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윌리암 루스 '아메스트의 미녀' (모노드라마)

clint 2023. 4. 19. 12:14

 

 

18301210일 매사추세츠 주 아메스트(Amherst)에서 태어나 1886년 아메스트에서 타계한  에밀리 엘리자베스 디킨슨(Emily Elizabeth Dickinson)의 생애를 극화한 「아메스트의 미녀」는 한 시인의 자화상 통해 정신과 삶의 영롱한 세계를 우리 앞에 재현시켜 주는 서사극이다「백색의 신부」「영원한 처녀」 「신비의 여류시인」으로 불리며 평생을 흰옷만 입고 처녀로 살다 간 에밀리 디킨슨의 어린 시절, 기벽, 사상, 취미, 저작 활동, 고양이, 종교관, 교우 관계, 비련, 그리고 출판에 대한 동경을 그린 이 작품에서 우리는 온갖 사람을 만나고 그녀의 신비의 수수께끼를 벗겨 볼 수 있다.

소녀 시절에는 그토록 활달하고 명랑했던 그녀가 일생을 고독 속에서 독신으로 지낸 이유를, 처자를 둔 차알스 워즈워드 목사와의 비련에서 찾을 수 있다. 일생 두 번 밖에 만나지 못한 이분이 그녀의 걷잡을 수 없는 시정(詩情)의 샘물이 되어, 마음의 연인이 마치 시간의 신()이나 되듯이 에밀리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었다. 에밀리 디킨슨의 詩의 Theme는 주로 自然과 神(풀 가운데의 길쭉한 것) 비련(상처입은 사슴은 높이 뛴다 등) (대단한 광기는 훌륭한 제 정신 等) 죽음(나는 그 자리에 서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었기에 等)으로 나눌 수 있는데, 죽음의 Theme에서의 절망과 고독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자비, 구제, 해탈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비련의 테마에서는 놀랄 정도로 에로틱하고 열정적이며 자기를 몰입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변호사인 아버지의 조수에게 詩作法을 배운 에밀리 디킨슨은 일생에 무려 1775편의 詩를 썼는데, 생전에 겨우 7편의 詩만이 발표된 것은 그녀의 독특한 스타일- Dash의 사용과 대문자의 사용 또 行과 련의 특이한 구분 따위- 을 당시의 비평가나 독자들이 전연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은둔과 소극성 때문이었다. 死後 69年후, 1955年에야 그녀의 전집이 하버드에서 나올 수 있었고 에밀리 디킨슨은 부활했던 것이다. 고독 속에서 시대보다 반 세기 이상이나 앞선 詩를 썼던 그녀는 분명히 마국문학사상 하나의 기적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평론가 울터 커는 이 희곡을 가리켜 "잘 다듬어진 극(Well-made play)으로 정서적으로 다양하며 점차 가슴을 죄어드는 작품이며 70年代의 가장 고무적인 사건"이라 했다. Time誌는 “Mind Heart 그리고 Soul의 철저한 탐구"라고 극찬했다.

윌리암 루스(William Luce)는 오레곤 주 포틀랜드 태생으로 냈고 새 희곡을 집필 중이며 제2詩集을 준비 중이다. 그는 대학 2년 때부터 에밀리 디킨슨에 심취하여 그녀의 서간집, 생애를 연구하여 1978年 이 희곡을 완성했다.

 

 

 

극단 뿌리가 17회 공연 무대로 마련한 여배우 윤소정의 1인극 <아메스트의 미녀>는 한 연기자의 무대 경력 중에 하나의 성취로 기록될 수 있는 무대였다. 윌리엄 루스 작, 신정옥 역, 김도훈 연출로 6~10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미국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생애를 53세가 된 디킨슨의 입을 통해 회상하는 형식으로 펼치고 있다.

좀 오래 걸렸다는 점과 여배우 윤소정의 연기가 잔잔함으로 디킨슨의 생애를 덮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남는다. 이 공연은 호화 무대에 너무 큰 잔치로 차린 탓인지 관객 동원면에서 올해 들어 가장 큰 실패로 기록됐다.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의 대관료 형편에 따라 입장료가 좀 비쌌다는 점, 연극 관객 일반이 이 극장과는 좀 낯설다는 점 등이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생전에 7편의 시를 활자화시킨 것이 전부인 디킨슨은 일생을 사건으로 아니라 마음의 편력으로 살아온 시인이므로 작품 속의 얘기도 그 얘기를 하는 방식도 모두가 조용하고 억제된 것이었다. 그가 얘기하는 사람들은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조카 등 식구들이 주축이 되고 동네 수다쟁이 아주머니, 23세 때 사랑을 느꼈던 찰스 워즈워드 목사와 그가 시를 의논했던 평론가 히킨스 교수 정도로 단촐하고 얘깃거리도 화사한 데는 없다. 윤소정은 무대의 책임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1인극이 갖는 제약과 특전 속에서 상당히 화려하게 연기의 빛깔을 펼쳐냈다. 고음에서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의 약점이 드러났고 도입부에 수줍은 인사가 너무 딱딱했다는 인상이었지만, 조용한 표면, 따뜻한 내면을 조화시킨 유인한 연기를 보여줬다. 모자, 소울, 망토 등으로 변화를 준 흰색의 무대 의상과 장치 중에 무대 중앙 후면에 불규칙한 창살 모양의 구조물, 무대 도구 중 검은 색조의 책상과 의자, 서류함 등이 이 작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요소였다. 폭발적 인기가 아니라 조용히 조금씩 알려진 시인 애기라 친해지는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는 점과 여배우 윤소정의 연기가 잔잔함으로 디킨슨의 생애를 덮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남는다. (구희서 극평)

 

 

번역자의 글 신정옥

몇 년 전만 해도 그러했다. 소위 모노드라마는 우리 나라 무대 위에 가물에 콩 나는 격으로 지극히 간헐적으로 얼굴을 내미는 정도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모노드라마 공연이 점점 늘어가고 있어 연극의 다양성과 배우술의 정립을 눈 앞에 보는 듯 하다. 그리고 관객들의 모노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연극적 흐름에 조응하여 극작가들도 모노드라마 創作의 열을 올리고 있는 듯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창작 모노드라마라든가 번역 모노드라마가 거의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연극적 추세와 취향은 연극의 다양화를 위해서 반가운 일이며 믿음직한 시도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지난날 우리가 모노드라마를 쉽사리 대하게 되지 못한 까닭은 극작술의 미숙과 연기력의 不足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모노드라마는 여러모로 위험성이 뒤따르는 그리 만만치 않은 희곡 형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 모노드라마가 아니겠는가. 단순히 에피소드 나열에 함몰되어 작품을 구심점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지 못한 모노드라마를 이따금 우리는 접해 왔다. 그러나 모노드라마의 수법상으로 보아서 한 사람이 여러 역의 구실을 해야만 되기 때문에 개성의 표시에 있어서 차원 높은 연기력과 역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內觀力을 생명으로 하는데 그 어려움이 있고 매력이 있는 것이다. 이번 극단 뿌리의 제 77회 공연작품인 윌리엄 루스 "아메스트의 미녀" 역시 높은 形象力을 필요로 하는 모노드라마에 속하는 작품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윌리엄 루스는 우리나라 무대에 처음 소개되는 자국의 시인이며 극작가이다. 세 권의 詩集과 自敍傳을 심혼을 기우려 耽讀했다. 그리하여 그는 혈관 속에 디킨슨의 삶에서 자서전에서, 서간집에서 그녀의 맥맥히 흐르는 휴머니스트와 소박하고 그윽한 思想의 光芒을 감득(感得)했다. 그리고 어둠과 아픔과 고통의 비탄 속에서 삶의 영롱한 빛을 얻으려는 그녀의 시정신을 발견했다. 詩의 숨결을 체감했던 것이다. 요컨데 에밀리 디킨슨에게로 치닫는 그의 인간적이고 작가적인 존경심과 흠모가 <아메스트의 美女>를 창작케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하리라. 윌리엄 루스는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우아한 여성의 교양미가 풍기는 디킨슨의 탁월한 시인적인 진면모와 인간적인 체온을 이 작품의 主음률로 삼았다. 그렇다. 아메스트의 미녀는 에밀리 디킨슨의 찬가이고 기도이며 그의 사상적인 귀의이기도 하다.

 

에밀리 디킨슨(오른쪽 실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