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clint 2020. 11. 1. 13:29

 

 

 

심판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두 번째 희곡이다. 첫 희곡 인간은 통상적인 희곡의 형식을 따르지 않아 소설로도 희곡으로도 읽혔다. 하지만 작가가 연극화를 염두에 두고 집필했을 2인극 형태의  인간은 프랑스에서 즉시 무대에 올려 졌고 2010년 국내 초연을 시작으로 한국 관객들과도 만났다. 2015년에 출간되었지만 국내에 뒤늦게 번역 출간되는 심판역시 프랑스에서 무대에 올려졌으며, 올 가을에도 새로운 연출가에 의해 다시 한 번 프랑스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심판은 폐암 수술 중 사망한 판사 아나톨 피숑이 천국에 도착해 천상법정에서 다음 여정을 위한 심판을 받는 내용이다. 재판장인 가브리엘, 그의 수호천사이자 변호인인 카롤린, 그리고 구형을 맡은 검사 베르트랑이 그의 지나온 생을 조목조목 평가해 환생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주로 이 네 인물의 대화로 구성된 작품은 전작 타나토노트의 심판 장면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 탓에 베르베르의 작품 세계와 친근한 독자는 이번에도 전생과 환생 이야기야?” 하는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등장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촌철살인의 대화와 베르베르 식 유머는 이런 우려를 씻어주면서 참신하고 유쾌한 내용을 선사한다.

 

 

 

베르베르의 작품에서 유머는 주제와 상황의 무게로 발생하는 긴장감을 풀어 주기 위해 쓰이는 필수 장치다. 죽어서도 손에 끼었던 반지에 집착하고, 상속세 때문에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심판의 주인공 아나톨은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 심판의 재미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역할 설정에도 있다. 피고인 아나톨이 죽기 전 가졌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판사였다. 전생에 부부였던 카롤린과 베르트랑은 이혼의 앙금 탓인지 천상에서도 서로를 원망하면서 역할이 뒤바뀐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재판장 가브리엘이다. 영혼의 환생 여부를 판단하고 지상의 태아와 짝 짓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전문가답지 못한 허술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마음 약한 이웃사람 같은 그녀는 피고인의 요구에 끌려 다니며 쉬이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심판은 만성적인 의료계 인력 부족, 교육개혁. 법조 계 부패 같은 프랑스 사회의 문제를 건드리고 결혼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위트 있게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의 대다수 작품이 그렇듯 핵심 주제는 여전히 운명과 자유 의지의 문제다. 피고인 아나톨 피숑이 심판 과정에서 스스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오랜 고민과 성찰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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