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황정은 '산악기상관측'

clint 2021. 3. 21. 13:14

 

 

산에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라 소개되었고 <>, <산악기상관측>, <과거를 묻는 방법> 까지 세 개의 단막극이 이어져 있다. 무엇보다 연극에 산이라는 공간을 들여오는 것에 관한 기대가 컸고, 산이라는 공간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궁금했다. 세 개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가 보니, 산은 인물들이 억누른 갈망과 비밀이 예측 불가능하게 터져 나오는 비일상적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 배경이 되는 산 역시 상징공간으로서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처럼 느껴진다. 산의 풍경과 날씨가 주는 비일상적 에너지에 묘하게 홀려있는 것 같은 인물들의 대화가 진행될수록, 덩달아 산의 에너지에 홀리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단막극 <>는 홀린 듯 산에 들어갔다가 코가 도망가 버린 남자가 병원에 찾아오며 시작된다. 이어 귀가 도망간 여자가 병원에 나타나 보급형 코와 귀로 갈아 끼우는 수술을 받는다. 코와 귀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 처음 들어보는 새소리에 이끌려 이들을 떠났다고 한다. 코와 귀가 도망간 남자와 여자는, 사람들의 도망간 눈과 코와 귀가 산을 이루어 움직이는 압도적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눈과 코와 귀는 산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냄새와 소리를 만나고, 새로운 것으로서 살고 싶었던 욕망이 깨어나 인물들을 떠나게 된 것 같았다.

 

<산악기상관측>은 산악기상관측연구원인 주한과 경원의 이야기다. 주한은 과학고 재학시절 친구의 연구 성과를 훔쳤다가 교생 선생님에게 공개적으로 혼이 난 적이 있다. 주한은 <산악기상관측>에서 선배 연구원 경원을 납치하게 되는데, 관객들은 정황상 고등학생 주한을 혼낸 그 교생 선생님이 바로 경원이라 추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경원은 주한에게 자신이 결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때 주한은 다들 아니라고 하던데, 이번에는 확실해라며, 이미 더 많은 사람들을 해쳐왔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한다. 경원 자신이 먼저 공유한 교생 실습 때의 경험이 주한의 고교 시절 경험과 일치함에도, 자신은 끝까지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원. 텍스트 차원에서부터 끝내 단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 예측 불가능한 산의 속성과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단막극에서 경원과 주한은 오프로드를 차로 달리며 대화한다. 소파를 자동차로 활용하여 연기한 장면에서 그 인물은 계속 산악기상의 예측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공격성과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가을의 산에서 주한이 음악을 틀고 두 사람이 마치 낭만적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연출된 장면의 다음 순간, 주한은 경원에게 예측 못 할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런 장면들은 주한이 자신의 대사에서 우리를 배신하는 곳이라고 말했던 것과 공명하며 깊은 인상을 준다.

 

 

 

 

세 번째 단막극이었던 <과거를 묻는 방법>20대부터 친구였던 39살 주한, 정인, 경원이 1231일 산에 올라 과거를 묻는자신들만의 의식을 치른다는 내용이다. ‘편지를 묻을 돌을 찾기 위해 어둠속을 헤매고, 과거를 묻으려고 판 구덩이에 빠져서 발목을 다치고, 산속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는 연기가 일관되게 실감난다. 극의 마지막에, 인물들은 정작 과거를- 황정은 작가의 표현처럼-‘일종의 무덤에 묻는 일에 실패하며, 다만 스스로가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숨겨온 상처와 비밀들이 환히 드러난 상태로, 이들은 11일을 맞이한다. 과거를 파묻으러 산에 온 세 사람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 재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한다. 세 친구는 겨울의 산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 새해 카운트다운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나란히 마흔 살이 된다.

 

 

작가의 글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그 유해는 산에 묻혔습니다. 장례 후, 엄마의 유해가 먼산으로 옮겨가는 과정 속에서 저는 한 인간이 땅에 묻혀 기억이 되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까요. 산은 저에게 기억이 묻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 기억은 저에게 곧 과거였습니다. 산악기상관측은 기억에 대한 화두에서 시작한 듯합니다. ‘-듯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실 저도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분명 산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일을 쓰자고 마음먹었는데 이야기를 쓸수록 산에 묻어둔 기억의 이야기로 변했습니다. 산은 저에게 컨트롤 되지 않는 존재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산을 때때로 오릅니다. 컨트롤되지 않기에 산이 더 궁금하고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여기니까요. 어쩌면 우리의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감각에 담겨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를 썼고, 인간의 기억과 그로 인해 생겨난 비뚤어진 컨트롤 욕망을 이야기하고자 산악기상관측을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 올린 과거 위에서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생각하며 과거를 묻는 방법을 썼습니다. 세 가지 이야기가 모두 다른 결로 태어나길 바랐습니다. 모두의 기억이 각각에게 각각 다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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