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우리는 왜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일까요?”
“생각을 해봤는데, 배종옥이가 나한테 오기로 해놓고 오지 않은 건, 배종옥이가 바빠서가 아니라 내가 잘못해서인 것 같거든.”
여든이 넘은 ‘할머니 귀신’ 영보는 서울 변두리 달동네 낡은 아파트에 산다. 미국 대사 막내딸 실종사건이 발생한 어느 날, 영보의 집 앞에 배종옥이 나타난다. 촬영차 왔다는 배종옥은 영보에게 드라마 엑스트라로 출연해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오기로 약속한다. 영보는 배종옥이 자신을 찾아왔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지만, 모두 배종옥을 모른단다. ‘너는 내 운명’에 나온 여자는 김현숙이고, ‘푸른 해바라기’에 나왔던 사람은 허윤정 밖에 모른단다. ‘탤런트’ 이름을 줄줄 꿰는 사람도 배종옥은 처음 듣는 이름이란다. 미칠 노릇이지만 꿋꿋이 배종옥을 기다리던 영보가 갑자기 유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다.
김연재의 「배종옥, 부득이한」은 눈에 띄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배종옥은 우리 모두가 아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극에서는 등장인물 중 누구도 배종옥을 알지 못한다. 주인공 할머니가 배종옥이 나온 작품들을 열거해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부득이한’은 부득이하게 경비원을 해고하게 되었다는 작품 속 문구와 결합되어 있다. 누군가 있는 것이 너무도 명확한데 없는 것처럼 여기는 세상. 그러고 그 속에서 부득이하다는 논리로, 사람을 사람답지 못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이 작품은 담고 있다. 그런데 「배종옥, 부득이한」은 이와 같은 주제를 글쓰기의 형식 속에서 섬세하게 녹여내고 있다. 없음을 통해서 있음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방식은 기실 희곡이라는 장르의 본질적인 방식이다. 김연재 작가는 직접 드러내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고독과 배려, 절망과 자존감, 분노와 자괴감, 사랑과 무관심의 작은 경계들을 이야기한다. 마치 비밀처럼.
작가의 글- 김연재
<배종옥, 부득이한>은 급식 파업과 경비원 해고, 연극계 내 성폭력, 따돌림, 가난, 젠트리피케이션 등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실재와 부재 사이를 오가는 ‘배종옥’이라는 존재를 통해, 분명히 거기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지워지고 사라지는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오지 않을 어떤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무대에 불러내, 너무나 쉽게 사라져버리는 그들의 삶을 연극을 통해 사려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작품으로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위치와 운동>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폴라 목> <우리가 고아였을 때> 등을 발표했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범철 '여관별곡' (1) | 2021.03.25 |
---|---|
정범철 '로봇 걸' (1) | 2021.03.25 |
황정은 '산악기상관측' (1) | 2021.03.21 |
고연옥 '인간이든 신이든' (1) | 2021.03.21 |
고연옥 '검은 입김의 신' (1) | 2021.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