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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단종애사'

clint 2023. 1. 23. 16:34

 

줄거리

세종대왕이 승하하시고 병약한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2년 만에 여러 신하들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하고 운명하신다. 문종의 아우이며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신숙주, 최항 등을 포섭해 자기편들을 만들고,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김종서, 황보인을 비롯한 정부 중신들을 일거에 처치하고 죄 없는 자신의 친동생 안평 대군을 역적으로 몰아 처단함과 동시에 어린 단종을 협박해 섭정에 자리에 오른다. 이것이 바로 계유정란(癸酉靖難)이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섭정에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왕위 찬탄을 노리자 이에 분개한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은 수양을 없애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계획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후 정인지와 신숙주 등은 또 다른 단종복위 운동으로 왕권이 도전받을 것을 염려하여, 단종을 처단할 것으로 주장하고, 결국 수양은 어린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에 유배하였고, 결국 단종은 처소에서 수양이 내린 사약을 받고 죽는다.

 

1956년 이 소설을 원작으로 처음 영화로 제작됨(전창근 감독)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할 수 있겠으며, 충효에 입각한 유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계유정난’ 과 마키아벨리식 현실정치 개념으로 바라본 이 사건은 사람마다 매우 다르게 접근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작자가 지적했듯이 계유정난과 단종의 죽음이라는 일련의 사건은 우리 역사와 사회를 되돌아 볼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을 소설 형식으로 접근하다보면 올바른 역사적 진실의 접근이 어려울수 있으나,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를 행한 큰 창이 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며, 그러하기에 이 작품이 쓰여진지 거의 100여년에 가까운 지금에도 여전히 읽어야할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28년 11월 30일부터 1929년 12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서 총217회 연재 되었고 1972년에 삼중당(三中堂)에서 단행본으로 출간 되었던 춘원 이광수의 장편 소설이다.

단종이 태어나서 영월에서 사망할 때 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작자가 동아일보(1928.11.24.)에서 밝히고 있듯이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중심으로 작자의 환상을 빼고 사실 그대로 써서 실재 인물을 문학적으로 재현시키기에 애썼으며, 다른 소설보다 더 많은 정성과 경건한 마음으로 썼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 사건이야 말로 우리 한국인들의 장점과 단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며, 그가 살고 있는 그 시대에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상기 시키다.

 
1963년 개봉된 고 이규웅 감독의 동명 영화 장면

 

작가 이광수의 글 - 1929년 8월 20일 '동아일보'소재

 "자, 나는 이 사건 - 단종대왕과 세조대왕과 또 이 두 분을 중심으로 한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 - 을 공평하게 적는 것이 이 글 쓰는 사람의 직분이다. 이 글은 선악정사를 비평하는 것도 아니요, 글 쓰는 자의 감정으로 자차영탄한 기록도 아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독자가 할 일이어니와 글 쓰는 자가 할 일은 그 때 사적을 고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얼음같이 차게 남의 일같이 사정없이 태도를 정하려고 하여도 불 같은 의기가 얼음이 될 리가 없고 제 일이 남의 일 될 리가 없구나. 자서전을 쓰는 듯도 하고 자화상을 그리는 듯도 하니 아무리 하여도 붓끝은 불이 나도록 뜨겁지 아니할 리가 없다. 

 

일제 때의 동양극장

 


<단종애사>는 동양극장 최초의 장막극 공연으로서 당시 연극계의 고질적 병폐였던 악극단식 쇼를 연극무대에서 근절하고 연극만으로 관객과 만난 공연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 <단종애사>는 청춘좌·호화선의 합동공연으로 공연시간이 세 시간 내지 네 시간에 달했고 스펙타클한 장면이 많았던 전 15막의 대형 연극이었다. 궁중생활의 묘사와 무대의상으로 제작한 궁중의상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단종이 살해되는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하여 수양대군의 행위를 재평가한 의의가 있다. 단종 역에 아역을 하던 윤재동이 기용되어 대인기를 끌었는데, 이 작품 이후 윤재동은 고향인 개성으로 낙향하였다. <단종애사>가 고별무대가 된 셈이다. 그러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단종애사>는 이왕직(李王職)의 항의를 경찰에서 받아들여 갑작스레 공연중지 판정을 받는다.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들이 단종을 헝겊으로 목 졸라 죽이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것이 왕가를 모독했다 하여 이왕직에서 항의를 한 것이다. ( 고설봉 <이야기 근대연극사> 중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