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실러 원작 함세덕 번안 '산적'

clint 2023. 1. 18. 23:30

 

때는 고려중기, 낭림산중 주막에서는 노인과 그 딸 부소가 잃어버린 말을 찾지 못해 걱정인 가운데 그 말을 훔쳐간 도적 장강이 만만하게 그 말을 다시 팔러 그들에게 오고, 그 사이 수피달이 뻔뻔하게 그 말을 다시 팔러 가져가 일이 뒤엉키고 만다. 장강 및 그의 도적들과 수피달은 싸움을 벌이게 되지만 이내 화해하고 다 함께 도적단을 결성한다. 그들은 부소가 구경하러 갔다는 원나라 사신행렬을 첫 목표로 삼는데, 부소가 사신행렬이 이미 습격당했음을 전한다. 저녁 무렵, 염노인이 부상당한 사신 엄을 부축해 데리고 오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도적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두렁이 되어달라 청한다. 그러나 엄은 정중히 거절하며 범인을 찾으러 떠난다. 그러나 사실과는 달리 이미 온 조정은 그 사건이 엄의 계획된 모의였다는 혐의로 가득하고, 아버지인 왕치검, 약혼녀인 나모나는 근심이 가득하다. 이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 엄의 동생 섭은 최주후와 함께 모략 여러 거짓 증거를 내밀며 아버지와 나모나에게 계속 엄을 거짓 중상한다. 심지어 엄이 부하의 배신으로 죽었다고 거짓 죽음을 고하기에 이르는데.......

 

 

<산적>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군도>를 함세덕 작가가 번안한 작품으로, 1945년 해방 직후 낙랑극회의 창단공연으로 올려져 당시 큰 인기몰이를 했다. 그 이후 모두에게 잊혀져온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렵게 발굴된 원고로 함세덕의 아름다운 필치와 실러의 현실투쟁적 메시지를 큰 힘으로, 고려 인물들의 힘찬 기개와 당시 해방공간 관객들의 벅찬 환호를 올리며 오늘날 우리 관객들이 그리는 새로운 영웅 <산적>을 완성해 나갔다.

함세덕은 <군도><산적>으로 번안 재구성하면서, 외국 작품이 지닌 생경함을 무마하는 데에 집중했다. 특히 실러의 <군도>가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격렬한 반항과 폭력에 대한 적극적 동조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견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생경한 작품으로 수용될 여지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작품의 세부설정을 한국적으로

번안하고 해방공간에서의 관객들의 기호에 맞게 조절하여, 내용의 생경함에 대한 부담을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1782113일 만하임에서 <군도>를 최초로 공연했는데, 이 시기는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이 위세를 떨치고 있던 무렵이었다. 질풍노도 시대의 젊은이들은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 중심이나 절대 군주제에 대해 대항하며, 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의식과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을 앞세우곤 했다. 실러의 <군도>는 이러한 운동의 일환이었으며, 이러한 운동의 취지를 제대로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반면 함세덕은 18세기 독일의 상황을, 고려조 중기로 번안하여 <산적>의 시대적,서사적 배경으로 삼았다. 그 결과 주인공의 이름, 관직, 지명, 호칭을 바꾸어야 했고, 나아가서는 인물의 성정과 서사 전개 방식을 변화시켜야 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작품의 결말과 주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실러의 <군도>와 함세덕의 <산적>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주인공의 성격이다. 실러의 <군도>에서 카알(Karl Moor)은 자유분방한 기질과 카리스마를 갖춘 대담한 성품의 청년이다. 그는 수려한 외모와 남성다운 용기와 높은 도덕성 그리고 뛰어난 통솔력을 고루 갖춘 인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귀한 자로 일찍부터 추앙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고결한 품성을 갖추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도박에 손을 댈줄 알고, 높은 신분이면서도 낮은 계층의 무뢰한(도둑들)과 친교를 맺을 줄 안다는 점이다. 그는 행동에 거침이 없어 자질구레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대범함을 갖추고 있으며, 대의를 위해서는 폭력도 불사할 수 있는 남성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실러의 <군도>에서 이러한 카알의 매력은 동생 프란츠(Franz)의 시기 질투에 의해 훼손되고 변질된다. 작품의 첫 장면은 프란츠가 아버지 막시밀리안 폰 모어백작에게 카알의 부정한 행위를 모함하는 장면이다. 프란츠는 형에 대한 질투와 경쟁심을 교묘하게 숨기면서, 카알의 행위를 과장하여 아버지의 분노를 사도록 유도했다. 이에 해당하는 장면은 함세덕의 <산적> 에서는 작품의 초입이 아닌, 2막에 배치되어 있다. 해당 위치가 다를 뿐만 아니라, 주인공(<산적>에서는 )의 소개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군도>12장은 카알이 슈피겔베르크 무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흉중에 품고 있었던 불만을 털어놓는 장면이다. 카알은 실제로 빚쟁이에다 남의 여자까지 훔친 죄목으로 도망 다니는 신세에 처해있다. 하지만 그는 비겁하거나 소심하게 행동하지 않고, 세태의 타락과 부정에 반감을 가지고 용기 있게 대처하려고 한다. 이러한 카알에게 매료된 슈피겔 베르크는 낡은 세상에 함께 반기를 들자고 제의한다. 이처럼 카알은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기 이전부터, 현실에 대한 개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의 아들이라는 높은 신분과 안락한 삶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권력의 폭정과 압제에 저항하고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일소하려는 반골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함세덕은 이러한 카알을 동양적 가부장권 하의 장남으로 변화시켰다. <산적>은 고려왕의 명령으로 원나라 연경으로 조공을 바치는 사신으로 임명되었다가, 낭림 산에서 도둑을 만나 공물을 잃게 된 비운의 관료로 설정된다. 그리고 산중의 도둑을 만나 도둑들의 무리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제안은 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제안이다. 왜냐하면 엄은 동아시아 세계 질서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이다. 그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버지를 섬기며 가족을 돌보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관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엄은 충과 효를 버린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인물이며, 신분상 차이가 나는 도둑떼와 친교를 맺을 의향도 전혀 없는 인물이다.

카알이 세상에 대한 개혁 의지를 품고 있었음에도 현실적인 처지를 감안하여 그 의지를 꺾고 개혁가로서의 기질을 감추고자 하는 인물이었다면, 은 동아시아의 충과 효라는 질서 속에 깊숙하게 편입되어 처음부터 사상적 동요가 전혀 없던 인물이었다. 엄이 도둑들에게 공물을 잃지 않았거나 귀가하여 동생의 음모를 듣지 않았다면, 엄은 도둑의 우두머리 자리를 수락할 명분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엄은 가족의 평안, 특히 아버지 명예와 동생에 대한 배려 때문에 스스로 도둑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동생에 대한 복수에 사로잡힌 카알과 대비되는 지점이 여기이다. 함세덕은 엄의 성격을 내향적이고 수동적이고 진중한 형태로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엄의 성격 변화와 진로 변경을 내면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극적 논리가 불분명 해졌다. 엄은 수피달(슈피겔베르크) 무리의 최초 제안을 뿌리치고, 혼자서 공물의 위치를 뒤쫓아, 그것을 되찾을 방안을 마련한 후에, 자신의 집인 천향궁으로 돌아왔다. 가친 왕치겸의 도움을 받아 도난당한 공물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돌아온 집에서 그는

참담한 소문을 들어야 했다. 소문 속 자신은 공물을 빼돌린 배신자였고, 그로 인해 이미 부하의 손에 죽은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거짓 소문을 만들어내는 인물이 동생 은청 광림대부 임을 알게 된다. 함세덕은 엄에게 가족애를 발동하도록 유도하여, 엄이 무리로 돌아가서 도둑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련했다. 라는 대의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권력 체계와 문란한 정치 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러한 이유로 동생 프란츠의 모함을 11장에 배치하고 있다. 하지만 함세덕은 더욱 복잡한 층위의 내적 갈등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것은 엄이 충과 효의 윤리 도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집을 떠나 개혁의 무리에 가담할 수 있는 계기여야 했다. 이때 발휘된 것은 형제 간의 우애, 즉 형의 양보였다. 엄은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원작에서 카알은 프란츠의 계략을 모른 채 도둑떼에 가담하지만, 번안 작에서는 엄이 동생 섭의 음모를 알면서도 이를 묵인했다. 자신이 살고자 한다면 동생이 다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작용한 것이 형제 간의 신의, 즉 동생을 보호해야 하는 장남 의식이다. 이러한 장남의식은 원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군도>에서 카알이 프란츠의 계략을 알게 된 것은 구금된 아버지를 구해낸 중반 이후에서 인데, 카알은 프란츠의 모략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복수를 결심한다. 하지만 번안 <산적>에서는 섭이 아버지를 죽이는 음모에 가담한 사실을 확인한 이후에도, 엄은 동생 섭을 직접 처단하려 하지 않는다. 엄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핏줄에 대한 강한 연민과 보호 본능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형제의 대립은 양보가 끼어들 틈이 없는 원수 간의 대결이었다. 반면 번안작에서 엄은 섭을 위해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동생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러한 선택은 엄이 동양적 윤리를 지키는 영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은 동생의 모함을 받았고 억울한 누명을 썼지만, 자신의 가족과 형제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 인의로운 군자여야 했다.

반면 카알의 복수심은 가족 질서나 혈연관계를 무시하고 있다. 그는 의절을 통해 도둑의 무리로 편입되었고, 복수를 맹세하면서 가족과 타인을 적대시하였다. 이러한 변신은 감정적이고 과격한 것이기 때문에, 카알의 내면에 잠재한 분노와 개혁 의지를 노출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동양적 윤리 체계에 익숙한 한국의 관객에게는 비윤리적이고 패륜적인

행위로 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야 한다. 함세덕은 엄의 반항심과 개혁 사상의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서 가족과 기존 질서로부터 분리시켜야 했지만, 원작의 카알 같은 패륜적인 행위로는 관객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카알이 아닌 엄이 필요했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파격을 드러내는 설정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함세덕의 번안이 개혁 의지와 체제 반항 행위를 약화시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앞에서 이태우가 말한 새로운 형식, 즉 한국적 현실에 맞게 변화된 설정의 측면에서 주목된다. 함세덕은 낯선 이국(18세기 독일)의 상황과 정치적 혼란 (연방군주국가의 무기력한 연합체)이 근본적으로 한국의 상황과 접목될 수 있지만, 원작 그대로의 설정만으론 한국 관객의 정서적 측면과 이성적 측면에 인식적 충격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특히 첫째 아들의 패륜적 행위는 관객들의 동일시와 기대감을 저하시킬 것이고, 엄의 개혁 행위 자체를 반국가적,반인륜적 범죄로 속단할 가능성을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엄의 도덕적, 인륜적 정당성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엄은 개혁자가 되어야 했다. 이것이 엄의 성격과 엄을 둘러싼 설정이 변화된 이유이다.

 

 

원작에서 프란츠는 간악한 효웅으로 그려진다. 그는 자신의 형 카알을 아버지에게 버림받도록 만들었고, 형의 애인 아말리아를 손에 넣기 위해서 아버지를 구금했다. <군도>에서 프란츠는 이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해내는 악당으로,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극단적 인물로 설정된다. 결과적으로 실러는 프란츠를 전형적인 악당이자 극단적으로 추한 인물로 그려냈다.

하지만 함세덕은 이러한 둘째 아들 성격을 한국의 실정에 맞게 바꾸었다. 일단 함세덕은 프란츠의 간악한 본성을 두 개로 나누어서, 하나는 아버지 왕치겸의 정치적 적수인 최주후 (대승)에서 부여했고, 다른 하나는 프란츠의 번안 인물인 에게 남겨두었다. 최주후는 정치적 라이벌인 왕치겸을 실각시키기 위해, 섭의 질투와 경쟁심을 유발하는 역할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섭을 이용하여 왕치겸의 죽음을 사주하는 숨은 악당으로 등장한다. 섭이 짊어져야 할 도덕적 패륜(형에 대한 모함, 아버지 살해, 형수 갈취)을 나누어지는 인물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로 인해 섭은 우유부단한 인물로 재설정되며, 최주후의 명령과 가족의 대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면적 방황을 어느 정도 담보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비록 섭이 악당이지만, 아버지나 형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통감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동정을 살 여지가 살아나는 셈이다. 이러한 섭의 성격 재창조는 한국 관객의 연민을 유발할 수 있는 윤리적 바탕을 형성한다.

도둑들이 머무는 숲은 원작에서는 보헤미아 숲이지만, 번안작에서는 낭림산이다. 낭림산에 모인 도적들은 엄의 엄밀한 훈계와 감독 하에 의적으로 변모한 상태이다. 하지만 원작의 보헤미아 도적들은 인간성을 상실한 폭력배의 모습으로 전락한다. 이로 인해 원작의 카알은 자신들의 동료에 대해 깊게 회의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 도둑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반면 함세덕은 낭림 산중의 도적들의적으로 만들어서, 엄으로 하여금 이러한 분노와 고민을 느끼지 않도록 설정한다. 엄이 내린 명령에 따라 재조직된 낭림의 의적은 비록 도둑이되, 실제로는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염려하는 저항군의 형상을 띠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엄의 행위(도둑질)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킨다. 원작에서 카알이 자신의

부하들에 대해 실망하지만, 엄은 대인의 풍모로 그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설정은 한국의 의적인 홍길동이나 임꺽정과 비슷한 영웅의 형상을 엄에게 부여한다.

카알의 군대가 기병대에 풍비박산 난 후, 카알은 아말리아를 보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프란츠는 - 자신의 영지에 잠입한 카알을 발견하고, 집사 다니엘도 카알을 알아본다. 프란츠는 도망가고 다니엘은 카알과의 재회하게 되는데, 이러한 재회를 통해 카알은 모든 음모가 프란츠의 계략이었음을 알게 된다.

 

함세덕은 엄이 천향궁으로 두 번 귀가하도록 설정을 바꾸었다. 엄은 첫 번째 방문하여 부자간의 이간질과 모함이 동생 섭의 계략임을 알지만, 섭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집을 떠나는 길을 선택한다. 전술한 대로, 원작과 달리 엄은 섭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고 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엄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집을 두 번째로 방문하고, 섭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 섭은 엄의 등장에 충격을 받고 자결을 하지만, 끝까지 엄은 섭에게 적대감을 피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작에서 실러는 카알과 프란츠를 적대적인 관계로 설정하여, 형제가 극한적으로 대립하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프란츠는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꾸미기 위해서 거짓 장례를 치루고, 정작 아버지 막시밀리아 폰 모어 백작을 오랫동안 구금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를 만난 카알은 프란츠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동생을 죽여서라도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다. 이처럼 원작에서 카알과 프란츠의 대결은 선/악의 대결이고, 이상주의/

현실주의의 대립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인의 입장(카알) 에서 봉건적인 세력(프란츠)에 맞서는 상징적 대결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카알은 복수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카알의 복수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프란츠는 절대적인 악한이어야 했고, 프란츠가 한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여야 했다. 실러는 형제간의 대립 구도를 통해 선/악의 구조를

명확하게 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형제간의 대립은 조선의 관객들에게 친숙한 구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함세덕은 이를 약화시킨다. 그 결과 프란츠의 번안 인물인 섭은 개전의 여지를 가진 인물로 변화된다.

한편 원작에서는 카알과 슈피겔베르그 역시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카알에게 도둑떼의 가입을 권유하고 두목의 자리를 인도한 도둑이 슈피겔베르그이지만, 슈피겔베르그는 카알의 명령과 지도 방식에 가장 반기를 드는 도둑이기도 했다. 슈피겔베르그는 영지로 돌아가서 돌아오지 않는 카알을 제거할 구실을 만들어, 평소 자신의 무자비한 참살(노략질)을 제지하던 카알을 제거하려고 한다. 카알과 슈피겔베르그는 친구이며 동료였지만, 라이벌이며 적대자였다. 결국 슈피겔베르그는 다른 도둑들에 의해 제거된다.

하지만 번안작에서 수피달은 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지언정, 도둑의 두목에 대한 살해를 감행하지 못한다. 비록 도둑일지언정 우두머리에 충성하는 의리를 버리지 않는 인물로 재설정되며, 도둑의 무리에 내분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살아남아 엄의 개혁에 일조하는 인물로 존속한다.

원작에서 카알은 구출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하지만, 아말리아에 의해 정체가 탄로 나고 만다. 모어 백작은 큰 아들이 도둑의 괴수임을 알게 되자, 이에 실망하여 그 충격으로 절명한다. 카알은 이로 인해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을 떠안게 된다. 게다가 카알은 아말리아마저 손수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카알을 알아 본 아말리아는 헤어지려

하지 않고, 도둑 무리들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카알이 도둑 무리를 이탈할 조짐을 보이자, 도둑들은 카알에게 아말리아를 살해하라고 종용한다. 아말리아 역시 카알과 헤어져야 할 바에는, 카알의 손에 죽기를 소망한다. 결국 카알은 아말리아를 살해하고, 도둑 무리에서 더 이상 자신의 존립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카알은 아버지와 아말리아를 죽게 만든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은 인생과 사회 개혁을 함께 포기하고 만다.

실러의 <군도>에서 카알이라는 영웅은 결말에서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르네 지라르는 집단의 욕망이 고조되고 내부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면, 집단은 희생양을 선택하여 폭력을 쏟아 붓고 질서의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발동한다고 강변했다. 이때 집단은 중대한 위기를 의식하게 되는데, 카알의 부하들이 합심하여 카알을 처형하는 것은 이러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극단적 처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원작은 카알의 몰락과 아말리아의 죽음을 통해 인류사적 비극을 체현하고자 했다하지만 함세덕은 이러한 비극적 결말을 수용하지 않았다. 일단, 번안작에서 아말리아의 죽음은 연기된다. 엄을 사랑하는 나모나는 엄이 도둑떼의 우두머리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도둑 무리를 찾아와, 도둑 무리에서 엄을 구출하려 한다. 원작에서 아말리아가 강제로 끌려오는 것과 차이를 보이는 설정이다. 하지만 도둑 무리가 엄의 이탈을 허락하지 않자, 그녀는 스스로 도둑의 무리에 가담할 것을 선언한다. 그녀의 가담은 도둑들이 실은 의적이라는 윤리적 면죄부로 인해 가능했고, 그녀를 또 하나의 영웅으로 설정하려는 함세덕의 극작 의도를 담아내게 된다. 그녀는 힘없이 죽어가는 비련의 아말리아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에 도전하는 당찬 여진족 여전사로 거듭난 것이다. 그녀의 가담과 용기에 의해, 엄 역시 개혁 의지를 중단 없이 추동할 수 있었다. 번안작에서 엄과 나모나 그리고 수피달과 도적들은 혁명군이 되어, 통치 질서의 문란을 바로 잡고 새로운 개혁의 기치를 드높이는 사명감에 불타오른다. 이것은 함세덕이 원작에 담겨 있는 절대군주적인 독일에서의 시민혁명적 개혁의 시범적 시도 를 가시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실러는 아말리아를 비극적인 여인으로 형상화 하였다. 그녀는 카알의 애인이었고 카알만을 사랑했으나, 카알은 그녀를 곁에 둘 수 없었다. 카알은 자신의 손으로 아말리아를 죽여야 했고, 그로 인해 도둑으로서 카알 자신도 끝나게 된다. 이러한 결말은 참담한 현실 인식에 해당한다. 카알이 아버지도, 사랑하는 애인도, 국가도, 심지어는 자신도 건사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실러가 규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카알은 실패한 혁명분자이며, 나약한 반체제 인사였다.

하지만 함세덕은 작품의 결말을 대폭적으로 변경했다. 함세덕은 주인공 엄이 끝까지 현실 개혁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그의 영웅적 결단에 의해 사회 일각에서 체제 개혁을 외치는 운동가로 남도록 만들었다. 함세덕의 입장에서는 엄이 무기력하게 패배해서는 곤란했고, 이를 위해서 아버지나 애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엄에게 부가할 수 없었다. 더 나아가서 함세덕은 엄의 무리에 나모나를 포함시켜, 사회 개혁과 체제 정화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분연히 동조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특히 나모나는 작은 이익에 취해 있는 낭림 도둑들과, 개인적 관계에서 고민하는 엄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해방공간에서 발표된 함세덕의 희곡은 공세적 계몽선전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토론의 장면화기법을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최초의 집필(번안) 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산적>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주목된다. 나모나의 발언은 각성한 자무자각한 자(도둑들)에게 들려주는 계몽의 언사에 해당한다. 무자각한 무리들은 이 말에 설득당해 자각의 무리로 변화된다. 원작의 보헤미안 도둑들이 끝까지 무자각한 자들로 남는 것에 비해, 번안작에서는 공세적 계몽의 요소가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함세덕은 원작의 설정을 대거 변화시키면서까지 사회 개혁과 체제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엄이 살던 고려가 원나라의 예속에서 풀려나 새롭게 출발해야 할 입장이었다면, 함세덕이 맞이해야 하는 해방공간의 조선 역시 지배국의 예속에서 풀려나 스스로를 건설해야 할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세덕과 당대의 연극인들에게 최주후나 섭 같은 이기적 정치 모리배는 척결되어야 할 대상이었으며, 판단력을 잃고 충신을 내친 왕치겸의 정치적 실패 역시 개선해야 할 구습이었다. 새로운 질서는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젊은 개혁의 무리들에 의해 건설되어야 할 과제였다.

당대 이 작품에 관한 연극평에서 낙랑극회 산적공주(公主)의 國家論이나 산적두목의 國家論이 모두 어색했다는 지적은, 이러한 신국가 건설론나모나에 의해 당위적으로 발설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금도 이 대목은 생경한 구호로 점철되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무리한 설정을 감수할 만큼 1945년 시점에서의 함세덕에게 이러한 결말이 절실했다고 볼 수 있다. 함세덕은 <기미년 31>을 통해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체가 우익 인사가 아니라 학생 세력혹은 프롤레타리아민중세력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산적>을 통해서도, 새로운 국가 질서의 창립을 염원하면서 그 주체 세력이 기득권에서 물러난 개혁 세력이어야 한다고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