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의 창작주기에 맞게 <어린 에욜프> 이후 2년 만인 1896년 발표된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입센의 "가장 통합되고 강력한 드라마들 중 한 편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극작 기법 면에서 공연시간이 현실의 시간과 동일할 정도로 시간의 일치가 지켜져 있고, 장소는 엘라 렌트헤임 소유인 집의 1층과 2층, 그리고 행동의 일치라는 고전적 삼일치가 가장 잘 지켜져 있는 작품이다. 행동의 일치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빌헬름 폴달의 이야기는 주인공인 보르크만의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한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부 플롯으로 볼만큼은 아니라 단일 플롯으로 보인다. 또한 입센적 분석극, 즉 회상기법이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훌륭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응집된 구성의 완결성만으로도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입센의 걸작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인간 영혼의 중요성, 자유의지와 인간 삶의 숭고한 목적과 의미 등 입센이 그의 드라마들을 통해 평생 강조하며 주장한 주제들이 재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중요한 작품이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에서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는 주인공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이라는 독특한 인물 유형이다. 야망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지만 그가 갖고 있던 미래에 대한 비전은 단순히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인간으로서의 크기와 자긍심은 브란, 페르귄트, 황제 율리안과 비견 된다. 입센은 강력한 주인공을 그릴 때면 작품의 제목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했다. 그런 경우는 위의 인물들에 더해 헤다 가블레르가 있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얼굴을 달리하며 입센의 작품에 등장하는 꿈과 현실의 괴리로 갈등하는 인물이다. 과거의 그에게는 부와 명예가 있었고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친구이자 사업파트너에게 사랑하는 여인 엘라 렌트헤임을 양보했다. 그의 미래에 대한 꿈이 사랑보다 더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은행이 파산한 후 구치소에서 3년, 감옥에서 5년을 보냈고 출옥한 후 8년간 엘라의 소유인 집의 2층에서 전혀 외출도 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은 채 아침부터 밤까지 커다란 방 속에 놓인 우리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병든 늑대처럼 살고 있다.
그를 방문하는 유일한 인물들은 폴달 부녀이다. 폴달은 옛날 은행직원으로 보르크만으로 인해 적은 재산을 날렸지만 그래도 그에게 자신이 쓴 비극을 읽어주기 위해, 그의 딸 프리다는 피아노를 쳐주기 위해 들릴 뿐이다. 보르크만은 광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채굴광에 들어갔을 때 광석이 노래하는 걸 들었다. 파헤쳐져서 밖으로 나올 때 광석은 인류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 기뻐 노래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보르크만은 자신을 그런 광석에 비교했다. 그가 입센의 작품들 속 몽상가들인 브란, 페르귄트, 황제 율리안과 비견되는 인물인 건 분명하지만 이 인물들과는 달리 산업 자본주의의 여명에 서 있다는 점을 입센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저 아래 강 옆에 공장들이 가동되고 있소! 내 공장들! 내가 세우고 싶었던 공장들! 폭삭 망했지! 하룻밤 사이에 밤낮으로 가동되었는데! 들어봐요, 들어봐! 물레바퀴들이 돌고, 롤러들이 돌고 돌고, 돌고!" 그것이 보르크만이 거의 가질 뻔 했었던 그의 왕국이었다. 그랬기에 보르크만은 재기에 대한 원대한 꿈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보르크만의 아내 귀닐은 명문가였던 자신의 집에 그런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도 절대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부부는 한 집의 위 아래층에 살고 있지만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옛날의 영광을 아들인 에르하르트가 회복시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에르하르트- 내 멋진 아들! 걔가 우리 가문, 집, 명성을 회복할 길을 찾을 거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모두- 더 많은 걸 할지도 몰라." 이것이 쌍둥이 언니 엘라에게 말하는 귀닐의 확신이다. 아니, 그녀가 삶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그러나 엘라는 귀닐의 그 확신이 실현 불가능임을 잘 알고 있다. 엘리는 귀닐 대신 에르하르트가 15살이 될 때까지 키웠다. 그녀도 모든 재산을 보르크만에게 투자했지만 그는 옛 연인의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도록 조처를 해두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덧붙여 그녀는 에르하르트가 삶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어린 에욜프>에서 알메르스가 아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 에르하르트는 23살이 된 대학생이고, 인간관계에서도 아버지 대에 있었던 사건에서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그에게는 나이든 세대가 관습적으로 갖고 있는 어떤 편견도 없다. 그는 생모와 이모인 양모,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어떤 의무를 지우려 할 때면 늘 자신은 젊다고 강변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나이 든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배신감을 이 젊은이에게서 느낀다.
보르크만, 귀닐, 엘라- 어느 겨울날, 한 장소에 있게 된 이들은 이내 나타날 에르하르트에게 품고 있는 기대와 희망이 각기 다르다. 귀닐은 아들이 자신의 가문과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엘라는 병든 자신의 남은 생을 에르하르트가 돌봐줄 것이라고, 보르크만은 자신의 재기를 아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에르하르트는 이들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고 이혼녀이자 자신보다 7살 연상인 빌톤 부인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는, 그녀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떠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키운 옛 연인 엘라의 소망대로 그녀가 죽은 후 자신의 성(姓)을 주겠다는 말을 하고자 아래층에 내려온 보르크만은 아들이 떠나자 폭설이 내리는 밖으로 엘라와 함께 나간다. 산꼭대기에 올라 그는 광활한 땅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이룩하려고 했던 꿈에 대한 환시와 환청에 사로잡힌 채 생을 마감한다. 죽어가며 그는 "얼음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다고 말하다가 이내 "쇠의 손"이라고 정정한다. 엘라에게 '사랑한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끝내 자신의 꿈에 부푼 채 죽어가는 보르크만다운 죽음이다.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 이모티프는 입센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에는 멜로드라마적 요소가 들어있다. 그러나 입센은 보르크만의 행위와 꿈을 단순히 한 남자의 이기적 욕망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보르크만에게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겠다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행위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감정 역시 입센은 단순하게 그리지 않는다. 현실은 그에게 꿈을 허락하지 않음에도 꿈을 꾸는 보르크만의, 아니 인간의 부조리함과 비극적 결함까지도 읽게 하는 것이다. 애증의 감정으로 남편과 엘라를 뒤따라온 귀닐과 엘라, 쌍둥이 자매는 자신들을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이 만든 남자의 주검을 두고 비로소 화해한다. 남편과 연인, 아들을 잃었지만 그들이 비로소 평화를 찾을 것을 암시하는 극의 대단원이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이 발표되었을 때쯤에는 입센 작품의 출판권과 공연권을 먼저 얻고자 출판사 관계자들이 다투어 오슬로를 방문할 정도로 상황이 바뀌었다. 이 작품은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름에서 동시에 12,000부가 출판되었고, 판매 성공으로 곧바로 3,000부를 더 찍었다. 원어본 출판과 동시에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번역본이 나왔다. 특히 영국에서는 입센의 번역자들인 윌리엄 아처, 에드먼드 고쓰를 비롯하여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 그리고 입센의 중요 여성 캐릭터로 분했던 미국 출신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로빈스 등의 입센 지지자 군이 형성되어 있었다. 헨리 제임스가 <어린 에욜프>가 너무 늦게 초연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해서인지 <욘 가브리엘 부르크만>은 원어본이 출판된 지 이틀 후에 에비뉴 시어터에서 초연되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서 앞다투어 공연되었고 특히 독일에서는 10여 군데의 중소 도시들에서까지 무대화되었다. 프라하의 도이치 테아터,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비인, 이탈리아의 볼로냐, 로마, 모스크바 등지에서의 무대화가 잇달았다. 공연 중 특기 사항은 1897년 파리의 테아트르 드 뢰브르에서 뤼네포 연출의 공연에 에드바르 뭉크가 무대디자인과 포스터디자인을 했으며 같은 해 11월 뉴욕의 크라이테 리언 인디펜던트(Criterion Independent) 시어터가 이 작품으로 개관된 것이다. 입센의 고국 노르웨이에서는 크리스티아니아 외 지역에서의 공연 티켓은 매번 '매진'이었으며 입센의 이 새 작품을 보려는 관객들의 열망 때문에 해당 지역까지 특별열차가 운행되곤 했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1997년 한국 관객과도 만났다. 제목은 <잃어버린 시간 속의 연인들>로 변경되었고 '하얀 사랑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었다. 극단 비파와 극단의 공동작업(연출: 김영환)이었던 이 프로덕션은 아마도 사람 이름이 붙은 노르웨이 제목이 한국 관객에게 낯설 것 같아 마련된 대안으로 보인다. 번역자인 연출가 김철리는 "이 한 편의 연극이 우리 연극의 '깊이'를 찾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팸플릿의 '역자의 글'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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