 '박명희'는 극적 행위를 통해 사건을 이끄는 극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박명희의 외형과 행위를 나타내는 무대지시문과 대사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수연한' 얼굴의 표정, 힘없는 몸짓과 수동적 태도는 극 안에서 박명희의 성격을 형성하며, 자신의 이후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박명희는 직공장 송하철에게 임금인상을 위한 노동쟁의를 일으킬 수 있는 희생자의 표본이 되고, 공장장 권영국에게는나의 이상을 실현하는 최고의 단계이상주의의 상징"이 된다. 여기에서 원작 <三浦製絲場主>의 제목의 의미가 드러난다. <三浦製絲場主>는 다이쇼기의 일본 지식인 사회의 담론을 배경으로, 미우라 준키치를 통해 이상주의적 삶을 살기 위한 부르주아 지식인의 고투와 실패를 세키구치 히데와의 결혼생활과 파국이라는 극적 사건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박명희의 죽음>에서는 제목의 변화를 통해 여성 박명희의 비극적 상황, 양심의 가책에 의해 권영국과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송하철의 급진적인 사상과 임신에 대한 냉담한 반응 사이에서 의지할 곳을 잃은 여성 인물의 상황이 부각된다제목의 변화를 통해 극서사의 핵심을 바꾸어 놓은 <박명희의 죽음>은 또한 윤백남이 각제를 통해 '노동문제극'으로 명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제목의 변화와 각제를 고려할 때, 윤백남은 <박명희의 죽음>에서 여성 노동자의 결혼과 임신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노동문제'라는 사회 공론영역의 모순을 폭로하는 작품을 의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윤백남은 <三浦製絲場主>의 번안 <박명희의 죽음>을 통해 '노동문제극'의 가능성을 타진하였으며, 특히 원작의 '결혼'의 문제와 노동문제의 폭로가 결합되는 양상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연애/결혼'문제와 공론영역의 쟁점에 대한 문제제기가 결합된 형태의 '문제극/사회극'의 시도는 이미 창작극 <운명>에서 시도된 바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명희의 죽음> 1920년대 초반 <운명>에서부터 엿보이는 작가의 '사회극창작의 시도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