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헨리크 입센 작 김미혜 역 '우리 죽어 깨어날 때'

clint 2022. 11. 26. 08:20

 

 

<우리 죽어깨어날 때>1899, 입센의 창작 주기를 벗어나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발표 후 3년 만에 창작되었다. 창작주기가 깨진 것은 무엇보다 입센이 70회 생일을 맞았고 그에 따른 여러 이벤트들 때문이었다.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입센 전집이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출간을 서두르고 있었고 이 전집들을 위해 입센은 실수나 오자 등을 철저히 감수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또한 크리스티아니아, 코펜하겐,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축하연에 참석해 하객들을 만나고, 감사의 연설을 하고, 수많은 인터뷰에 응해야 했다. 이때 쯤 입센은 자서전도 계획하고 있었다 하는데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으나 상당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우리 죽어 깨어날 때>에 입센은 '3막의 극적 에필로그'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러나 그는 이 부제가 자신의 전작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형의 집>으로부터 시작하는 일련의 드라마들의 에필로그로 여겼다. 입센은 <우리 죽어 깨어날 때>까지의 이 일련의 작품들이 하나의 총체성, 하나의 단일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일단락을 짓고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된 작품들을 쓸 것이라고 했지만 이 모든 계획은 그의 와병으로 중단되었고, 그가 붙인 부제는 예언적인 것으로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에필로그'가 돼버렸다. 그러나 입센의 프랑스어 번역자 모리츠 프로조(M. Prozor)는 입센이 고국에 돌아와 쓴 마지막 네 작품에서 하나의 총체성, 하나의 단일성이 보인다는 견해였다.

 

 

<우리 죽어 깨어날 때>에는 입센의 첫 드라마 <카탈리나>에서부터 보이는 명성과 야망에 대한 갈구.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의심, 차안의 삶을 넘어서려는 꿈과 실망 등 입센 작품의 주된 모티프들이 다시 회귀하고 있다. 예술과 삶에 대한 질문은 <사랑의 희극>, 예술과 삶의 대치성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에 이미 들어있었다. 주인공인 조작가 뤼베크의 이기심은 다른 남성 캐릭터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요소이고, 이레네는 <카틸리나>의 푸리아와 매우 비슷하다. 왜냐하면 두 여인 모두 감금당해 있으며 스스로를 죽었다고 말하며 품에 칼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특히 <우리 죽어 깨어날 때>의 마지막은 <브란>의 마지막과 너무나 흡사하다. 브란의 직업은 목사이고, <우리 죽어 깨어날 때>의 주인공은 조각가 뤼베크이지만 두 사람은 눈사태로 삶을 마감한다. 이때 브란에게는 집시 피를 지닌 처녀 게르트가, 뤼베크에게는 그의 누드모델이었던 이레네가 함께 한다. <브란>의 마지막엔 눈사태의 노호 위로 "신은 사랑이다"라는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려퍼지며, <우리 죽어 깨어날 때>의 마지막엔 눈사태에 파묻혀 마치 흰 종이 위에 글자가 지워지듯 삶을 마감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레네를 보호하던 검은 옷의 수녀가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당신들에게 평화가"(누가복음 2436)라고 되뇐다. 두 쌍의 마지막은 죽음이다. 이제 그들이 속한 영역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임이 은유되는데 죽음 후에야 진정으로 깨어날 수 있다는 제목을 생각하면 죽음이야말로 인간을 위한 어떤 '구원'이라고도 생각된다. 직업이 무엇이든 입센의 주인공들은 최상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결국 신에 대항하는 자신을 느끼며 동시에 죽음에의 두려움에 전율한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현세에서 그들이 가졌던 명성과 야망에 대한 갈구,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의심, 차안의 삶을 넘어서려는 꿈과 야망에 대해 궁극적으로 대차대조를 끝내는 구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죽어깨어날 때>에서는 무엇보다 구성과 등장인물 면에서 단순하고 명료하다. 3막의 각 막은 '- 예술구원'의 구획된 패턴을 잘 드러냄으로써 이 작품의 주제가 '삶과 예술'임을 곧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부차적 인물들은 전혀 캐릭터화 되어 있지 않아 주요 인물들만 부각된다. 당시 젊은 작가로서 입센의 시와 희곡들을 원전으로 읽고 싶어 노르웨이어를 공부한 제임스 조이스도 이 작품을 읽고 "처음부터 끝까지 쓸데없는 말이나 구절이 거의 없어 "희곡 자체가 극적 표현으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하고 명료하게 극의 사상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리뷰에 썼다.

 

 

이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삶과 예술에 대한 입센의 담론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이 인물들은 완전한 이중 대칭을 이루고 있다. 뤼베크-마야, 이레네-울프헤임의 쌍으로도 나뉠 수 있고, 뤼베크-울프헤임, 이레네-마야의 쌍으로도 나뉠 수 있다. 뤼베크는 조각가, 울프헤임은 사냥꾼, 이레네는 뤼베크의 예술을 위해 젊음을 희생한 모델, 마야는 나이든 뤼베크의 아내로서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워 '자유'를 노래하며 그에게서 벗어나는 인물이

. 뤼베크-이레네 쌍은 일상을 초월하여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인물들이고, 마야와 그녀가 당분간 선택한 사냥꾼 울프헤임은 지상에서의 삶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 두 쌍은 그렇게 다른 지향점을 따라 각자들의 길을 가지만 모두 좌절한다. 뤼베크와 이레네의 경우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산정에 서 눈사태에 묻혀 죽고 만다. 마야와 울프헤임 역시 자신들의 이상향은 찾지 못한다. 현실의 일상적 삶이든 이상의 비전을 쫓는 예술적 삶이든 끝은 영()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 모든 것이 끝나므로 적어도 뤼베크-이레네 쌍에게는 구원일 수도 있겠다. 인간의 유한성과 예술의 무한성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느 경우이든 예술의 상징성과 추상성, 그리고 인간 삶의 부조 리성과 비극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죽어 깨어날 때>에는 20세기 연극의 거의 모든 스펙 트럼이 들어있다. 버나드 쇼도 스토리의 단순함과 간결함에 주목하며 작품 콘셉트의 규모가 너무 광범해 포착하기 어려워 입센 찬탄자들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고 했다. 특히 70세의 나이에도 전혀 쇠퇴하지 않은 입센의 '마술'이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났다고 평했다. 칼 네륨은 천재의 기이한 작품으로 고통의 분위기와 환상적인 서정주의가 특히 매력적이라고 평했고, 브라네스는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지상에서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우리 죽어 깨어날 때>는 매우 간단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간단하고 진부한 이야기는 다양한 상징들로 풍요로워지고 신비로워지며 많은 질문을 하게 한다. 이레네는 정말 현재에도 살아 있는 실존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예술을 위해 일상의 삶을 포기했던 조각가 뤼베크의 양심을 두드리는 어떤 추상적 개념이거나 존재인가? 삶과 예술 중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는가? 뤼베크와 이레네는 눈 속에 묻혀 죽는데 반해 멀리 산 아래에서는 자유를 찾은 마야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현세의 삶이 더 우위에 있다고 작가 입센은 말하는 것인가? 등의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는 <우리 죽어 깨어날 때>는 예술과 삶에 대한 드라마이다. 특히 이 두 가지에 대한 예술가의 양가적 고뇌와 갈등이 주제이다. 작가 입센은 조각가인 뤼베크와 자신을 상당 부분 동일시하고 있다. 뤼베크의 말이 때로 입센이 했음직한 말과 너무도 닮아있기 때 문이다.

극작가인 입센의 '극적 에필로그'<우리 죽어 깨어날 때>는 입센이 예술가이지만 지상에 뿌리내려야 하는 현실의 삶과 가족을 비롯해 현실의 여러 가지를 희생하며, 혹은 희생시키며 형이상학적으로 고양되어야 하는 예술사이에서 평생 고뇌하고 갈등했던 자기 자신의 삶을 조각가 뤼베크의 삶에 투영한 상징적 드라마로 탄생된 것이다.

 

 

<우리 죽어 깨어날 때>1899년 코펜하겐에서 12,000부가 출판되었다. 한데 이 첫 출판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예매로 매진이 되어 3일 후 2판을 찍어야 했다. 작품이 출판되자 유럽의 여러 극장의 제작자들이 공연권을 먼 저 가져가려고 오슬로에 모여들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 내외에서 많은 리 뷰가 발표되었으나 평자들의 이해를 우호적으로 받지는 못하였다. 그에 비 해 노르웨이에서의 반향은 크리스티아니아를 비롯해 베르겐, 트론헤임, 크리스티안산, 스타방게르의 언론들까지 큰 관심을 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센의 조국에서의 공연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입 센이 코펜하겐의 왕립극장에 공연권을 먼저 준 것에 대한 노르웨이인들의 분노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세계 초연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호프테아터에서 이루어졌고 이후로도 독일에선 1년 동안 수많은 도시에서 모두 215회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등의 번역본은 20 세기초에야 출간되었다.

<우리 죽어 깨어날 때>의 수용에서 특기할 사항은 1898년 창립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행보였다. 이 극장은 이미 1899<헤다 가블레르>를 공연 했고, 1900년에는 <민중의 적>도 레퍼토리에 들어있었다. 다음 레퍼토리가 <우리 죽어 깨어날 때>였는데 이 공연을 위해 네미로비치 단첸코는 의상, 무대디자인, 소품을 디테일하게 노르웨이적으로 마련하느라 조연출자를 노 르웨이로 보내 조사하게 하는 영성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연은 이미 공연되었던 작품들에 비해 냉랭하게 수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