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전은숙 '코끼리에 관한 오해'

clint 2022. 4. 17. 10:52

 

 

 

아무도 찾지 않는 옥탑방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다.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소설을 쓰고 어머니는 그 소설을 바깥세상에 소개한다.

아들은 씨앗 하나를 품고 오줌을 누며 키운다어머니 몰래 키우는 그것은

어느 새 꽃으로 피어나고 예전과 다른 옥탑방 냄새에 어머니는 민감하다.

그러던 중 낡은 하수관이 코끼리로 변해 아들을 바깥세상으로 나가자며 유혹한다.

어머니를 배신할 수 없는 아들은 코끼리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그러던 중어머니는 꽃을 발견한다어머니는 이상한 그 꽃을 꺾어버리고 자신의 희망이라 생각한 그 꽃이 시드는 것을 본 아들은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인다.

코끼리는 계속 세상으로 나가자 유혹하고, 경찰이 들이닥친다.

 

 

 

 

무대는 폐쇄된 다락방. 다락방이라는데 어디 한 곳 창문 하나 붙어있지 않다. 입구마저 너무 좁아 천천히 기어다녀야 할 판이다. 그 문은 바깥에서 거대한 쇠사슬로 묶였는지, 엄마가 드나들 때마다 쇠사슬을 풀고 묶는 소리가 요란하다.

색깔은 검은색과 회색 톤이 주종을 이루는 무채색이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붉은색이 눈에 띄는데, 붉은색은 딱 세 곳에 쓰였다. 엄마의 입술, 소설을 쓰는 아들의 원고지, 엄마가 아들에게 선물로 손수 짜주려는 스웨터. 엄마는 자신의 뱃속에서 스웨터 짤 실을 뽑아낸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함께 혈연과 혈연의 의무감이 낳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엄마는 바깥세상은 모두 썩었고 다락방이야말로 유일하게 순결한 공간이라 믿기에 지독히도 사랑하는 아들을 다락방에만 가둬 둔다. 아들 역시 그런 엄마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존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코끼리라 소개하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찾아온다. 연미복 차림의 신사들이 쏟아지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기억하는지. 꼭 그와 같은 인물인데, 엄마에게서 벗어나라고 아들을 부추긴다. 여기에 넘어간 아들은 끝내 엄마를 제 손으로 죽이는 파국을 맞이하는데, 죽어 가며 엄마가 지르는 외마디에서 기가 막힌 반전이 시작된다. 엄마는 4년 전에 이미 죽고 없단다. 알고 보니 아들이 죽인 것은 엄마가 아니라 코끼리였다. 이때부터 영화 메멘토때처럼 관객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코끼리와 엄마는 아들의 내면에서 싸우던 두 개의 자아였던가. 회색빛 우중충한 다락방은 그런 두 자아가 충돌했던 내면세계였고 쇠사슬은 외부와 차단된 병적인 심리 상태를 나타냈던 것이었다결국 죽인 것이 코끼리라는 것은 스스로 성장을, 혹은 살인을 거부한다는 뜻이었을까. 잠재의식 속에 숨겨둔 모친 살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밤마다 꾸는 꿈이었던 셈인가. 다락방 바깥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동굴 속 울림소리처럼 처리된 것은 꿈결에 들었던 바깥 소리였던가.

 

 

 

 

2007년 제9회 옥랑희곡상 자유소재 부문 당선작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불과 1시간 남짓한 러닝 타임임에도 상징적인 대사와 행동이 촘촘히 박혀 있어 극의 밀도가 대단히 높다. 이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에 비유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이 작품이 무엇을 모방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기존의 작품들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독특하고, 여지가 많으며, 주관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서사의 두 가지 요소인 지속, 발전, 점증과 역전, 반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변화를 위한 제3의 인물이 등장하며, 사회적 통념과 상식을 뒤집는 패러독스가 있다.


옥랑희곡상 심사평에서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공연될 경우 한국 연극에 매우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많은 여지가 있는 숨겨진 층위이다. 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숨겨진 층위는 연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행동하는 인간을 상징과 메타포와 기호 등으로 표현되어진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심리적 동기가 있어야 한다. 전은숙의 코끼리에 관한 오해에서의 정신적 심리적 동기 속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가 자아와 의식, 오이디프스 콤플렉스, 꿈과 무의식, 성의 문제, 성장과 지배와 종속의 문제 등이 담겨져 있다. 그로테스크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지각된 대상과 추상적인 혹은 심리적인 대상간의 모순을 야기한다. 그러한 모순은 제3의 등장인물을 통해 무대 위에 표현된다. 더불어 구체적인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전망이 르네 마그리트의 추상적인 그림과 작품의 순환적 구성으로 나타난다. 작품 속에서 그로테스크는 인간의 동물로서의 변형과 동물의 인간으로의 변형이 나타나고 이러한 인간의 동물성과 동물의 인간성은 인간의 전통적인 이상과 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